소설리스트

92화 (76/187)

******

“민정 부분은 얼추 기강을 다잡아놓았으니, 이제는 군제에 대해 논해보지.”

“라인강에 설치된 장벽들을 해체해서 알비스 유역으로 옮기고 있긴 합니다.”

“아니, 그거 말고 군사제도에 대해 논의하려고 하는데, 좋은 생각이 있는가?”

이에 사루스가 물었다.

“각하, 지금 아군은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하고 주변에서 우리를 위협할만한 이들이 없는데, 왜 제도를 바꾸자고 하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유가 있으니까 바꾸자는 것이네, 지금의 우리 군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열이 뻗쳐서 책상을 '탁' 치면서 말했다.

“이놈들이 빨아먹는 돈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어! 뭐 나오는 건 없는 놈들이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아!”

“그거야 각하께서 군인들에게 들어가는 모든 물건을 좋은 상태를 유지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돈이 너무 들어! 게르마니아의 일 년 예산의 절반이 군대에 들어가고 있는데, 이게 정상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말이 없었다.

“지난번에 논의했던 그거, 다들 기억하나?”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거 말이야 그거.”

“그러니까 그게 뭡니까.”

“그 왜 국경지대에 땅을 빌려줘서 병사들에게 농사를 짓게 한다는 거 말이야.”

“그건 지난번에 여러 문제 때문에 하지 않기로 결정 난 게 아니었습니까?”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뒤로 미룬 거였지.”

데키무스가 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각하, 아무리 그래도 병사들에게 농사를 짓게 했다가는 무슨 짓이 벌어질지 너무 뻔한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걸 조금 고치는 거지.”

“고친다고요···?”

“국경에 배치된 병사들에게 들어가는 돈을 시민들이 내게 하는 거지.”

“......?”

데키무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회의장에 모인 대부분 사람이 그랬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했다.

“기존에 병사들을 징집할 때, 시민들에게서 징집했었잖나.”

“예,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군대에 가기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군대 가기 싫어하는 건 누구나 그렇지요.”

“그러니까, 군대에 가서 농사를 못 짓는 이들의 땅의 일손을 도와주면서 분기마다 일정량의 돈을 내면, 군대를 빼주는 거지.”

“그러니까 지금 각하께서는 합법적으로 군대를 빠질 수 있는 권한을 주자···. 이런 겁니까?”

“그렇지. 안 가고 싶으면 돈을 내라!”

데키무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각하, 그렇게 되면 누가 군대를 오려고 하겠습니까···.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전부 군대를 빠지려고 들 겁니다.”

“애초에 돈 있는 놈들은 군대에 안 가지 않았는가, 그놈들에게서 합법적으로 뜯어내서 병사들에게 더 투자하겠다는 것이네.”

가만히 듣고 있던 사루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게르만족 병사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한다면···.”

“아니지, 그들에게는 조금 다르게 적용할 것이야.”

“예?”

“그들은 부족 단위로 쪼개서, 각자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과 자금을 정해주고서 전쟁이 나면 정해준 만큼만 채워오게 할 것이야.”

내 말에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가난한 이들만 군대에 오게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빈민들은 신체검사에서부터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합니다.”

“거기다가 빈민들을 군대로 데려온다고 쳐도···. 그들을 치료하고 훈련하는 데까지는 오래 걸릴 게 분명합니다.”

회의장에 모인 이들의 반대가 심했다.

“지금도 기준미달인 신병들을 마구 데려다가 쓰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군대 가기 싫어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대놓고 자르는 예도 있네.”

“그래도 그것과는 다른 상황이 아닙니까···.”

“다르지 않네, 군대를 정말 오기 싫은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서 고생하는 병사들에게 더 나은 처우를 약속하겠다는 것이야.”

데키무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각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당장은 좋은 성과를 낼 정책이긴 합니다. 하지만 차후에 반드시 문제가 터져 나올 게 뻔합니다. 저는 각하께서 이런 정책을 들고 오실 때마다 뭐가 그리 급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자네들은 아무것도 몰라.”

회의장에 자리 잡은 이들을 둘러봤다.

다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들에게 몇십 년 뒤에 로마를 파국으로 치닫게 만드는 유목민족의 대대적인 침공이 있다고 말한다고 한들 몇이나 믿어줄까.

“아무튼, 이 정책은 다음 주부터 실행하겠네.”

로마의 휴일 - 4

회의가 끝나고 나는 골방에 틀어박혔다.

이제 보고서를 쓸 시간이었는데, 바루스의 울음소리와 안토니나의 칭얼거림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정복했노라···. 아니야!”

그동안 관심을 끄고 있던 스틸리코에게 한 방 먹이고, 황도의 시민들이 열광할만한 명문이 필요했다.

마음 같아서는 수백 장이라도 쓰고 싶었지만, 종이가 넉넉지 않아서 아껴 써야 했다.

“종이도 많이 만들어야겠는데···.”

“들어갈게요.”

문이 벌컥 열리면서 바루스를 품에 안고 있는 테르만티아가 들어왔다.

“방이나 집무실에 없어서 한참이나 찾았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

“제가 무슨 일이 있어야 찾아오는 사람인가요?”

“그, 그건 아니지···.”

그녀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가져와 내 곁에 앉더니, 내가 쓰고 있던 보고서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버지한테 보내시는 그건가 봐요.”

“그렇지 뭐···.”

“보아하니 잘 안 써지는 모양인데···. 맞죠?”

“끄으으읍···.”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빨리 끝내고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죠.”

“당신이?”

내 물음에 테르만티아는 미소를 지었다.

“한번 믿어보세요. 아버지 목덜미 잡게 만드는 건 제 전문이거든요.”

“내,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후후···. 그런가요?”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고, 그녀의 품 안에 안긴 바루스 또한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하였다.

******

“합하, 찾으셨다고···.”

“앉게나.”

폴로는 평소보다 진중해 보이는 스틸리코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리우스가 오랜만에 보고서를 보내왔네.”

“보고서요?”

“마리우스가 게르마니아를 다시 정복했다는군.”

“예!?”

폴로는 황급히 보고서를 받아들고서 읽었다.

한 글자씩 세심하게 지켜보던 폴로의 입가가 용솟음치더니,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역시 마리우스 님이십니다.”

“이게 웃을 일인가!”

“하하하···. 술 몇 통으로 게르마니아를 정복하다니, 참으로 마리우스 님 덥군요.”

“자네는 이걸 믿는 건가? 이건 대놓고 나를 기만하려는 게 아닌가! 상식적으로 술 몇 잔 마셨다고 저들이 알아서 고개를 숙인다는 게 말이 되나!”

“그건 그렇지만, 마리우스 님이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그러려니 하십시오. 정 못 믿으시겠다면 사람을 보내서 확인하면 될 일이 아닙니까?”

스틸리코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뿐만이 아니야. 게르만족들이 마리우스를 왕으로 모시고 있다지 않은가, 이건···. 이건···.”

“합하께서 뭘 하든지 신경 쓰시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현지에서도 사정이 있었겠지요.”

스틸리코가 매서운 눈빛으로 폴로를 쏘아보니, 폴로가 흠칫 놀라면서 입을 닫았다.

“거기다가 3년 전에 함대가 탈주했다는 이야기는 왜 이제야 하는 거야! 지난 보고서들에는 없던 내용인데!”

“게르마니아에 문제가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일이 아니었습니까.”

“그곳에 문제가 많은 것과 보고해야 할 것을 빠뜨리는 건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합하,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우선은 화를 조금 가라앉히시고···.”

“그것뿐만이 아니야! 즉위식을 연다고 암브로시우스를 보내 달라고 요구하고 있네!”

“어쩌겠습니까, 요구만 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성과를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어찌 되었건 로마는 다시금 승리를 거뒀고, 또 한 번 위대해졌습니다.”

“쯧···.”

스틸리코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라벤나의 시민들은 마리우스의 게르마니아 정복 소식을 듣고서 크게 환호했다.

늘 그렇듯이 시민들은 영웅의 등장에 환호하는 경향이 있었고, 지금처럼 제국의 어두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영웅에 대한 소식은 시민들의 가슴속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초대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아무도 넘보지 못한 곳이었는데, 마리우스 장군이 대단하구먼!”

“게르마니아를 정복했으면, 곧 노예들이 몰려들어서 노예 값이 폭락할테니···.”

“게르마니아라···. 거기서는 먹고살 수 있으려나?”

마리우스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으로 깔보던 원로원 의원들의 반응 또한 시민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아무도 이뤄내지 못했던 게르마니아 정복이라는 대업을 이룬 마리우스에게 호의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게르마니아 총독이 대단한 일을 했습니다.”

“그가 스틸리코의 파벌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좋은 소식을 들으니 좋군요.”

“게르마니아에 새로운 영토가 생겼으니···. 의원님들도 투자하실 계획이 있으신지요?”

“허허허···. 당연히 해야지요. 안 그래도 이번에 농산물값이 크게 올라서 수입이 쏠쏠했습니다.”

마리우스의 위대한 업적에 로마가 환호했다.

스틸리코만 빼고.

******

최근 에우트로피우스는 웃음이 늘었다.

그를 보좌하는 친위대장 파비우스는 그런 에우트로피우스에 물었다.

“합하, 최근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모양입니다.”

“응? 왜 그렇게 생각하나.”

“매일같이 웃음이 끊이지 않으시고, 정적들을 쳐내실 때도 자비를 보이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내가 그랬나?”

“예, 무슨 일인지 제게도 알려주십시오.”

에우트로피우스는 품속에서 고이 접어둔 그림 하나를 꺼내, 파비우스에게 보여줬다.

“이게 뭡니까?”

“내 손자라네.”

“아, 마리우스 님의···?”

에우트로피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보내준 손자의 그림은 에우트로피우스의 보물 중 하나였다.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에우트로피우스는 그림으로만 봐도 에우독시아를 빼닮았다고 생각하며 매일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합하. 제가 미처 알지를 못했군요.”

“하하하···. 아닐세, 나도 다른 이들에게 알린 건 자네가 처음이라네.”

“그렇습니까?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런가? 하하하.”

에우트로피우스는 그림을 곱게 접어 비단 주머니에 넣고서는 웃는 얼굴로 파비우스에게 말했다.

“그리고 마리우스가 게르마니아를 정복했다고 하는구먼.”

“게르마니아를 말입니까?”

“그래,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는 몰라도 말이야.”

“이야···. 대단하시군요. 게르마니아는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할거로 생각했는데···.”

“대단하긴 하지, 안 그래도 콘스탄티노플의 원로원에서 하루가 멀다고 떠들어대는 게 조금이나마 조용해지겠군.”

에우트로피우스의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입꼬리는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 폐하께서는 좀 나아지셨나?”

“여전합니다. 방에서 나오실 생각을 안 하십니다.”

“큰일이군. 정무는 둘째 치더라도 슬슬 폐하께서도 혼인하셔서 후사를 만드셔야 하거늘···.”

“아예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티마시우스 장군은.”

“매일같이 다른 군단장들과 총독들을 만나고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에우트로피우스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원···.”

“제게도 편지를 보내서 만나자고 했었는데···. 여기 있습니다.”

“편지···?”

에우트로피우스는 빠르게 편지를 훑고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쯧쯧···. 다 늙어서 헛짓거리군.”

“무슨 내용이 적혀있습니까?”

“자네, 안보고 가져온 건가?”

파비우스는 멋쩍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까막눈인지라 글을 모릅니다.”

“뭐? 까막눈? 하하하···. 티마시우스 이런 멍청이 같으니, 자네가 글을 모른다는 것도 모르고 편지를 보낸 거로군.”

“그런데 그 안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있었던 겁니까?”

“그저 만나서 이야기나 나눠보자는 내용이더군.”

“으음···. 그렇군요. 한번 만나볼까요?”

“아니, 괜찮아.”

에우트로피우스는 편지를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파비우스, 자네 휘하에 있는 병사가 어느 정도인가?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병사는 또 얼마고.”

“제 휘하에 친위대와 친위군단이 있긴 하지만, 지금 시간대면 친위대 오백 정도와 친위군단 이천 정도가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당분간은 병사들에게 긴장 상태를 유지하라고 전해주겠나? 조만간 티마시우스가 일을 저지를 것 같으니 말이야.”

“일을 저지르다니요?”

에우트로피우스는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티마시우스는 루피누스를 보고서도 뭔가 알아차린 게 없는 모양인가 보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