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적거리는 병사들을 치우면서 놈에게 달려가 눈을 마주치니, 놈의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 보였다.
[저놈이 너무 날뛰고 있습니다. 전열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장군···. 이제 슬슬 치고 나가셔야 합니다.]
[으음···. 산 채로 잡을 수는 없겠지···.]
[장군, 이러는 사이에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비디메르는 침음성을 흘리고는 다친 왼손을 몇 번 쥐락펴락 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비대를 투입해서 저놈들을 포위한 뒤에 한 놈도 빠짐없이 모두 죽여.]
[예, 장군!]
한참을 신나게 창을 휘두르고 있다 보니, 데키무스가 급히 달려와서 나를 뜯어말렸다.
“각하! 슬슬 후퇴하셔야 합니다.”
“뭐? 벌써?”
“너무 깊이 들어왔습니다. 적들이 나가는 길을 틀어막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으음···. 자네 판단이 맞겠지. 내가 앞장설 테니 병사들 한 명도 빠짐없이 데려간다.”
“예, 각하!”
나와 데키무스가 돌아다니면서 곳곳에 흩어져있던 병사들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너무 대책 없이 깊숙이 들어온 탓인지 병사들을 얼마 수습하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적들이 아군의 퇴로를 가로막으려 하고 있었다.
“각하! 이제는 가셔야 합니다.”
“아직 병사들이 남아있잖아.”
“더 있다가는 모두 죽습니다!”
“쓰읍···.”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되뇌며 몇몇 병사들을 추려서 적진을 뚫고 빠져나왔는데, 혼란하고 시끄러운 전장 속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총독 각하! 어째서 저희를 버리십니까!”
“살려주십시오!”
고개를 돌리니, 적진 깊숙이 포위된 병사들이 애타게 나에게 소리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면서 상태를 확인해보니 조금 지친 듯했지만, 아직은 괜찮아 보였다.
“좋아.”
“예?”
바로 말머리를 돌려서 망설임 없이 다시금 적진에 들이박았다.
[저 새끼 또 왔다!]
[또···!]
[왜 자꾸 나 있는 쪽으로 오는 거야!]
“각하께서 오셨다!”
“살았다!”
이때쯤 되니, 아무리 체력이 좋은 나라고 해도 슬슬 몸이 지치면서 퍼지기 시작했다.
창은 진작에 부러져서 검을 휘둘렀는데 그 속도가 창을 내지를 때의 반도 못 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적진을 헤집으면서 병사들을 구해서 적진을 빠져나오니, 사루스와 데키무스가 복잡한 얼굴로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각하, 몸은 괜찮으신지요.”
“음···. 아까 왼팔에 창이 좀 스치긴 했는데, 멀쩡히 움직이는 거 보니까 괜찮은 것 같네.”
“하아···. 일단 매복지점까지 가시지요. 적이 단단히 화난 모양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디메르의 분노가 터져 나오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런 멍청한 자식들! 저놈 하나를 못 막아서!]
[장군, 진정하시지요.]
[진정은 무슨 놈의 진정이야! 당장 저놈을 잡아 오란 말이다!]
[어차피 저들이 아군에게 준 피해는 그렇게 큰 것도 아닙니다. 우선은 진정하시고 지친 병사들을···.]
[겁나면 빠져! 내가 직접 간다!]
[장군!]
형편없이 털리는 병사들을 보면서 잔뜩 화가 난 비디메르는 직접 고트족 정예병과 수만 명의 게르마니아 징집병들을 이끌고서 마리우스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전투 이후 이어진 추격전에 완전히 탈진해버린 몇몇 병사들이 뒤처졌다.
[거기서라 쥐새끼 같은 놈아!]
“각하, 곧 매복지점입니다.”
“저 새끼 많이 화난 모양인데.”
“.....일단은 달리는 것에 집중하시지요.”
[거기서라! 네놈의 사지를 잘라서 개먹이로 던져줄 테다!]
이미 눈이 뒤집힌 비디메르는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좁은 숲길을 지나가느라 행렬이 길게 죽 늘어지게 되었고, 숲속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작은 잡담 소리가 들려왔지만, 비디메르는 오로지 눈앞의 마리우스를 쫓을 뿐이었다.
“크억-”
“각하, 숙이십시오!”
잔뜩 흥분한 비디메르가 창과 화살을 날려대는 통에 병사들의 희생이 점점 커져만 갈 때쯤.
숲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누가 우리의 대왕을 건드리는가!”
“마리우스! 마리우스! 마리우스!”
“누가 우리의 땅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가!”
“와···. 저 말 하려고 매복한다고 한 거야?”
[이건 무슨···.]
[장군, 매복입니다. 도망가셔···.]
비디메르의 부관은 조용히 날아온 화살이 목을 관통하더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비디메르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전투경험으로 인해 당황하지 않고서 침착하게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당황하지 마라! 적이 숨어있었다고는 해도 어차피 우리보다 소수다!]
하지만, 그런 비디메르의 다급한 외침도 무색하게 숲속에서 불붙은 통나무와 바위가 굴러오고, 화살이 날아드니 병사들은 공황에 빠졌다.
안 그래도 짧지만 격한 전투 이후에 이어진 추격전으로 체력소모가 심했기에 도저히 전투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으아악!]
[어머니···.]
[이새끼들아 정신 차리라고! 다 죽고 싶어?]
비디메르와 그의 휘하에 있던 고트족 병사들이 황급히 다른 병사들을 진정시키며 퇴각하려 했지만, 브레누스가 준비해뒀던 기름으로 진입로에 불을 질렀다.
[장군, 이제 어떻게 합니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다급하게 비디메르를 찾았지만, 비디메르는 말이 없었다.
주변에 쓰러지는 병사들을 둘러보면서 슬슬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동안 나를 따르느라 고생 많았다.]
[장군···?]
[아무래도 여기가 내 끝인 것 같다. 너희들은 항복해서 살아남아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같이 살아남으셔야지요!]
[맞습니다. 매번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으신 장군이 아닙니까?]
병사들의 말에도 비디메르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자네들에게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리겠다. 최대한 병사들을 수습해서 주군께 돌아가라···. 나는 내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적들이 혼란에 빠졌다. 총공격하라!”
게지카의 명령에 숲속에 숨어있던 병사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비디메르의 병사들을 덮쳤다.
비디메르는 자신을 향해 덤비는 병사들을 전부 베어내면서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갈 땐 가더라도 네놈과 승부는 끝마쳐야지!]
“고놈 참 끈질기네.”
몸이 살짝 처지고 피곤했지만, 놈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힘이 솟구쳤다.
그대로 말에서 뛰어내려 비디메르에 다가갔다.
중간중간 눈치 없는 몇몇 병사들이 내게 덤볐지만, 가볍게 처리하면서 앞으로 향했다.
[왔군.]
“왔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다음에 해야 하는 행동이 뭔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땀과 피로 번들거리는 손을 망토로 대충 닦고는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쥐었고, 비디메르는 왼손을 몇 번 쥐락펴락하고는 이내 두 손으로 도끼를 움켜쥐었다.
숨을 세 번 들이키고.
세 번 내뱉었다.
그리고는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비디메르는 벼락같은 몸놀림으로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막으면 죽는다.’
비디메르의 도끼는 우직하게 내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막는다면 그대로 머리가 둘로 쪼개질 정도로 강렬한 공격이었다.
그래서 막지 않고 흘려보냈다.
머리를 슬쩍 움직여 도끼날이 내 투구의 옆면을 스쳐 지나가게 했고, 그 틈에 녀석의 명치에 힘껏 검을 찔러넣었다.
있는 힘껏 내려친 도끼는 갑옷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리면서 내 어깨에 틀어박혔고, 그 순간 왼손의 힘이 확 풀리자 비디메르는 있는 힘껏 나를 걷어차고는 세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갑옷 탓인지 아니면 무식할 정도로 튼튼한 몸뚱어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명치에 손가락 하나 정도는 박힌 검을 뽑아낸 비디메르는 한 손으로는 상처를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는 검을 든 채로 내게 다가왔다.
[이제 끝을 내자.]
“하하하···. 더럽게 아프네···.”
왼손을 움직이려 해봤지만, 뼈가 다친 것인지 움직이려고 힘을 줄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다.
“전하!”
“각하!”
[장군!]
내 위험을 눈치챈 다른 이들이 황급히 나를 도우려고 뛰어왔고, 주변에 있던 병사 하나가 몸을 던져가면서 비디메르의 앞을 막았다.
[방해하지 마라!]
그 병사는 단 한 번의 칼질에 머리가 날아갔지만, 이름 모를 병사가 벌어준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이놈!”
있는 힘껏 달려온 브레누스가 그대로 뛰어올라, 비디메르의 등에 검을 찔러넣었고, 말을 타고서 달려온 사루스가 던진 창이 비디메르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새끼···. 꼴좋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더니 다리에 힘이 쭉 풀려서 주저앉으니, 어느샌가 다가온 데키무스가 날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죽을 것 같다.”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그래, 노력해보지.”
조금 피곤했다.
아니 좀 많이 피곤했다.
옆에서 데키무스와 다른 이들이 귀찮게 내 이름을 불러댔지만, 너무 피곤해서 농담할 기운도 없었기에 스르르 눈이 감겼다.
로마의 휴일 - 1
“모르는 천장이다···.”
“뭐가 모르는 천장이에요.”
“...아일라?”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낯선 천장인줄 알았던 내 방 천장의 모습과 옆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우독시아의 모습이었다.
“이건 꿈인가?”
그녀가 가볍게 내 이마를 때렸다.
얼얼한 것이 꿈은 아닌 것 같다.
“왜 때리고 그래···.”
“당신, 떠나기 전에 제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나요?”
“으음···.”
솔직히 기억이 안 났다.
누가 그런 걸 기억하겠는가,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꼴인지라 시간을 끌면서 기억을 뒤져봤다.
“당연히 기억나지.”
“그래요?”
한번 말해보라는 듯이 미소짓는 에우독시아의 모습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그게···.”
“잊어버리셨나 보네요.”
“아, 아니야! 기억나지 당연히···.”
“그럼 말해보세요.”
선택지! 선택지! 선택지!
왜 안 뜨는 거야 선택지!
셋 중에 하나 찍는 건 자신 있다고!
하지만 현실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내 대뇌의 전두엽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빠, 빨리 온다고 약속했었지···?”
“용케 기억해내셨네요.”
역시 전두엽이야.
성능 확실하구먼···. 그런데 기억을 담당하던 게 전두엽이 맞던가?
“빨리 오시긴 하셨는데···. 수레에 실려 오실 줄 상상도 못 했네요.”
“크흠···.”
불리할 때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최대한 비굴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녀가 한숨을 내쉬면서 누군가를 불렀다.
“유모.”
에우독시아의 부름에 방문을 열리더니, 이윽고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이를 내게 건네줬는데, 얼떨결에 아이를 받아들었다.
얼떨결에 품에 안은 아이는 곤히 자고 있었는데, 입맛을 다시는 것인지 입을 꼬물거리는 것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귀엽네, 그런데 누구 애야?”
“당신 아들이에요.”
“......?”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봤다.
어느샌가 눈을 뜬 아이는 똘똘한 눈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는데, 사진으로나 봤던 내 어린 시절 모습과 비슷했다.
손가락을 내미니 작은 손으로 내 손가락을 꽉 잡는 것이 뭔가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눈은 당신을 닮았네.”
“말 안 듣는 건 당신 닮았어요.”
“크흠···. 그래도 약속은 지켰잖아···.”
“아이 이름은 생각해 두셨어요?”
“으음···. 고민해봐야겠는데···.”
“그럴 줄 알았어요.”
아이 이름이라···.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어서 조금 고민되었다.
집에서 기르던 애완동물처럼 이름을 막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날 멀뚱멀뚱 바라보던 아이는 피곤했는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이내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참으로 태평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딱 적당한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바루스.”
“예?”
“아이 이름 말이야, 바루스로 하는 건 어때? 가이우스 바루스.”
“당신···. 혹시나 묻는 건데, 그냥 생각없이 게르마니아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지은건 아니겠죠?”
“나, 나를 뭐로 보고!”
역시 에우독시아는 날카로운 여인이었다.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정확한 부분을 짚으니 나도 모르게 말이 떨렸다.
“아니면 말고요.”
“각하, 깨어나셨다고 들었···.”
“바쁘신 모양이니 전 이만 가볼게요.”
“벌써? 음···. 그래 조금 이따가 봐.”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밖으로 나가던 그녀는 사루스를 스쳐 지나가면서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봤다.
사루스는 당황했지만,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
“쯧쯧···. 그러기에 인생은 타이밍이거늘···.”
“부인께서 같이 계신 줄 알았으면, 조금 기다렸을 겁니다.”
“그래, 자네가 날 이곳까지 데려온 건가? 전투는 어떻게 되었고, 지금은 며칠인가?”
쏟아지는 내 질문에 사루스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각하, 하나씩 물어봐 주십시오.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시면 당혹스럽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래서 전투는 누가 이겼나?”
“당연히 아군의 승리였습니다. 다만, 비디메르라는 놈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또 적의 숫자도 많았던지라 일부가 포위를 뚫고 도망갔습니다.”
“비디메르? 내가 쓰러지기 전에 그놈이 너덜너덜해지는 것까지 봤는데, 무슨 저항을 했다고?”
“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