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72/187)

그때까지 가만히 꾹 다물어져 있던 사루스의 입이 열리며 폭풍 같은 잔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각하, 저들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작전이라고 들고 왔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제법 괜찮은 작전 아닌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각하, 저들은 전투 중에 각하가 죽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유인책이지 죽을 확률이 제일 높은 자리가 아닙니까?”

“죽는다고? 누가? 내가?”

“지금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농담 아닐세, 지금까지 날 죽이려던 놈들이 모두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나?”

사루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대로 얼어붙은 사루스의 말이 뚝 끊겨버렸고, 그런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전부 거지꼴로 도망가거나 죽었지.”

“각하···. 아무리 그래도 적은 수십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위험합니다.”

“자네와 데키무스가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여차하면 자네들이 날 지켜주면 될 일이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저들이 위험한 상황을 만든 것은 사실 아닙니까.”

사루스를 돌아봤다.

굳게 다물어진 입과 부리부리한 눈에서는 불만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자네가 내게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했을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나?”

“믿겠다고 하셨지요.”

“저들은 자네와 다른가?”

“......”

“내가 자네를 믿는 만큼 저들도 믿고 있다네, 애초에 믿지 않았다면 받아들이지도 않았어.”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니 사루스는 물론이거니와 곁에서 듣고 있던 브레누스와 게지카, 다른 병사들까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히 무안해져서 한마디 했다.

“뭐 하나? 다들 손뼉 안 치나?”

“게르마니아의 총독이자 게르만 인들의 보호자이신 마리우스 대왕 만세!”

“만세!”

손뼉만 치라고 했는데, 브레누스가 선창하더니 이내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모두 내 이름을 연호하면서 만세를 불러댔고, 나는 그런 이들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비디메르는 부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선두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비디메르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너무 느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강이 제법 큰 데다가, 충분한 수의 뗏목을 확보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래서야 오늘 안에 강을 넘어갈 수나 있겠나?”

“병사들을 재촉한다면 오늘 저녁쯤에는 모두 건널 수 있을 겁니다.”

“늦어도 너무 늦어, 적들은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한데 우리가 늦는다면 적에게 유리한 지점을 뺏길 게 분명해.”

“정찰병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지요.”

워낙 대규모의 부대였기에 강을 건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질서정연하게 강을 건너서 저녁이 되기 전에는 전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고 생각한 비디메르는 쉴 틈도 주지 않고 병사들을 움직였다.

“장군,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조금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쉬면, 전투에서는 영원히 쉬게 된다. 조금 고되고 힘들더라도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유리한 지점을 선점할 수 있어!”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막 강을 건넜는데···.”

부관이 투덜거렸지만, 비디메르는 귀를 꾹 닫고 병사들을 움직여 토이토부르크로 향했다.

숲이라는 특별한 지형상 적과 만날 시에 전투를 벌일만한 곳은 한정적일 게 분명했으니, 비디메르는 최대한 빨리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자 했다.

하지만, 힘들게 달려온 비디메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숲속 한가운데에 있는 넓은 들판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로마군의 모습이었다.

“뭐야! 저 새끼 왜 살아있어!!”

[저놈이 왜 여기에···!]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놈을 보는 순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히 지난 전투에서 죽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멀쩡하게 살아있는 비디메르의 모습은 두렵기도 했지만, 묘한 승리욕을 불러왔다.

[네놈을 여기서 볼 줄 몰랐는데.]

“네놈 얼굴은 언제봐도 참 역겹게 생겼구나.”

[그때의 빚은 잘 기억하고 있다.]

“칼 맞고 눈물 찔찔 짜면서 도망가던 꼴이 선했는데 말이야.”

둘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목이 붙어있는 걸 보니 그동안에 간수 잘 한 모양이군. 거기서 딱 기다리라고 금방 잘라다가 내 방 한쪽에 이쁘게 장식해주마!”

[네놈의 구역질 나오는 얼굴은 오랜만에 봐도 잊히지 않는구나, 이번엔 도망가지 말고 제대로 싸우자!]

“거기서 딱 기다려! 당장 네놈 모가지 따러 갈 테니까!”

[3년 전에 못다 했던 싸움의 결판을 내자!]

둘이 말을 박차고 달려나가려 하자. 곁에 있던 이들이 둘을 뜯어말렸다.

“각하, 왜 이러십니까···. 진정하시지요.”

[장군, 적들의 유인책입니다. 진정하시지요.]

하지만, 옆에서 말리건 말건 둘은 신나게 발버둥 치면서 서로를 향한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와봐! 와보라고! 겁먹었냐?”

[멀리서 떠들지만 말고 전사답게 한판 붙자!]

결국, 보다못한 데키무스가 한마디 했다.

“각하, 잊으셨습니까? 우리의 역할은 저들을 유인하기만 하면 될 일입니다.”

“아니, 저 새끼가 먼저 시비를 걸잖아!”

“어차피 곧 죽을 놈입니다. 적도 많이 화난 모양이니 거짓으로 패한 척하고 물러나면 될 겁니다.”

“으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작전대로 움직이기로 했으니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제군들, 저 앞에 보이는 수염 덥수룩한 야만인이 비디메르란 놈이다. 이제부터 저놈의 목을 치러갈 건데···. 무서운 놈은 빠져라.”

병사들은 묵묵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좋아, 가자.”

“전군, 전진!”

데키무스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고함과 나팔소리가 어우러지며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너편에 있던 비디메르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적이 오고 있다. 무슨 수를 써도 좋으니 마리우스를 내 앞에 끌고 와! 안된다면 죽여서라도 데려와!]

[예, 장군!]

숫자가 적은 로마군이 열 배는 넘어 보이는 비디메르의 군대를 향해 전진하는 모습은 바위를 향해 던져지는 달걀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내가 있었고 말이다.

“각하, 위험하니 뒤로 물러나시지요.”

“위험은 무슨···. 내가 전쟁 한두 번 해보나?”

“이번 전투는 이전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적은 우리의 열 배가 넘습니다.”

“데키무스 자네와 사루스가 있는데 뭐가 두렵겠나, 폴로까지 있었으면 안성맞춤인데 말이지.”

“각하, 지금이라도 뒤로 물러나시는 것이···.”

“시끄럽고, 궁수들에게 신호를 보내서 적의 기선을 꺾어놓으라고 해.”

“...알겠습니다.”

하늘 높이 불화살이 치솟아 오르자 이를 지켜보던 사루스가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신호가 왔다! 사격준비!”

뒤에서 대기 중이던 노포와 궁수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사루스의 명령이 떨어졌다.

“목표는 전방의 야만인들이다. 사격개시!”

활줄이 튕기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더니 이윽고 하늘을 뒤덮는 수많은 화살이 날아올랐다.

두번째 토이토부르크 - 4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화살은 이윽고 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억-”

“컥-”

“아악-!”

하지만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적의 수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갑옷이 부실하거나 방패가 없던 불쌍한 병사들이나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서 바닥에서 골골댈 뿐.

대부분의 병사는 방패나 갑옷으로 가뿐하게 막아냈다.

다만, 노포에서 쏘아진 커다란 화살은 여러 명의 병사를 꿰뚫으면서 적들에게 공포를 줬다.

“또 날아온다. 피해!”

“아아악-!”

숙련된 사수가 다루는 노포가 한번 발사될 때마다 여러 명의 병사가 꿰뚫렸고, 빠른 속도로 날아와 목숨을 거둬가는 노포의 모습에 비디메르의 병사들은 겁에 질렸다.

[모두 겁먹지 마라! 어차피 너희 중에 화살에 맞는 건 일부뿐이다.]

[빈자리를 채워라! 적이 곧 들이닥친다.]

선두에서 이를 지켜보니, 압도적인 적의 머릿수에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로는 티도 안 나는데.”

“그래도 적이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아마 전투에 익숙지 않은 신병이 많은 모양입니다.”

“신병보다는···. 비디메르가 병사들을 휘어잡지 못한 느낌이야.”

“예? 그게 무슨···.”

“마요리아누스나 가우덴티우스가 있었다면 좋았겠는데 말이야···. 기병대가 딱 뒤를 후려쳤으면 우리가 해볼 만 했겠는데···.”

“각하···. 제발 무리하지 마십시오.”

“알았다니까 그러네, 가끔 보면 네가 아일라나 아멜리아보다 네 잔소리가 더 심한 것 같아.”

데키무스가 잔뜩 열 받은 얼굴로 뭔가 말하려고 하기에 손에 쥐고 있던 창을 꼬나쥐고는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돌격 앞으로!”

“각하!”

“와아아아-!”

최선두에서 말을 몰아서 적진을 향해 달려나가니, 그동안 나른했던 것이 날아가면서 몸이 개운해졌고, 심장이 두근거릴 때마다 온몸이 짜릿했다.

그때 저 멀리에서 화살이 하나 날아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얼굴에 작은 생채기가 나면서 피가 흘렀다.

[누구야! 누가 먼저 쏜 거야!]

[죄, 죄송합니다. 손에 힘이 풀려서 그만···.]

[이 멍청이야! 명령대로 하라고, 명령대로!]

그 자리에서 멈춰서서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땀과 뒤섞여 끈적이는 붉은 피였다.

“하···. 오랜만에 성질 나오게 하네···?”

상처가 쓰린 것보다.

웬 듣지도 보지도 못한 놈의 화살에 피가 났다는 게 뭔가 억울하면서도 화가 났다.

그러던 사이에 황급하게 달려온 데키무스와 병사들이 방패와 몸으로 내 몸을 가렸다.

“괜찮으십니까?”

“보시다시피 멀쩡해.”

“각하, 위험하니 여긴 제게 맡기시고, 제발 뒤로 물러나시지요. 눈먼 화살에 맞기라도 한다면···.”

“내가? 저기 비디메르 저 새끼도 건방지게 저기 있는데, 나보고 먼저 물러나라고?”

“각하···.”

“절대 안 되지.”

병사들 사이를 헤치면서 다시금 말을 몰아 앞으로 치고 나갔다.

[저놈이다! 하얀 말에 탄 저놈을 노려라!]

[쏴라!]

아군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은 화살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니, 거대한 그림자가 생겨났다.

뒤에서 따라오던 데키무스가 애타게 나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가볍게 무시하면서 말 배를 힘껏 걷어찼다.

“각하!”

“장군, 화살이 날아옵니다!”

“이런 씨발! 다들 귀갑진을 펼쳐라!”

병사들이 황급히 진을 짰지만, 이미 화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끄억-”

“아악!”

줄지어서 날아오는 수백, 수천 발의 화살은 아무리 단단하게 무장한 로마군이라고 해도 위협적이었다.

방패에 빼곡하게 화살이 박혔고, 방패와 방패 사이로 화살이 새어 들어오며, 눈먼 화살에 급소를 맞은 이들이 쓰러졌다.

그렇게 빈자리가 생긴 곳에 다시금 화살이 날아들었고, 운 나쁜 몇몇 병사가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반면, 마리우스는 의외로 멀쩡했다.

진작에 화살의 탄착지점에서 벗어난 마리우스는 화살들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걷히자 나타난 태양 빛과 함께 적진을 들이받았다.

“로마 인빅타다 이새끼들아!”

[뭐야!]

[미친놈이다!]

마리우스는 그대로 적을 들이박고는 눈에 보이는 족족 창을 찔러넣으면서 목숨을 거둬갔다.

가끔 마리우스를 잡아서 공을 세우려는 이들이 덤벼들거나, 겁먹은 병사들이 빳빳하게 세운 창을 내질렀지만, 마리우스는 가볍게 피해냈다.

[여전하군.]

[장군, 저 미친놈은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도저히 믿기지 않는 놈입니다.]

[나도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놈이었다.]

창을 휘두르니 또 한 놈이 눈을 뒤집고 죽었다.

한 놈씩 처리할 때마다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면서 팔이 더 빨라지고 있었다.

숨은 조금 거칠어졌지만, 이미 내 주변에는 죽은 병사들과 잔뜩 겁을 집어먹은 병사들.

둘 뿐이었다.

“벌써 끝이냐?”

[미친놈이다···.]

[순식간에 수십 명이나 죽었어.]

[어딜 나가려고 그래! 목숨을 아껴야지!]

“너희들이 안 오면, 내가 갈까?”

말을 천천히 앞으로 몰아봤지만, 병사들은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날 뿐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각하!”

“참 빨리도 온다.”

“뭣들 하나! 각하를 구해야 한다.!”

몸 이곳저곳에 부러진 화살이 꽂혀 만신창이인 데키무스가 내게 한눈 팔려있는 적의 방진에 뛰어들었고, 뒤이어 로마 병사들이 그대로 비디메르의 병사들 사이로 밀고 들어왔다.

“마리우스 각하를 구해라!”

“야만인 새끼들!”

내게 모든 관심이 쏠려있던 비디메르의 병사들은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로마군의 공세에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쓸려나갔다.

몇몇 병사는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이 참으로 추해 보였다.

“각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뭘 이렇게 느릿느릿 오는 거야. 하마터면 죽을뻔했잖아.”

“각하께서 그렇게 치고 나가시는데, 제가 각하를 따라가면 뒤에 남겨진 병사들은 누가 이끕니까!!”

“으음···. 농담도 못 하나.”

“그냥 조용히 뒤에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네도 내 성격 잘 알지 않은가. 내가 뒤에서 얌전히 병사들 지휘할 사람처럼 보이나?”

데키무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자네가 생각해도 아니지? 나는 뒤에서 남들 지휘하는 것보다 앞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게 더 맞아.”

“각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각하께서 홀로 치고 나가셨다가 잘못되기라도 하시면, 병사들의 사기 문제도 있고···. 남겨질 가족분들도···.”

“그건···.”

역시 전장에서 너무 가만히 있었더니, 나를 노리고 화살이 날아들었다.

다행히 피하기는 했지만, 기분이 아주 좋지 못했다.

“잠깐 기다리게.”

“각하? 또 어디 가십···. 각하!”

그대로 말을 몰아서 활을 쏜 놈에게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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