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7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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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아의 북부 칼레도니아에는 아칸의 통치에 반발하는 6군단의 잔존 병들이 숨어들었다.

그들을 이끄는 이는 6군단에서 군영장을 맡았던 콘스탄티누스였는데, 그는 일찍이 여러 전투를 통해서 명성이 드높았고 부하들을 잘 챙겨주는지라 인기도 많은 이였다.

그는 군단장이 살해당한 뒤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을 이끌고서 칼레도니아로 왔고,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장군.”

“그래, 스틸리코 장군에게서 소식이 왔는가?”

“없습니다···. 이번에도 아칸의 부하들에게 걸린 모양입니다.”

“이런···.”

콘스탄티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다섯 번째였다.

그동안 몇 번이고 브리타니아의 상황을 알리고자 했지만, 그의 시도는 번번이 아칸에 막힐 뿐이었고 그와 그의 부하들은 점점 이곳에 고립되고 있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 그게 뭔가.”

“픽트족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 그건 다행이긴 한데···. 그들이 무슨 조건을 내걸지는 않았는가?”

콘스탄티누스의 질문에 부관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칼레도니아를 넘겨달라고 했습니다.”

“넘겨주면 되지.”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땅을 내어준다니요?”

“어차피 나중에 되찾으면 될 일이야. 아니면 처음부터 약속을 미루면 되겠지.”

콘스탄티누스는 지도위에 놓인 남부의 깃발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말했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지금. 픽트족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저들이 뭘 요구하든 간에 일단은 들어줘야 해.”

“그렇지만, 저들의 요구가 너무 과한 것이 아닙니까? 애초에 저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다투던 이들이 아니었습니까?”

“우선은 아칸을 몰아내는 것에 집중하자고,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부관은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넘은 픽트족과 연합한 6군단의 잔존 병들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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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뭐야 길 좀 잘 보고 다녀!”

“죄, 죄송합니다.”

한 아이가 지나가던 병사와 부딪히면서 품에 안고 있던 사과 더미를 길가에 쏟아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행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로마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로마놈들이 하루가 멀다고 도시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게 참 아니꼽군.”

“반란군의 수괴를 찾는다고 이집 저집 들쑤시는 건 그렇다고 쳐도···. 왜 애꿎은 젊은이들을 잡아간단 말인가?”

“내 말이 그 말일세, 안 그래도 요새 젊은이들이 씨가 말라서 농사짓고 팍팍하단 말이야.”

“듣기로는 아칸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도시 내에 숨어있다고 하던데···. 자네들은 뭐 아는 거 있나?”

누군가의 질문에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말을 수백 번도 더 들었는데,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냥 로마놈들이 우리를 수탈하려고 꾸민 말이 분명하겠지!”

“듣고 보니 그렇네?”

북아프리카의 속주들은 안 그래도 자신들이 생산한 곡물들이 헐값에 본토로 팔려가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는 반역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서 시민들을 수탈했다.

“스틸리코 장군의 명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 저녁으로 쓸 닭 한 마리를 사고 싶은데.”

“아이고···. 나으리 닭을 사시려면 시장으로 가셔야지, 왜 우리 집에···.”

“은화 세 닢을 주지.”

“예? 은화 세 닢이면 고작 빵 세 덩이 값입니다.”

“거짓말 하지 마라. 내 고향에서는 세 닢이면 닭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

“아이고 나으리···. 닭을 사시려면 시장으로 가라니까요!”

병사는 반항하는 집주인을 거칠게 내팽개치면서 닭을 가져갔고, 그의 앞에는 은화 세 닢이 던져졌을 뿐이었다.

북아프리카 곳곳에서 로마군의 크고 작은 일탈 행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스틸리코가 보낸 병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칸을 찾기는커녕 풍요로운 북아프리카 속주에 눌러앉아서 시민들을 수탈하는데 맛 들이기 시작했다.

라벤나에서 업무를 보던 스틸리코도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지만, 이들을 불러들이면 다시 보낼 수 있는 병사들이 없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속 주민들을 들쑤시다 보면 이를 견디다 못한 시민들이 아칸을 밀고할 것이라고 여겨 반쯤 눈감아주고 있었다.

“더는 못 참겠군.”

이렇게 온갖 문제가 쌓이고만 있었고, 이를 이용하려는 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로마인들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줬습니까?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인 카르타고는 로마에 맞서 용맹하게···.”

“우리의 선조 카르타고가 패한 것은 내부의 분열과 배신 때문이었지 로마인들에게 굴복한 게···.”

어느 날부터인가 카르타고의 광장에는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선동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광장이 떠나갈 듯이 고함을 지르면서 먼 옛날의 카르타고를 언급했고, 당연하게도 이들은 근처를 지나가던 로마군들에게 붙잡혀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 숫자가 불어나자 로마군도 함부로 이들을 체포할 수가 없었다.

“저 간악한 로마인들을 보십시오! 우리게 빵 한 조각, 고기 한 점을 나누었습니까? 아닙니다! 저들은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뿐입니다.”

“옳소!”

“로마인은 카르타고를 떠나라!”

카르타고의 시민들은 날이 갈수록 거칠어졌고, 로마군을 향한 반발도 나날이 커져만 갔다.

“성공이구나 동생아, 카르타고의 시민들과 인근의 속 주민들이 로마군에 거세게 저항하면서 시위를 벌이면서 주변을 혼란스럽게 한다는구나.”

“드디어 시작되었군요. 형님.”

“슬슬 병사들을 준비시켜야 할까?”

“아직, 아직입니다. 형님. 로마군이 곧 반응을 보일 것이고 우리는 그걸 보고서 움직여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 네가 머리가 잘 굴러가니 한번 잘 해보아라.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하고.”

“예, 형님.”

길도는 고개를 숙였고, 그의 형 마르셀은 나가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언제까지 고개 빳빳이 들고 있을지 두고 보자.’

‘내가 네 속셈을 모를 것 같으냐 동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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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범을 놓친 비디메르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일에도 벼락같은 고함이 쏟아졌고, 때로는 폭력까지 사용될 정도였다.

판노니아와 다키아에서부터 그를 따라왔던 고트족들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게르마니아에서 그에게 복속된 이들은 더 포악해진 비디메르의 모습에 잔뜩 겁을 먹고는 했다.

“장군!”

“뭐야!”

비디메르가 왼손의 붕대를 새로 감던 중에 부관이 황급히 천막으로 들어왔다.

“정찰병들의 보고에 따르면, 강 건너에서 대규모의 적 병력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대규모? 어느 정도길래 호들갑이야.”

“처음 발견한 정찰병의 말로는 들판을 가득 메울 정도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3만은 넘어가겠군. 그놈들은 어디서 튀어나온 놈들이야?”

“어···. 듣기로는 로마 병사들과 부족의 병사들이 섞여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군···?”

비디메르는 얼마 전에 싸웠던 가니우스를 떠올리고는 부관에게 명령했다.

“얼마 전에 잡았던 로마 군단장 놈 데려와.”

“예, 장군!”

얼마 지나지 않아 초췌해진 모습의 가니우스가 비디메르의 앞에 던져졌다.

“로마군이 몰려온다고 들었다. 그들을 이끄는 자가 누구인지 말해라.”

“크크크···. 로마군? 게르마니아에 로마군이 어디 있단 말이냐 멍청한 놈.”

“쯧···. 데리고 가서 목을 베고 다른 놈을 데려와.”

“장군, 그래도 제법 높은 직위인 것 같은데 살려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쓸모도 없이 식량만 축내는 놈이다. 죽이는 편이 여러모로 났다.”

가만히 듣고 있던 가니우스가 말했다.

“비디메르라고 했던가?”

“인제 와서 애원한다고 살려줄 생각은 없다.”

“애원···? 크크크···. 조금 전까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게르마니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있을 만한 사람이 한 명밖에 없더군···.”

“그게 누구지?”

가니우스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녀석이지···.”

“그게 누구냐고 물었다.”

비디메르는 오른손으로 도끼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가니우스는 코웃음을 치며 비디메르를 조롱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라 애송아! 고생깨나···.”

애석하게도 가니우스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결국, 참지못한 비디메르의 도끼가 그의 머리에 내리쳐졌고, 가니우스는 숨을 거뒀다.

“당장 병사들을 움직일 수 있나.”

“장군, 아무런 계획 없이 부대를 움직였다가는 큰 낭패를 볼 겁니다.”

“계획? 당연히 있지. 나가서 싸우고, 보이는 대로 깨부수고 이긴 다음에 돌아간다.”

“장군···!”

“당장 병사들을 준비시키고 정찰병들을 두 배는 더 내보내서 적의 동선을 계속 확인하라고 해!”

두번째 토이토부르크 - 3

병사들을 이끌고서 수풀이 울창한 숲을 행군하고 있으니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것이 기분도 좋았다.

그나저나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나무와 풀들뿐이고, 길이라고 있는 것인 흔히 보던 포장된 도로가 아닌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만 남아있는 것뿐이었다.

기분이 스산해서 곁에 있던 사루스에 물었다.

“사루스, 이곳은 어디인가? 날이 춥지도 않은데 스산한 것이 이상하군.”

“이곳 말입니까?”

“그래,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숲뿐인 게 영 꺼림칙한 곳이야.”

“로마에서는 이곳을 토이토부르크라고 부릅니다.”

“바루스가 군단을 날려 먹은 곳이 여기라고?”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이 숲에서 로마군이 매복을 당한 게 맞습니다.”

“호오···. 그래?”

몇백 년 전에 수만의 로마군이 죽어 나갔던 숲이라니···. 영 꺼림칙할 만했다.

해가 머리 위에 떠 있는데도 숲은 어둑어둑 한 것이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곳으로 병사를 몰고 가나 싶기도 했다.

“아.”

그게 나네?

갑자기 가슴속에서 불안감이 솟구쳤다.

“사루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지 않겠나? 괜스레 불안하군.”

“브레누스와 게지카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이곳으로 부대를 이끌고 온 게 아니겠습니까? 그들을 믿으시지요.”

“흠···. 하긴, 그들은 이곳 출신이니 나보다 더 잘 알겠지···.”

그렇게 자신을 세뇌해봤지만, 불안한 게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단지 억지로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파라몬드가 적을 둘러본다고 가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파라몬드가 보이질 않는군. 아직 안 돌아온 건가?”

“예, 돌아왔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아직 안 돌아왔다고? 그것참 이상하군. 며칠이나 지났는데 전령하나 보내지 않은 걸 보면···.”

“정찰병들이 며칠씩 연락이 끊기는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랬으면 좋겠군.”

그때, 선두에서 병사들을 이끌던 브레누스가 말을 타고 다가왔다.

“전하, 슬슬 이곳에 진영을 펼치고 적을 기다리려고 하는데···.”

“이곳 말인가?”

양옆에 울창한 숲이 자리 잡고 있고, 그사이에 난 좁은 대로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데, 이곳에 자리를 잡고 군영을 편다니···. 내 상식선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좁은 곳에 군영을 펴면 적의 화공이나 야습에 취약할 것 같은데.”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숲속에 애들을 잔뜩 풀어서 적이 다가오는지 감시하고 있습니다.”

“으음···. 뭔가 생각이라도 있는 건가?”

브레누스는 평소보다 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이 숲으로 적이 들어오면, 숲속 깊은 곳까지 유인한 다음에 적을 덮칠 겁니다!”

“정석적이긴 한데···. 적이 과연 속아줄까?”

“그래서 생각한 건데···. 전하께서 적을 유인해주시겠습니까?”

“뭐?”

“브레누스! 자네 미친 건가!”

잘 못 들은 그건가 싶었지만, 브레누스의 어찌할 줄을 모르는 얼굴을 보니 진심인 듯싶었다.

브레누스의 그러한 태도에 열 받은 것인지, 사루스가 버럭 화를 낸 것이고 말이다.

“그, 그것이···.”

“각하께서 그동안 자네들을 얼마나 아끼셨는데, 이런 위험한 일에 나서게 하는 건가! 이러려고 지휘권을 받아간 건가!”

“일단 진정하시고···.”

“진정은 무슨 놈의 진정!”

슬쩍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화를 내더라도 일단 변명을 들어보고자 지긋이 억눌렀다.

“내 당장 병사들을 몰고 가서···!”

“사루스, 잠깐만 조용히 해주겠나.”

“각하···!”

사루스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래, 내가 왜 미끼 역을 맡아야 하는지 설명부터 해주겠나?”

“어···. 음···. 그건 게지카가 설명해 즐겁습니다.”

“불러오게.”

브레누스가 황급히 말을 몰고 달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게지카와 함께 돌아왔다.

“전하,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네가 이번 작전을 구상한 건가?”

“그···. 브레누스와 같이 생각한 겁니다.”

“맞습니다! 대부분은 이놈이 생각했고, 저는 옆에서 거들었을 뿐입니다.”

브레누스의 말에 게지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브레누스를 쏘아봤지만,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했다.

“저희가 각하를 미끼 역으로 배치한 건···. 그저 적이 가장 노리는 게 각하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

“적들이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걸 눈치챘다면, 아마 대부분은 로마군이 우리를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그래서 각하를 선두에 내세우면 적이 전하를 잡기 위해서 공세를 펼칠 것이고···.”

“내가 저놈들을 이 숲까지 유인해오면 한 번에 쓸어 담겠다. 뭐 이런 건가?”

“바로 맞추셨습니다.”

게지카는 채점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초조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작전은 아니었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데다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단번에 적을 괴멸시킬 수도 있었기에 그냥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좋은 작전이군. 자네의 뜻대로 하지.”

“감사합니다!”

“전부 제가 기획한 겁니다.”

“그래, 브레누스 자네도 고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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