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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밤.
시커먼 그림자가 비디메르의 천막으로 조용히 숨어들어 조심스레 안을 살폈다.
침입자는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비디메르를 발견하고는 조용히 단도를 뽑아 들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다가간 파라몬드는 침대맡에 있던 도끼를 조심스레 치워놓고는 곤히 자는 비디메르에 단검을 내지르려는 그 순간.
눈을 뜬 비디메르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냐!”
“죽어라!”
비디메르는 잠결에 황급히 손을 들어서 막았고, 단검은 왼손을 뚫고 들어갔다.
파라몬드는 당황하지 않고, 담금을 버리고서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나서 검을 뽑아 들었고, 에기노 삼 형제 또한 요란한 소리에 검을 빼 들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주군!”
“마침 잘 왔다.”
“큭···. 이놈들···.”
비디메르는 거칠게 단검을 빼내고는 침대맡에 놓여있던 자신의 도끼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이만 죽어라!”
파라몬드는 짧은 기합과 함께 검을 찔렀고, 비디메르는 황급히 옆에 있던 나무 의자를 휘둘러서 검을 쳐내면서 소리쳤다.
“거기 누구 없느냐!”
“소용없다. 인근의 경비병들은 전부 제거했으니, 조용히 죽어줘야겠다.”
“아무도 없다고···?”
비디메르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이 넓은 군영에서 아무도 내 목소리를 못 들을 것 같나?”
“말이 많군, 이만 죽어라.”
“부관─!”
비디메르의 우렁찬 목소리에 파라몬드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검을 휘둘렀지만, 비디메르는 다시금 나무 의자를 들어서 검을 막아냈다.
“이래도 못 들었을까?”
“쓸데없는 발버둥을 치는구나.”
“누가 발버둥일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비디메르는 파라몬드와 대치한 상황에서 나무 의자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검을 잡은 파라몬드의 팔을 때렸고, 이를 지켜보던 세쌍둥이가 비디메르에 덤벼들었다.
“주군!”
“쳇.”
비디메르는 달려드는 세쌍둥이 중 한 명에게 의자를 집어 던지고는 가까이 있던 탁자를 걷어차서 다른 한 명도 넘어트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달려들던 나머지 하나의 검을 피해내면서 팔을 잡아 비틀었다.
“끄아악!”
“잠시 빌리지.”
비디메르는 에기노의 팔을 부러트려, 검을 뺏으려 들자 파라몬드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이크.”
“아악!”
비디메르는 에기노의 손목을 꺾어, 검의 방향을 틀어 파라몬드의 공격을 흘려내고는 검을 빼앗아 휘둘렀다.
비디메르의 검이 파라몬드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면서 실금을 만들었고, 이내 피가 새어 나왔다.
“살짝 모자랐군.”
“주군!”
“괜찮아, 난 괜찮다.”
파라몬드는 목덜미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닦아내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소문으로 듣던 것 이상이다.’
파라몬드는 검을 고쳐잡으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적이 더 몰려오기 전에 빠져나가라.”
“예? 주군,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명령이다!”
파라몬드의 빈틈에 비디메르가 재빠르게 달려들어 검을 찔러넣었고, 파라몬드는 황급히 검을 들어 올려 막아냈다.
검신을 타고 올라가던 칼날이 가드 부분에 틀어막히자 둘의 힘 싸움이 이어졌다.
“빨리 가!”
쌍둥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통에 신음하는 에기노를 둘러업고 천막을 빠져나가면서 말했다.
“금방 모시러 오겠습니다.”
하지만 파라몬드에는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비디메르는 단단한 머리를 휘둘러서 파라몬드의 코를 무참하게 짓뭉갰고, 파라몬드가 코를 부여잡으면서 뒤로 물러나자 벼락같은 발길질로 그를 넘어트렸다.
“이름이 뭐지?”
“캬악─퉤.”
“실력이 제법이던데···. 이렇게까지 오래 버틴 녀석은 마리우스 놈 이후로 오랜만이야.”
마리우스라는 이름에 파라몬드가 화들짝 놀랐다.
비디메르는 그런 파라몬드의 모습에 흥미를 보였고 말이다.
“너도 마리우스를 알고 있는 건가?”
비디메르의 눈빛이 변하자 파라몬드는 비디메르에 검을 던지고는 천막 밖으로 몸을 던졌다.
비디메르도 검을 튕겨내고는 황급히 뒤따라 나오니 부관이 병사를 이끌고 뛰어오고 있었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자네는 왜 이제야 오는가!”
“장군, 누군가 무기창고와 식량창고를 습격해서 잠시 그곳에 다녀오느라 늦었습니다.”
“뭐? 창고는 무사한가?”
“물건이 몇 개 타기는 했지만, 멀쩡합니다.”
비디메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파라몬드가 사라진 어둠 속을 노려봤다.
“병사들을 풀어서 놈들을 찾아. 그리고 전부 내 앞으로 데려와!”
“알겠습니다! 모두 날 따라온다.!”
비디메르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부관과 병사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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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이르기를 불구경보다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라고 했다.
동네 싸움 구경도 그리 재밌는데, 수만 명이 맞붙는 전쟁 구경은 잔치나 다름없었다.
“데키무스, 잔이 비었다.”
“각하, 왜, 굳이 보리를 우려낸 물을 마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포도주를 드시지요.”
“포도주 하니, 싱싱한 포도가 먹고 싶군. 하나 가져오게나.”
옆에서 귀찮게 떠들어대는 데키무스를 치워버리고는 전투에 집중했다.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전투는 직접 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병력의 움직임이 하나하나 보이는 것이 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지카가 치고 나가네? 브레누스는 어디 있지.”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은 게지카의 깃발뿐이었고 브레누스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게지카 군대의 모습에 사루스와 세르비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중앙군이 굳게 버티는 동안 좌우 군이 빠르게 움직여서 삼면에서 게지카의 부대를 협공했다.
“오···. 저게 되네?”
나였다면 시도도 못 해봤을 화려한 전술 기동에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삼면에서 두들겨 맞던 게지카의 부대는 나름대로 진을 짜서 굳게 버티는 듯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끝났네, 아직 게르만족이 로마를 이기는 건 무리긴 하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질서 없이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던 게지카의 부대는 자세히 보면 나름대로 삼삼오오 모여서 도망치고 있었고,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를 유지했다.
아무리 훈련이라고는 해도 힘껏 두들겨 맞은 이들이 전력을 다해서 도망간다기보다는 힘을 아껴두고 적을 유인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뻔한 유인책인데···. 저걸 속아 넘어간다고.?”
“헥헥···. 각하, 포도 가져왔습니다.”
“응? 수고했네.”
“후···. 지금 누가 유리합니까?”
“로마군이 게지카의 부대를 박살 내고 도망가는 적을 뒤쫓고 있다네, 지금 숲으로 들어가는 모양이군.”
“숲 말입니까?”
데키무스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래, 아무래도 게지카와 브레누스가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해둔 모양이야.”
“허어···. 세르비우스 경이 저런 유인책에 걸려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상대를 얕잡아 봤다가 된통 당한 거지. 그래도 다행 아닌가? 전장에서 부하들을 잃는 것보다야 이런 훈련장에서 위신이 조금 깎이는 게 더 낫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숲으로 들어간 로마군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게지카의 부대를 열심히 뒤쫓고 있었다.
“장군, 너무 깊숙이 들어온 게 아닙니까? 이곳은 저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사루스가 불안함을 느끼며 세르비우스에 조언했지만, 세르비우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자네도 보지 않았는가? 저 게르만 놈들이 전투에서 패하고 허겁지겁 도망가고 있는데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장군, 혹시 매복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쫓을 때 쫓더라도 우선은 흐트러진 대열을 정비해야 합니다.”
“매복···?”
세르비우스는 매복이라는 말에 한껏 달아올랐던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주변을 둘러봤다.
좌로 봐도, 우로 봐도 어딜 봐도 나무가 빽빽하게 둘려있는 숲 사이에 난 좁은 길목.
누가 보더라도 습격당한다면 꼼짝없이 전멸당할 지형이었다.
“자네 말이 맞아. 빨리 대형을 정비하고 부대를 뒤로 물려야 하네!”
“이게 누구야? 세르비우스 장군 아닙니까?”
숲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르비우스가 고개를 돌려봤지만, 눈에 보이는 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뿐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쫓아오셨습니까?”
“이놈! 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겠느냐?!”
“애들아, 장군께서 우리 모습이 보고 싶으시다고 하시는데 보여드려야지!”
브레누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속의 나무 사이사이에서 게르만족 병사들이 튀어나왔고, 로마군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정신을 차려보니 포위당한 상태였다.
“허···. 당했군.”
“어쩌겠습니까, 저들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아닐세, 눈앞의 작은 승리에 정신이 팔려서 큰 그림을 보지 못한 내 잘못이지.”
“장군···.”
“백기를 내걸게나. 창피하지만 어쩌겠나, 그래도 이게 실전이 아니라 다행이군.”
브레누스와 게르만 병사들은 세르비우스의 군단기를 들고서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돌아왔다.
그리고는 내게 깃발을 바치면서 말했다.
“전하! 우리가 저 오만한 로마놈의 콧대를 단단히 꺾어버렸습니다.”
“하하하. 그래 이 위에서 자네들의 활약을 지켜봤다네, 아주 훌륭해!”
세르비우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런 그를 안쓰럽게 내려다보고는 다시금 브레누스와 게지카를 칭찬했다.
“자네들이 오늘 보여준 지혜와 용맹에 감탄했어. 앞으로도 오늘같이만 한다면 앞으로는 걱정할 일이 없을 거야.”
“그래도 로마군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만약 훈련용 무기가 아니라 진짜 무기였다면, 제 병사들은 도망가지도 못하고 전멸당했을 겁니다.”
“으음···. 그렇다는군. 세르비우스 경.”
“......패장이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전부 제 오만과 실책입니다. 과정이 좋아도 결과는 패배일 뿐입니다.”
“너무 자책하지는 말게나, 원래 실패로부터 배운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으면 될 일이야.”
세르비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그런 모습과는 반대로 브레누스는 당당하게 내게 요구했다.
“전하, 이제 지휘권은 저희가 가지는 겁니까?”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말이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르비우스는 깨끗하게 패배를 승복했고, 지휘권은 게지카와 브레누스에 넘어갔다.
그 뒤로 출정까지는 일사천리였다.
이미 준비는 끝마친 상태였던지라 다음 날 아침 마리우스의 부대는 파라비눔을 떠났다.
로마군과 게르만 부족들의 병사를 합친 오만이 넘어가는 대군이었다.
두번째 토이토부르크 - 2
어두운 골방.
촛불의 가느다란 빛에 의지한 채 무언가에 몰두하는 사람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은 소년이 정체불명의 액체를 이리저리 섞고 있었다.
“폐하! 폐···. 콜록콜록.”
“폴로? 여기는 웬일이야?”
“폐하, 콜록콜록···. 이게 다 뭡니까? 어두운 곳에서 일하시면 눈이 안 좋아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 이참에 실험실을 새로 지을까?”
“예?”
“도시 외곽에 크고 웅장하게 짓는 거지!”
“폐하, 이미 마리우스 님의 창고에서 많이 빼다 쓰시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마리우스 님이 알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마리우스라면 다 이해해줄 거야. 늘 그랬잖아?”
“폐하···.”
폴로는 안타깝다는 듯이 호노리우스를 바라봤다.
‘지금 마리우스 님의 재산 절반을 떼먹으셨는데, 이 분노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폴로는 마리우스의 분노를 상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폐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황실 재산으로라도 창고를 메꿔놓는 것이···.”
“폴로, 마리우스가 그런 사소한 일로 야박하게 굴 사람처럼 보여?”
“예, 폐하께서는 모르십니다···. 마리우스 님이 한번 화나시면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으음···. 그래?”
폴로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호노리우스도 조금은 움찔했는지 주변을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많이 쓰긴 했네···.”
호노리우스의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노예가 재료를 손질하고 나르면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모셔온 몇몇 학자들이 침을 튀겨가며 토론하고 있었다.
“뭐, 그래도 이건 마리우스가 나랑 내기해서 일어난 일이니 조금 봐주지 않을까?”
“폐하···. 차라리 마리우스 님이 라벤나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으시는 게 더 빠를 것입니다.”
“오···. 그것도 좋겠는데?”
“진짜로 그러시려는 건 아니시지요···?”
“농담이야, 농담.”
호노리우스는 천진난만하게 웃었지만, 폴로는 세상이 떠내려가라 한숨을 푹푹 쉴 뿐이었다.
“아무튼···. 일단 준비하시지요.”
“준비? 무슨 준비?”
“폐하의 국혼이 곧 열리지 않습니까? 슬슬 신부를 맞을 준비를 하셔야지요.”
“아니, 난 결혼하기 싫다니까 그러네? 마리우스가 결혼하는 건 무덤을 손수 파는 그랬어.”
호노리우스의 말에 폴로가 헛웃음을 지었다.
“폐하, 마리우스 경은 이미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두 번이나 했지요.”
“아무튼. 난 안 해.”
“스틸리코 장군과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습니까, 이미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으음···.”
스틸리코라는 말에 호노리우스는 침음성을 흘리면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안토니나에 기다린다고 했는데···.”
“예? 그건 또 누구입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다행입니다. 빨리 준비하시고 예물을 둘러보러 가시지요.”
“으음···.”
“빨리요. 더 늦었다가는 제가 곤욕을 치릅니다.”
호노리우스는 영 마뜩잖은 얼굴이었지만, 연신 재촉하는 폴로의 모습에 손에 들고 있던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알았어. 가면 될 것 아니야.”
“밖에 마리아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아줌마가 여길 왜 온 건데?”
“아줌마라니요. 이제 앞날이 창창하신 분한테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호노리우스는 질린다는 얼굴로 연구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