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67/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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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가니우스 놈 상판에 욕지거리를 한번 해주니까! 놈이 오줌을 지리면서 도망쳤지!”

“하하하! 그런 겁쟁이를 보았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좋은 날이라 그런지 술이 쭉쭉 들어가는 게, 아주 기분이 좋았다.

“음···. 매일매일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군.”

“저도 그렇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니 이게 천국 아니겠는가?”

“뭐···. 그렇지요.”

천국이라는 말에 브레누스와 게지카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뭐야, 자네들은 기독교를 안 믿는 모양이구먼?”

“로마놈들이나 믿는걸 저희가 믿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쯧쯧···. 그러니까 미개하다는···.”

“어허, 데키무스. 좋은 날에 말을 뭐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야! 게르마니아의 왕으로서 게르마니아의 첫 번째 범죄자에게 벌을 내려야겠군!”

주위를 둘러보다가 경비를 서던 병사를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라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봐.”

“각···. 전하!”

“편하게 불러~ 어차피 둘 다 똑같은데 뭘···. 자네 투구 좀 빌려주겠나?”

“투구 말씀입니까?”

병사가 눈을 굴리는 게 보였지만, 모른척했다.

잠시 눈알을 굴리면서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던 병사는 조심스레 투구를 벗어서 내게 건넸다.

“고맙네!”

독수리처럼 잽싸게 병사의 투구를 낚아채고는 투구에 술을 왕창 부어 데키무스에 건넸다.

“마셔.”

“가, 각하, 이걸 어떻게 마십니까!”

“자네는 맨정신으로 다른 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깔보면서, 고작 이런 것도 못 마시는가?”

“......죄송합니다.”

“이 세상에는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는 거지. 안 그런가!”

내 말에 브레누스와 게지카, 다른 게르만 족장들이 환호하면서 대답했다.

“맞습니다!”

“역시 전하뿐입니다!”

“마셔라!”

“예전부터 말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꼴 좋─ 다!”

데키무스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이 떨리는 손으로 투구를 쥐려고 할 때, 확 치우고서는 내가 전부 마셔버렸다.

코를 틀어막고 단숨에 들이켰지만, 속이 울렁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끄억─ 술맛 한번 더럽게 고약하군.”

“각하···?”

“웩─ 데키무스, 자네 잘못은 곧 내 잘못이니까 내일부터는 억지로라도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해보게, 어찌 되었건 간에 동료 아닌가?”

나름대로 무게 잡고 말한다고 말했지만···. 현실은 구석에 있는 기둥을 붙잡고서는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사루스가 구석에서 헛구역질하는 내 등을 두드려줬다.

“웩─ 살살 좀 두드려봐, 살살···.”

“각하,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그냥 술이나 조용히 마시었으면 될 것을···.”

“데키무스가 흥을 깨 놓잖아! 머리 흔들리니까 살살 우웨에엑─”

시원하게 토해내니, 속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사루스가 하도 등을 두들겨댄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으음···.”

“각하, 괜찮으신지요?”

“너 때문에 죽을 것 같다···. 메디올라눔의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저 각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아이고 머리야···.”

연회장에 마련된 제일 높고 눈에 띄는 단상 위의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이들을 내려다보니 이제야 좀 실감이 났다.

이게 왕이라는 건가.

“이 정도면 할만하네.”

“각하!!”

역시 내가 좀 마음 편히 이 상황을 만끽하려고만 하면, 주변에서 방해가 들어왔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전령이 미끄러지듯이 뛰어 들어와 내 앞에 몸을 던졌다.

“각하!”

“또 무슨 일이냐.”

“가, 강 건너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강? 무슨 강을 말하는 건가, 라인강에서 무슨 문제라도 벌어진 건가?”

순간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술기운이 확 사라지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라인강이 아닙니다!”

“그럼 어디를 말하는 건가.”

“알비스···. 알비스입니다.”

“알비스···?”

내가 의문을 표하자, 얼굴이 벌게진 게지카가 일어나서 대답했다.

“전하, 알비스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강입니다. 색슨족이 그 인근에 머물고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색슨족이 다른 이들과 싸우기라도 한 모양이로군.”

“각하, 그게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무슨 일인데, 답답하게 굴지 말고 한 번에 제대로 설명해보게.”

전령은 헐떡이는 숨을 잠시 고르더니, 소리쳤다.

“알비스 너머에서 로마군과 고트족 무리가 이끄는 부족연합이 크게 맞붙었다고 합니다!”

“로마군? 아니, 여기서 로마군이 왜 튀어나온단 말이야!”

“그건 제가 설명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천막을 들추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황급히 호위병들이 방패로 내 주변을 가렸고, 다른 이들이 검과 창을 빼 들고서는 그에게 겨누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저와 각하는 몇 년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났었다고?”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지만, 딱히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잔뜩 굳어있는 데키무스를 돌아봤지만, 데키무스 또한 고개를 내저었다.

“난 자네를 처음 보는데?”

“하하하···. 그렇군요. 나름대로 각하의 기억 속에 각인됐다고 생각했는데···.”

“쓸데없는 말은 치우고, 자네가 누군 지부터 밝히는 게 우선 아닌가?”

내 말에 그가 내게 로마식 경례를 올리면서 외쳤다.

“가니우스 장군 휘하에서 기병대를 이끌던 파라비타라고 합니다. 지난 콘스탄티노플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장군과 엮였던 적이 있습니다!”

“가니우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는데,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것이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가니우스···. 가니우스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군.”

“각하께서 콘스탄티노플에서 싸우셨던 이들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그 이야기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런 놈도 있었지 이제야 기억이 났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제법 애를 먹게 했던 놈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별것도 아닌 녀석한테 애를 먹었던 게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그래, 가니우스는 잘 있나? 혹시라도 만나면은 난 다 잊었으니 이만 돌아오라고 전하게.”

“......가니우스님은 아마 돌아가셨을 겁니다.”

“갑자기···?”

“장군! 저와 제 부하들을 받아주십시오!”

뭐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뭔가···. 뭔가 벌어지고 있었다.

“장군! 강 건너에서 수십만의 고트족연합에 쫓겨왔습니다. 부디 갈곳없는 저희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수, 수십만?!”

토이토부르크로 가는길 - 7

비디메르는 한껏 거만한 자세를 취하면서, 승리의 기쁨을 즐겼다.

로마군을 상대로 거두는 실로 오래간만의 승리에 비디메르는 하늘을 날것처럼 기뻐했다.

“포로들을 끌고 와라.”

비디메르의 명령에 제일 먼저 끌려 나온 이는 가니우스였다.

팔을 꽁꽁 묶인 가니우스는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안녕하신가 로마인?”

“집어치우게, 그쪽이나 나나 고트족인 건 다 아는 사실 아니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자네와 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어.”

“그게 뭔가.”

비디메르는 이빨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편을 잘못 골랐다는 거지, 로마가 얼마나 오래갈 것 같은가?”

“적어도 네놈 목숨보다는 오래갈 것 같군.”

“허, 마지막까지 입은 살아있군그래. 로마놈들은 하나같이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입을 놀려댄다니까?”

“비록 내가 불미스러운 일로 로마를 등지기는 했지만, 나도 로마의 장군이다. 일개 야만인들한테 머리를 숙일 것 같나?”

“이봐, 말이랑 행동이 너무 따로 노는 것 같지 않은가? 자네 말대로라면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가 죽어야 하는 거 아냐?”

비디메르의 질문에 가니우스는 그를 비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내 명예를 버렸다. 반면에 너는 네 명예를 위해서 부하들을 버렸지.”

“뭐? 부하들? 푸하하하하하!”

“......왜 웃는 거지?”

비디메르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소했다.

가니우스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다시금 물었다.

“왜 웃는 거냐고 물었다!”

“으히으히···. 하하하, 로마의 장군이 아니라 광대라고 해도 될 정도야···. 안 그래?”

“왜 웃냐고 물었다. 절름발이 새끼야!”

“뭐?”

가니우스의 말에 살짝 열 받은 비디메르는 냅다 가니우스를 걷어찼다.

“억!”

통나무만 한 비디메르의 다리에 걷어차인 가니우스는 숨을 헐떡이면서 고통스러워했고, 비디메르는 그런 가니우스의 얼굴을 짓밟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면 쓰나.”

“장군!”

“가만히 있어!”

부관과 병사들이 몸부림을 치면서 저항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매서운 몽둥이와 발길질뿐이었다.

한참이나 가니우스를 짓밟던 비디메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숨을 돌렸다.

“후···. 명예는 무슨···.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입만 살아서는 말이야.”

“치울까요.”

“잘 보이는 곳에 묶어두고 한 이틀 정도 굶기면 자기가 어떤 상황에 부닥친 것인지 깨닫겠지.”

“나머지 포로들은 어떻게 할까요.”

“장비 싹 벗긴 다음에 노예로 부려.”

“알겠습니다.”

가니우스는 다시금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처럼 끌려나갔고, 다른 포로들 또한 같이 끌려나가며 혼자가 된 비디메르는 절뚝거리면서 자신의 도끼를 주워들었다.

매끈한 표변에 비치는 제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비디메르는 숫돌을 들고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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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이면 어느 정도야?”

“본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어.”

“그것도 그렇네, 그럼 저 새끼가 거짓말하는 거 아닌가?”

“오···. 그럴듯한데?”

족장들의 대화에 파라비타는 잔뜩 긴장했다.

잘못했다가는 고트족에서 보낸 간첩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고트족 출신이 고트족과 싸움에서 같은 고트족을 버리고 도망쳐왔다?

그것도 예전에 적대했던 이의 진영으로?

누가 보더라도 의심받기 딱 좋은 배경이 아닌가?

자연스럽게 파라비타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두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도 시선이었지만, 높은 단상 위에서 자신을 품평하듯이 내려다보는 마리우스의 눈빛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알비스 너머에 수십만의 부족연합이 있고, 그들이 조만간에 서부 게르마니아로 쳐들어올 것이다. 이 말인가?”

“예! 맞습니다.”

“이거야 원···.”

“각하, 믿을 수 없는 이가 아닙니까? 어쩌면 우리를 유인해서 함정에 빠트리려는 계략일 수도 있습니다.”

“데키무스의 말이 옳습니다. 게르마니아에서는 가족이나 부족의 일원이 아니고서야 외부인을 잘 받지 않습니다.”

“으음···.”

그렇게까지 말하니, 의심이 들었다.

상관의 뜻에 따른 것이겠지만, 로마를 등진 이가 동족과 싸움에서 상관을 버리고 내게 받아달라고 하고 있는데, 누가 믿겠는가.

“장군! 비디메르···. 비디메르라고 했습니다!”

“뭐?”

파라비타는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기억나는 대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부족연합을 이끄는 사람이 비디메르라고 했습니다!”

“비디메르···?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지.”

내가 관심을 보이자 파라비타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도망치던 중에 탈영병을 붙잡았습니다.”

“그 탈영병은 아직도 데리고 있나?”

“그···. 쓸만한 정보들만 뽑아낸 뒤에 죽였습니다.”

“죽였더라···.”

팔걸이에 턱을 괴고서 고민에 빠졌다.

이 녀석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말을 말하는지는 이제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비디메르라는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가 중요했다.

“각하, 더 들어볼 것도 없습니다. 죽이시지요.”

“저도 사루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어차피 로마를 배신했던 반역자가 아닙니까, 반역자에게 자비를 보이시면 안될 일입니다.”

“저, 저는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됐어, 이놈이 하는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우선 해야 할 일은 알비스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니 확인해야겠지.”

“누구를 보내실 생각입니까?”

데키무스의 물음에 파라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그 쪽 지리는 제가 잘 알고 있으니 바람처럼 다녀올 수 있습니다.”

“자네가?”

“예, 제 휘하의 기병 오십을 끌고 가서 인근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자네라면 믿을만하지. 필요한 게 있으면 군영장에게 말해둘 테니 챙겨가게.”

“감사합니다. 전하!”

파라몬드가 어설프게 로마군 경례를 올리고는 밖으로 나갔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브레누스는 팔꿈치로 게지카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저놈이 내 부하일세.”

“쯧쯧···. 자네 밑에 저런 놈이 있다는 게 참 신기할 노릇이군.”

“이게 다 정치적인 경륜 아니겠나?”

“경륜은 무슨···. 그냥 운 좋게 자네 아버지의 기반을 물려받은 것 아닌가?”

“운이 좋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이룬 것인데!”

브레누스가 울컥하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그 모습에 절로 내 목소리도 높아졌다.

“저저···. 또 싸운다. 그만 좀 싸워!”

내 호통에 둘은 고개를 숙이면서 입을 다물었다.

“조만간에 다른 놈들이랑 한판 붙게 생겼는데, 내부의 일로 이렇게 시끄러워서야 되던 일도 안 되겠어!”

“죄송합니다.”

“저는 가만히 있었는데, 이 녀석이···.”

“듣기 싫어! 이봐 사루스!”

“예, 각하.”

“지금부터 병사들 현황 파악해서 지휘체계부터 뜯어고쳐야겠어. 자네가 현황을 파악해.”

“명받았습니다!”

사루스가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가니, 데키무스가 눈을 반짝이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데키무스.”

“예, 각하!”

데키무스는 지난 잘못을 씻겠다는 듯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네는 이놈을 감옥에 집어넣고, 창고를 점검해서 필요한 것과 부족한 것을 잘 정리해주게.”

“알겠습니다.”

“브레누스, 게지카. 그리고 다른 족장들도 자신의 부족으로 돌아가서 당장 병사로 쓸 수 있는 남자들을 조사해오게.”

게지카가 물었다.

“전쟁입니까?”

“놈들이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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