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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메르가 이끄는 군세는 서진을 계속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부족을 끌어모으면서 덩치를 불리던 비디메르의 군대는 어느 시점에서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가?”
“전방에 로마군이 나타났습니다.”
“로마군? 여기 로마군이 왜 나타난단 말인가?"
“그건 저도 잘모르겠습니다."
"으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관의 질문에 비디메르는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하긴, 로마놈들이라면 적이 아닌가. 적은 무찌를뿐!”
“전원 전투준비!”
비디메르의 명령에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트족이로군.”
“드문드문 다른 놈들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게르마니아에서의 첫 전투겠군. 프라비타, 병사들을 준비시키게.”
“장군, 적의 수가 많아 보이는데 자리를 피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니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슬슬 식량이 떨어지고 있네, 거기다가 전술도 모르는 야만인들을 상대로 등을 보이자는 건가?”
“으음···. 그래도 적의 숫자가 만만치 않습니다.”
“프라비타, 저 아래를 내려다보게. 숫자는 많지만, 대부분이 제대로 된 방진도 못 이루고 있는 데다가, 굉장히 난잡하지 않은가.”
가니우스의 말대로였다.
비디메르의 부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규모도 크고 인원수도 많은 대군이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규모보다 많이 부실했다.
어떤 병사들은 잘 훈련받은 데다가 장비의 질도 훌륭했지만, 대부분 병사는 강제로 끌려 나온 탓에 장비는 부실했고, 사기 또한 처참한 수준이었다.
비디메르 또한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잘 알고 있었지만, 힘들여 고치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은 고기 방패일 뿐이었고, 최후까지 적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기만 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마침 마주친 것도 발이 푹푹 빠지는 늪지대나,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숲이 아니라 자그마한 언덕들이 있는 구릉 지대였다.
적이 고지를 점거하고 있기는 했지만, 사방에서 포위해서 섬멸하기 좋은 위치였다.
“이전에 편입했던 부족들을 앞장세워.”
“예, 장군.”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가니우스도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적들이 언덕을 올라올 때를 노려서 반격한다. 프라비타 자네는 기병대를 이끌고서 전장을 둘러보다가, 취약지점을 찌르게.”
“알겠습니다.”
“정 안 되겠으면 부대를 돌려서 적의 궁수들을 노려도 좋네, 적이 신경 쓰일 정도로만 귀찮게 굴어주게.”
프라비타가 기병대를 이끌고 언덕을 내려갔다.
기병대는 그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살아남은 이들답게 노련하게 전장을 누비면서 적진을 짓밟았다.
“이쪽이다!”
“아니, 저쪽에서 오는 거 아냐?”
“모두 흩어지지 말고 전열을 유지해! 앞사람 뒤통수만 보고 가란 말이야!”
병사들 사이사이에 배치된 고트족 병사들이 동요하는 병사들을 다그쳤지만, 부족도 다르고 말도 조금씩 다른 이들을 통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전투의 긴장감과 공포는 이제 막 전장에 나선 징집병들이 견뎌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으악!”
“물러서지 마라, 적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저 앞에 승리가 있다.”
“궁수 앞으로!”
비디메르는 도망가려는 병사들을 손수 죽이면서 더 큰 공포로 병사들을 억눌렀고, 병사들은 등 떠밀려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재미는 다 봤군.”
언덕 위에서 이를 내려다보던 가니우스는 혀를 차면서 부관에게 말했다.
“전군 방패벽 대형으로 간다. 날아오는 화살을 막고서 곧바로 적의 예봉을 꺾어놔.”
“전군! 방패벽 대형으로!”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여 얼기설기 방패로 벽을 쌓았고, 방패의 틈 사이사이에 창을 끼워 넣어 벽을 만들었다.
이윽고 비디메르의 진형에서 화살이 날아왔지만, 대부분은 방패벽을 뚫지 못했고, 운 좋게 벽틈새를 파고든 화살들조차 병사들의 갑옷에 막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비디메르는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침음성을 흘리면서 명령을 내렸다.
“적의 대형이 바뀌었다. 병사들을 재촉해서 속도 올리라고 해! 전속력으로 들이박아서 저 벽을 깨트린다.”
“장군, 포위 전술로 가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지금 병사들 수준으로 그런 전술적인 움직임이 가능할 것 같나? 시키는 대로 해.”
“알겠습니다.”
비디메르의 부관은 채찍을 꼬나쥐고서는 병사들에게 휘두르며 그들을 재촉했다.
“이 굼벵이 같은 새끼들아! 고지가 눈앞이다. 빨리빨리 달려!”
“적들은 우리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해! 한 손으로 열손을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뒤에 있던 병사들은 채찍에 맞지 않기 위해서 앞에 가는 병사들을 밀었고, 그렇게 병사들이 점점 밀리더니 하나둘씩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기 시작하니, 대열이 흐트러졌지만, 비디메르는 개의치 않았다.
“적들이 몰려옵니다!”
“벌레떼도 대열을 갖출 줄 아는 법이거늘 사람이 벌레보다 못하군.”
“적들이 많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프라비타가 적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칠 때를 기다리면 된다네, 병사들이 첫 돌격을 막아내면은 대형을 풀고 적들을 밀어붙이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나 마찬가지야.”
“오오···. 역시 장군이십니다.”
가니우스가 한껏 우쭐해진 얼굴로 전장을 바라봤다.
“어어···!”
“밀, 밀지마!”
“자, 잠깐만!”
명령대로 앞장서서 뛰어가던 병사들은 눈앞에 있는 벽을 보면서 멈추어 서려고 했지만, 앞의 상황을 모르는 후방의 병사들에게 앞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아군과 적군 사이에 끼어버린 불쌍한 이들은 밀려오는 아군에 짓눌렸다.
“끄아아악!”
“아아악!”
“밀지 말라고 했잖아!”
“엄마!”
하지만 그들의 희생이 개죽음 이었던 건 아니었다.
그들은 뒤에서 밀려드는 아군의 방패가 되어서 벽을 밀어냈고, 수적 차이가 극심했던 로마군은 지형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대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방패 똑바로 들어!”
“아악! 내 팔이!”
“방패가 너무 무겁습니다···!”
“적이 너무 많습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가니우스는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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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슬슬 적의 뒤를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우리는 전선을 이탈한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가니우스는 이미 몇 번이고 우리를 버린 전적이 있지 않으냐, 뭘 새삼스레 놀라는가.”
“그건 그렇지만···.”
파라비타는 피식 웃었다.
“나는 이 길로 로마로 돌아갈 생각이네.”
“로마가 우리를 받아주겠습니까?”
“누구한테 항복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예? 그건 또 무슨···.”
“일단 서쪽으로 가보지, 게르마니아 방면에 있는 로마군들이라면 우리의 정체에 대해서 잘 모를 테니 말이야.”
“그래도 아군을 버리는 건···.”
파라비타는 어물쩍거리는 부관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면서 말했다.
“그럼 저 머저리와 같이 죽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원한다면 자네는 남아서 저놈에게 충성을 다하게나. 나는 떠날 테니까.”
“......죄송합니다.”
프라비타가 이끄는 기병대가 전장을 이탈한 것은 이제 막 로마군의 대형이 무너지는 시점이었다.
토이토부르크로 가는길 - 6
로마군은 점점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비디메르의 병사들은 한번 피를 본 탓에 굉장히 흥분한 상태로 매섭게 달려들었고, 그들이 온 힘을 다해 부딪힐 때마다 대형이 휘청거렸다.
비디메르의 부대는 끊임없이 밀고 들어갔다.
앞에서는 아군이 아군을 밟아 죽이는 지옥도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뒤의 병사들은 날아드는 채찍을 피해서 앞에선 병사를 힘껏 밀칠 뿐이었다.
“장군, 적들이···!”
“나도 보고 있다. 병사들을 수습해! 파라비타가 올 때까지는 진형을 유지해야 한다. 알겠나!”
“노, 노력해보겠습니다!”
정신없이 명령을 내리던 가니우스는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파라비타.
진즉에 적의 뒤를 쳤어야 할 파라비타가 보이질 않고 있었다.
“파라비타는 어디 있나.”
“그것이···. 조금 전부터 보이질 않습니다···.”
“뭐? 그럼 도망이라도 쳤다는 거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가니우스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들고 있던 지휘봉을 수수깡처럼 부러트린 가니우스의 얼굴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노옴···. 파라비타···. 네놈이 정녕···!”
“장군, 아무래도 자리를 피하셔야겠습니다. 적이 너무 많습니다!”
“피하긴 어디로 피한다는 말이냐, 지금 병사들을 잃으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는다는 말이야!”
“장군, 살아만 있다면 기회가 있다고 한 건 장군이 아니었습니까, 일단은 최대한 병사들을 챙겨서 후퇴해야 합니다.”
가니우스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만 있었다.
“으랴아아앗!”
이름 모를 한 병사가 전력으로 방패벽을 들이받자, 지쳐서 더는 견디지 못한 병사가 밀려나면서 대형이 우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무너진 벽 틈으로 비디메르의 병사들이 난입하며 난전이 벌어졌다.
“뚫었군.”
“장군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일단 밀어 넣으니 살려고 발버둥을 쳐대는군요.”
“난전에 들어간 이상 우리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슬슬 추가병력을 투입해야겠어.”
“추가병력 투입하겠습니다.”
비디메르의 진영에서 새로운 부대가 출발했다.
전선에서는 병사들 간의 전투가 점점 치열해지고 있었다.
로마군과 비디메르의 병사들은 곳곳에서 뒤섞인 채로 난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장비의 질이나 훈련도 면에서는 로마군이 앞섰지만, 비디메르의 병사들은 수적우세를 바탕으로 로마군을 밀어붙였다.
“모두 모여!”
“칼부스! 이 멍청한 새끼야 귓구멍을 쑤셔 박아놓은 거냐? 정신 차리고 이리와!”
백인대장의 호통에 투구는 어디 팔아먹고, 반짝이는 머리만 남은 병사가 화들짝 놀라면서 백인대장의 곁으로 달려왔다.
로마군은 밀리는 와중에도 백인대장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었는데, 비디메르의 병사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눈앞의 싸움에 집중했다.
“악독한 로마놈!”
“여기! 여기 좀 도와줘!”
“잡았다! 내가 로마놈을 잡았···.”
잔뜩 흥분한 병사들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눈에 보이는 로마 병사들에게 덤벼들었다.
몸을 던져서 덮치거나, 방패나 다리 같은 부분을 붙잡고 매달리거나, 로마군에게 무리를 맹렬히 휘두르고는 했다.
그런 병사들 대부분은 잘 훈련된 살육 기계인 로마군의 검에 목숨을 잃고는 했지만, 그 숫자가 셋, 넷만 되어도 쓰러지는 쪽은 로마군이었다.
“병사들을 수습하게, 최대한 살려서 이곳을 빠져나간다.”
“하지만 이미 아군병사들이 적과 뒤섞여서 제대로 된 지휘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든 병사들을 수습해서 이곳을 벗어난다. 못하겠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죽어!”
가니우스는 다급하게 부관을 독촉했다.
부관은 황급히 드문드문 모여있는 병사들을 한군데로 끌어모으면서 천천히 적들을 밀어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전투 중에 로마군이 한 명 쓰러질 때 수십의 야만인들이 쓰러질 때쯤.
비디메르의 병사들도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로마군은 점점 뭉치고 있었던 반면에 자신들은 이렇다 할 구심점도 없이 되는대로 싸우고 있었다.
“밀어붙여! 언덕 아래로 전부 밀어버려!”
가니우스의 병사들이 천천히 앞으로 나갔고, 그들을 가로막던 비디메르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하나로 뭉친 로마군이 위험에 처한 동료를 구하면서 비디메르의 병사들을 몰아붙였고, 이윽고 언덕 아래로 거의 밀어낼 때쯤···.
“사격개시!”
로마군과 비디메르의 군대가 뒤엉킨 곳으로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병사들이 황급히 방패를 들었지만, 지친 탓인지 행동이 굼뜬 몇몇 병사는 날아오는 화살들에 맞아 쓰러졌고, 나머지 병사들도 빈틈으로 날아드는 화살에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아악!”
“도대체 언제까지 쏘는 거야!”
“저 미친 새끼들이 자기들 편까지 죽이고 있어!”
그 말대로였다.
비디메르는 아군이 죽건 말건 화살을 쏴대고 있었고, 로마군보다 부실한 장비를 가지고 있던 그의 병사들은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있었다.
“우린 아군이라고! 아군!”
“모두 자세 낮추고 뭐라도 들어!”
수십 초 동안 이어진 화살 세례가 끝나고, 전장에 있는 병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몸 이곳저곳에 화살이 한 대씩 꽂혀있었다.
“으으···.”
“다들 괜찮나?”
“목숨은 붙어있습니다···.”
“적은···. 다 무력화됐으니 뒤로 물러···.”
백인대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언덕 아래에서 새로운 부대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적들이 몰려옵니다!”
“전원 전투준···.”
백인대장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을 보고는 할 말을 잊고 병사들을 돌아봤다.
병사들 또한 손을 떨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백인대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가니우스 또한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군을 보고 있었다.
“자, 장군···. 적이 사방에서 몰려옵니다.”
“파라비타···.”
가니우스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병사들을 둘러보고서는 고개를 떨궜다.
“장군,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장군···!”
“후···. 백기를 올리게, 우리가 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