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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취!”
이놈의 게르마니아는 이제 여름이 꺾여가는 시점인데, 벌써부터 추워지고 있었다.
내가 따뜻한 지중해 날씨에 적응한 것인지, 아니면 게르마니아 날씨가 지랄 맞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직도 밖에 있나?”
“예,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근성 하나는 좋은 친구들이야.”
“추운 북방에서 가족을 지키고, 살아남으려면 꼭 필요한 것이지요.”
사루스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물을 내게 건네주었고다.
그걸 받아들고서 내 옆에 있던 통에서 보리를 한 움큼 꺼내 잔에 담으니 구수한 보리내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루스는 질린다는 얼굴이었다.
“한잔하겠나?”
“괜찮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축 사료를 왜 먹습니까.”
“물만 마시면 배탈이 나는 걸 어쩌겠나, 이거라도 마셔야지 살 수 있어.”
보리차를 손에 들고 조심스레 한 모금 들이켰다.
따뜻한 보리차가 들어오니 다시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습니다. 이제는 답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내버려 둬. 저놈들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지 뭐···.”
“각하!”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하마터면 뜨거운 보리차를 흘릴뻔했다.
찻잔은 탁자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가 저들의 말을 들어준다고 하자. 그럼 이 소식을 들은 스틸리코 장군은 뭐라고 생각하겠나?”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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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명백한 반역행위입니다.”
스틸리코는 눈앞의 청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는 지치지도 않고 매번 날 귀찮게 구는군.”
“장군께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마리우스는 아칸의 뒤를 이을 반역자입니다!”
“듣자 하니 네놈의 오만함이 도를 넘는구나, 마리우스 장군은 네놈이 입에 올릴만한 분이 아니야!”
가만히 듣고 있던 폴로가 발끈하면서 젊은 장교에게 삿대질했다.
하지만 그는 폴로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오히려 폴로에 삿대질하며 스틸리코에게 말했다.
“이것 보십시오. 국가를 위해 충성해야 할 군인이 개인을 위해 충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오늘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폴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기세 좋게 검을 뽑아 들었고, 장교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이 검을 뽑아 들었다.
둘의 모습에 스틸리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폴로 진정하고 무기를 집어넣게.”
“장군, 하지만···.”
“폴로.”
“끄으응···. 알겠습니다···.”
폴로는 거칠게 검을 집어넣었고, 젊은 장교 또한 검을 거뒀다.
“콘스탄티우스라고 했던가.”
“예, 장군.”
“자네 의견은 잘 알겠네.”
“장군!”
스틸리코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폴로에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마리우스가 위험하다는 것도 맞고, 그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아칸 이상의 위협이 될 거란 것도 동의하네.”
“그렇습니다. 마리우스는 제국의 잠재적인 위험분자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실권을 빼앗던가, 아니면 그의 목을 잘라야 합니다.”
“하지만, 자네는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군.”
“예···? 그게 무슨···.”
스틸리코는 당황하는 콘스탄티우스를 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리우스가 개새끼이긴 하지만, 우리 개새끼라네. 이 차이를 알겠는가?”
“각하, 마리우스는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
“자네야 그렇겠지.”
“......잘 못 들었습니다?”
“못 들었다니 다시 말해주겠네, 자네 같은 이들이야 마리우스를 두려워하겠지.”
콘스탄티우스는 자신을 깔보는 스틸리코의 태도에 화가 난 것인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물었다.
“설명해 주십시오.”
“운 좋게 내 눈에 띄어서 몇몇 전공을 주워 먹은 이민족이 머리 위에서 장군이라고 꺼드럭대니 아니꼬웠겠지.”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국을 위해···!”
“그래, 다들 그렇게 말하고는 하지···. 하다못해 그 아칸놈도 제국을 위해 일한다고 진심으로 믿고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자네라고 다를까?”
콘스탄티우스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졌는지 아니면 스틸리코의 기세에 억눌린 것인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마리우스는 누구보다 제국을 위해 헌신했고, 지금은 그 보상을 맛보기도전에 게르마니아에 처박혔지, 이게 다 누구의 짓이겠나?”
“그건···. 그건 장군께서···.”
“그래, 그놈한테 명령을 내린 건 나야. 하지만 그거 알고 있나?”
스틸리코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따르게 한 것도 나일세.”
“그, 그래도···.”
“아직 할 말이 남았는가? 있으면 더해보게.”
콘스탄티우스는 몇 번이나 입을 열고서 스틸리코의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장군의 귀를 어지럽혔습니다.”
“죄송할 게 있겠는가, 자네나 마리우스나 전부 로마를 위해 일하다 보면 의견이 안 맞을 수도 있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군.”
콘스탄티우스가 경례를 올리고 방을 빼져 나가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폴로가 감탄했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입을 다물게 하실 줄 몰랐습니다. 매번 찾아와서 마리우스를 벌하느니 목을 자르느니 아주 귀찮은 놈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는 말게, 콘스탄티우스는 순수하게 황제 폐하를 위해 말한 것뿐이니 말이야.”
“압니다. 다만, 너무 싸가···. 죄송합니다.”
“하하하. 그래 좀 버릇없는 놈이긴 하지?”
스틸리코는 미소를 지으면서 폴로에 편지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한번 보게. 딸이 보낸 편지라네.”
“아니, 그걸 왜 저한테···?”
“보면 알 걸세.”
폴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편지를 받아들었고, 찬찬히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중에 당황하며 스틸리코에게 물었다.
“아니, 이게 사실입니까···?”
“자네와 나 둘만 알고 있는 사실이네, 이 소식이 내 귀에 들린다면 자네가 퍼뜨린 거로 알겠네.”
“......명심하겠습니다.”
토이토부르크로 가는길 - 5
“이봐 게지카.”
“왜 부르나.”
“아무래도 각하께서는 왕이 되실 의향의 없으신 모양인데.”
“그럴 리가 있나, 자고로 원래 사람들은 좋아도 잘 표현을 안 하고 거절하는 걸 예의라고 하더군.”
“오오···.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뭔가 있어 보이는군.”
“자네도 공부를 좀 하게나. 각하께서 직위를 하사했다고 전부 고귀해지는 게 아니란 말일세.”
“거참, 자네는 잘난 체를 조금 줄여야 하지 않겠나?”
“잘난 걸 어쩌겠나.”
브레누스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뭔가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 했지만, 게지카의 제지에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그게 무슨···.”
“쉿, 각하께서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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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일주일 동안 노숙을 한 탓인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브레누스와 게지카의 반짝거리던 갑옷은 빛을 잃고 색이 바랬으며, 병사들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이 거지 떼가 따로 없었다.
“쯧쯧쯧···. 다들 쓸데없는 일에 고생이 많군.”
“각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게지카가 고개를 숙이면서 다시 시작하려 하자, 황급히 팔을 앞으로 내저으면서 그를 말렸다.
“그만! 그만!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오오···!”
“부르군트의 공작 게지카가 게르마니아의 새 왕을 뵙습니다!”
“프랑크의 공작 브레누스! 게르마니아의 새로운 왕을 뵙습니다!”
둘이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허리춤에 찬 검집을 들고 두 손을 높이 들어내게 바쳤다.
병사들 또한 나를 중심으로 꿇어앉았다.
“자네들 오해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자네들의 왕이 될 생각이 없네.”
“예? 하지만, 조금 전에는 알겠다고···.”
“그랬지. 그런데 말이야···. 나는 자네들을 친구로서 대했는데, 자네들은 나를 상관을 대하듯이 하는군.”
“아니, 그게···. 저···.”
브레누스와 게지카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어찌할 줄 몰라고 했다.
뭔가 말을 하면서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서로 어물쩍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왕이 되고 싶지도 않아.”
“각하···. 저희를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뭘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하는가, 나는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지 자네들을 휘하에 두고 싶지 않다고 하진 않았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는 아둔하고 어리석어서 각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간단하네, 자네들에게 전부 시민권을 주겠다.”
내 말에 곁에 있던 데키무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면서 나를 불렀다.
“각하! 그게 무슨 소 리습니까!”
“아잇! 깜짝이야···. 갑자기 소리 지르지 말라니까.”
“시민권을 나눠주는 건 황제 폐하의 권한입니다. 그런데 각하께서 하시겠다니 이게 무슨 소 리습니까!”
“왜, 저들에게 시민권을 나눠주는 게 아깝나?”
“지금 아까워서 그러는 게 아니잖습니까···!”
피식 웃음이 터졌다.
데키무스는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따로 발급한 게르마니아 시민권을 나눠줄 테니까 말이야.”
“각하께서 새로 시민권을 만들겠다는 겁니까?”
“라틴 시민권 비슷한 거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중앙정부의 승인 없이 시민권을 남발했다가는···.”
“게르마니아에서만 통하게 만들면 그만 아닌가?”
데키무스의 입이 다물어졌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은 것 같았지만, 주변에서 그를 노려보는 부르군트족과 프랑크족 병사들의 곱지 않은 시선 탓에 강제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각하, 그···. 시민권이라는 건 뭡니까?”
“이제부터 설명해주겠네, 기본적으로는 로마 시민권과 같다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게르마니아 안에서만 통용되는 시민권이라는 거지.”
브레누스가 손을 들고 물었다.
“각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말하게.”
“시민권을 들고 다니면, 우리가 얻는 게 뭡니까?”
“단도직입적이군.”
“어, 음···.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자네의 질문이 아주 좋았다는 뜻이었네, 자네들이 시민권을 들고 다니면 얻을 수 있는 건 딱 하나지.”
한번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내 보호 아래 있다는걸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수단이자, 자네들이 로마의 적법한 시민임을 알리는 수단이지.”
“그게 좋은 건가···?”
“좋은 거겠지···?”
“각하, 그 말은 저희에게 강을 넘어오라는 말씀입니까?”
말이 왜 그렇게 되는 거지.
게지카의 말에 순간 생각이 멈췄다.
대충 시민권이라고 적은 종지 쪼가리 몇 개 던져주고, 땅을 편입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게지카의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안 그래도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던 게르마니아에 대규모의 이 민족무리가 이주해온다면, 좋은 거 아닌가?
매번 쪼들리던 재정에도 숨통이 트일 것이고, 교류로 인해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매번 압박당하던 국방도 안정화될 테니···.
“그것도 괜찮겠군!”
“그럼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땅을 버리고 강을 건너야 하는 겁니까?”
“그래도 그건 좀···.”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벗어나는 건 좀···.”
역시나 그냥 넘어오는 일이 없었다.
“이 좁은 땅을 두고 투덕거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원한다면 이곳에 남아도 좋네.”
“그건 그렇습니다만···.”
게지카와 브레누스는 영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각하, 저희가 원했던 건 각하의 통치이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맞습니다. 몇몇 프랑크 부족이 로마로 건너가서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도 그들처럼 로마로 건너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이에 게지카가 답했다.
“로마인들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군. 팔다리 모두 달려있고, 눈코입이 달린 것은 똑같지 않은가.”
내 말에 게지카가 쓴웃음을 지었다.
“모든 로마인이 각하처럼 저희에게 친절한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모욕적이고 험악한 말을 서슴지 않게 하며 저희를 업신여기지요.”
“거기에 우리를 노예처럼 생각하고 잡아가려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렇기에 로마가 아닌 각하께 고개를 숙인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시민권으로 게르마니아로 끌어들인다는 생각은 물 건너간 듯싶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로마를 향한 적개심과 적대감은 내가 생각하던 그것보다 컸다.
‘하긴, 시민권 같은 거로 넘어올 거로 생각한 내가 멍청했지···.’
내가 멍청했다.
고작 종이 쪼가리로 저들의 진심을 사려고 했다니 말이다.
저들은 진심으로 날 따르고자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나도 결정을 해야 했다.
“각하, 부디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그래, 너희가 이겼다.”
“그 말씀은···?”
“게르마니쿠스는 군대를 이끌고 게르마니아를 정복했지만, 나는 술 한 동으로 정복했군.”
데키무스는 소리죽여 웃었고, 사루스는 폭소했다.
“하하하. 그거참 말이 됩니다. 술도 잘 못 드시는 각하께서 술로 게르마니아를 정복하셨습니다!”
“에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주사위의 눈금이 뭐가 나오든 간에 스틸리코를 달랠만한 선물이 필요했다.
존나게 큰 선물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