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64/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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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 사람의 움직임은 없습니다.”

“이쪽으로 온 게 아니었나.”

“발자국은 이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만···. 큰 강을 지나면서 끊긴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강이라···. 이곳을 건너면 게르마니아라고 했던가?”

“예, 장군.”

우르겐은 품속에서 작은 지도를 꺼내더니 게르마니아의 위치를 확인하고서는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생각보다 멀리 왔군.”

“인제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르겐은 지도를 접어서 다시 품에 집어넣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우리 왕의 심기를 거스른 놈들은 죽어야만 한다.”

우르겐은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병사들이 모두 볼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리면서 강 건너를 가르쳤다.

“오늘 안에 강을 건넌다.”

“전군 도강!”

게르마니아라는 투기장에 새로운 챔피언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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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부르군트군의 주둔지 바로 옆에 마련된 로마군의 주둔지로 게지카와 브레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찾아왔다.

“각하, 부르군트와 프랑크의 공작이 각하를 뵙길 청합니다.”

“그래?”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왜 병사들이라도 잔뜩 끌고 왔나?”

“밖에 잘 무장한 병사들을 잔뜩 대동했습니다.”

브레누스와 게지카가 군대를 이끌고 왔다.

이 사실이 말하는 건 하나였다.

군대를 동원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군대의 칼날이 어디로 향하는지였다.

“내 갑옷과 무기를 가져와.”

“각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사루스, 내가 언제 걸어온 싸움을 거절한 적이 있었던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은 각하의 곁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 각하를 지키는 일입니다.”

“으음···.”

생각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데키무스나 폴로였다면, 군말 없이 갑옷과 무기를 가져왔겠지만, 사루스는 생각보다 깐깐했다.

“쓸데없는 말 할 시간에 갑옷이나 가져와.”

“각하···!”

“명령이다 사루스.”

그제야 사루스가 움직였다.

충성심은 믿을만한 친구였지만, 가끔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데키무스도 이와 비슷했지만, 데키무스는 말 그대로 내 명령에 의심하지 않고 따르는 스타일이었다면, 사루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 안전을 우선시했다.

그러다 보니 내 명령을 잘 듣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대로 움직이는 경우도 왕왕 있었고 말이다.

“차라리 폴로였으면 괜찮았을 텐데.”

폴로도 가끔 선을 넘어서 까불거리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데키무스나 사루스에 비해서는 나은 편이었다.

사루스가 가져온 갑옷을 대충 걸치고서는 말에 올라 게지카와 브레누스의 앞에 섰다.

둘 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을 자랑하면서 내 앞으로 말을 몰고 왔다.

“지난밤에 화해한 모양이로군.”

“예, 전부 각하와 데키무스 경 덕분입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저 병사들은 다 무엇인가? 우리와 한판 붙으러 왔다면 피할 생각은 없네만.”

내 말에 브레누스와 게지카 둘 다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좌우로 흔들면서 온몸으로 부정했다.

“각하와 싸우다니요!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한 적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제 휘하의 세력이 제법 된다지만 어떻게 각하의 군대에 비교하겠습니까?”

“그래? 그럼 저 군대는 다 무엇인가.”

“그건 이제부터 고민해봐야지요.”

브레누스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와 싸울 생각도 없고, 서로 싸울 생각도 없는데 군대를 끌고 왔다고?

그런데 군대를 끌고 와서 한다는 말이 이제부터 고민한다니···. 이건 어떻게 봐도 나와 한판 붙어보겠다는걸 에둘러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각하, 지난밤에 게지카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진중한 분위기에서 제법 오랫동안 서로 의견을 나눴지만, 별다른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각하께 청합니다.”

둘은 말에서 내리더니 무릎을 꿇었고, 뒤에 있던 병사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둘이 한목소리를 모았다.

“각하, 저희를 다스려 주십시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했나?”

“게르마니아의 보호자 마리우스 각하께서 저희의 왕이 되어주십시오!”

“이런 ㅆ···.”

토이토부르크로 가는길 - 4

“아직도 그러고 있나?”

“각하께서 답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 한다고 했잖아.”

“정확히는 자신들이 듣고 싶은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인 것인지 되짚어봤지만, 내가 잘못한 건 없었다.

잘못한 게 없어서 문제인 건가?

내가 저놈들을 너무 잘 대해줘서 그런 건가···?

“각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어떻게 해. 전부 돌아가라고 해.”

“이미 몇 번이고 말했지만, 저 자리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골치 아프게 됐어.”

말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건 간에 내 적들을 나를 반역자로 몰아갈 게 분명했다.

물론 내 장인들이신 스틸리코와 에우트로피우스가 동방과 서방의 궁정을 꽉 쥐고 있었지만, 그 밑에도 내게 불만을 가지거나 내 자리를 탐하는 놈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 상황은 그런 놈들에게 날 어서 물어뜯으라고 명분을 던져주는 꼴이었고 말이다.

“각하, 그냥 받아들이시면 되는 게 아닙니까?”

데키무스의 말이었다.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내가 왕이 된다고 치자. 그 뒤는 어떻게 될 것 같나?”

“어차피 중앙에서도 변방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스틸리코 장군께서도 각하께서 무슨 일을 벌이시든지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데키무스.”

나지막이 데키무스를 불렀다.

데키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르셨습니까.”

“장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게 진짜로 날 내버려 두겠다고 하신 말씀이겠나?”

“그럼 아닙니까?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우신 장군이, 이런 촌구석에서 야만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게 방치게 아니고 뭡니까?”

“데키무스,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이미 게르마니아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스틸리코 장군께서는 각하를 버리신 겁니다.”

내 말을 끊은 데키무스는 무척이나 화가 난듯한 모습이었다.

“장군께서 나를 버리실 리가 있겠나. 그분께서는 내 장인일세 쓸데없는 추측은 삼가게나.”

“장군께서 각하를 다시 부를 생각이 있으셨다면, 연락이라도 자주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바쁘셨겠지.”

“이제 3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런데 스틸리코 장군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지원을 보냈습니까? 하다못해 편지라도 한 장 보냈습니까?”

“자네까지 이러긴가? 머리가 아프니 그만하게.”

“각하!”

그 어느 때보다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바깥에서는 제발 왕이 되어달라고 소리치고 있었고, 안에서는 데키무스가 잔소리를 쏟아내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냥 확 해버려?’

게르마니아의 왕.

무려 왕이다. 왕!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름이 아닌가?

물론 야만인들의 왕을 해봤자 뭐할 거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기 하다만···.

그래도 왕은 왕이다···.

‘그냥 이대로 게르마니아에 확 눌러앉아?’

못할 것도 없었다.

나를 따르는 병사들과 시민들.

그리고 스스로 복종을 원하는 든든한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의 세력까지 합치면, 제법 거대한 세력이었다.

생각해보니 나쁠 게 없었다.

다만, 내가 게르마니아의 왕위에 오른다고 하면 웃으면서 군대를 끌고 올 스틸리코가 두려웠다.

그러니까 종합해서 쉽게 말하자면, 먹자니 먹을 게 없는데 버리자니 아까운 계륵이었다.

“아이~싯팔!”

“각하, 눈 한번 딱 감고 받아들이시지요.”

“이번만큼은 데키무스의 말이 맞습니다. 그냥 받아들이시지요. 제 병사들은 각하를 따를 것입니다.”

“세르비우스 경이나 베루스, 막시무스 경도 각하를 따를 것입니다. 정 안된다면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시끄러워 당장 나가.”

“각하···!”

“나가!”

둘이 나가자 그제야 혼자서 편안하게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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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공작 브레누스와 부르군트 공작 게지카가 마리우스를 열심히 설득하고 있을 무렵.

이번 전쟁에서 기가 막힌 뒤통수로 상당한 이득을 챙긴 길레누스와 색슨족은 세력을 넓히기 위해 서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공작님, 이래도 되겠습니까? 총독 각하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나 노력하셨는데···.”

“그래봤자 그놈도 로마인일 뿐이야. 언젠가는 우리를 배신했겠지···. 그전에 우리가 먼저 놈을 치는 거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돌아가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적진은 지금 텅텅 비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눈앞에 차려진 밥상을 두고 도망가자고?”

“그것이···.”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서쪽의 재물이나 챙겨서 돌아가자고.”

길레누스는 부하의 조언을 무시하면서 항진을 계속했다. 역풍을 받은 함대는 조금 힘겹게 게르마니아 인근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본 것은 분명히 없었어야 할 이들의 존재였다.

“어···. 저거 로마해군 아닙니까?”

“뭐?!”

길레누스는 수평선 너머에서 나타난 함대를 바라보면서 쌍욕을 내뱉었다.

“이런 씨발! 로마군은 없다고 했는데!”

“고, 공작님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길레누스는 수평선 너머에서 나타난 함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군대는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로마군이 분명했다.

“마리우스 놈이 우릴 속였어!”

“예?”

“본토를 비워두고서 게르마니아로 출병한다고 했을 때 의심했어야 했는데···.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버렸어!”

“공작님···?”

“시발! 시발! 시발!”

길레누스의 함대는 기껏 해봤자 나무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조각배들에 불과했지만, 로마해군은 한눈에 봐도 거대한 돛을 가진 갤리선들이었다.

애초부터 싸움이 될 게 아니었다.

“물러난다. 최대한 빨리 노를 저어!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야 해, 안 그러면 적의 지원군이 온다.!”

“아, 알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로마군의 등장에 색슨족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무렵.

수평선 너머에서 나타났던 로마군 또한 예상치 못한 색슨족의 모습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카, 카티우스님 수평선 너머의 적입니다!”

“적? 아니, 신임총독이 벌써 해군을 복구했다는 말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숫자가 제법 많습니다.”

카티우스는 고민에 빠졌다.

그가 게르마니아로 다시 돌아온 것은 미쳐 챙기지 못한 재산을 챙기고, 신임총독이 쌓아놓은 부와 주민들을 약탈해 가려 한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적의 대응이 빨랐다.

상륙은커녕 이제 도착했을 뿐인데, 적은 벌써부터 전개를 마치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독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 일단은 브리타니아까지 물러난다. 하마터면 적의 함정에 걸려들어서 큰 낭패를 겪을뻔했어.”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후퇴기를 올려라! 전 함대 브리타니아까지 후퇴한다.!”

카티우스는 함대를 지휘하는 지휘함에 마련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식은땀을 훔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선 첫 전쟁이었지만, 자신의 지도력으로 적의 농간을 간파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지고 있었다.

‘그래, 나도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반대로 길레누스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다.

‘마리우스 놈···. 제법 예리한 한 수였다만, 나는 네놈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다!’

두 지휘관은 이 자리에 없는 마리우스를 비웃으면서 행복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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