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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아···. 실로 오랜만이구나.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일이 없을 줄 알았거늘···.”
다리를 절뚝거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언덕 위에서 불타오르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군.”
“끝났나.”
“예, 그런데 자신을 공작이라고 칭하는 이들이 장군을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공작···? 그건 또 뭔가.”
“인근의 부족들을 통합한 대족장을 부르는 말인 듯싶습니다.”
“흐음···. 별 쓸데없는 짓을 다 하는군.”
“데려올까요?”
비디메르.
그가 고개를 저었고, 그들의 처우가 결정됐다.
병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면서 물러났다.
지난 테살로니키에서의 참혹한 패전 이후로 알라리크는 이를 악물고 세력을 키웠다.
알라리크가 몰락하고 라다가이수스가 득세할 당시만 하더라도 모두 알라리크를 비웃으며 오랜 원한을 갚으려 들었지만.
알라리크는 자신에게 오는 모든 도전을 깨부수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했다.
라다가이수스의 패배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테살로니키 이전의 세력을 회복한 알라리크가 처음으로 노린 것은 게르마니아였다.
“이제는 더 끌어들일 부족들이 없다. 어지간한 놈들은 다 끌어들였어.”
“그럼 드디어 로마놈들에게 복수를 하는 겁니까?!”
알라리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두 배, 아니 세배는 되어야 해.”
“아니, 그렇게까지나 필요하겠습니까?”
“그래, 로마에는 스틸리코가 있다. 그리고 그 검은 악마 놈들의 수장···.”
“마리우스···.”
“그래, 그놈도 있지.”
알라리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아무리 세력을 끌어모으고 모아봐도···. 우리가 이길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질 않아.”
“주군, 제게 좋은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라···?”
“제 뿌리가 고트족이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게르마니아의 랑고바르드족 출신입니다.”
비디메르의 말에 알라리크가 흥미를 보였다.
“그것까지는 몰랐군, 그래서?”
“저에게 병사 삼천만 붙여주십시오. 게르마니아로 가서 수만 명으로 불려오겠습니다.”
“삼천···. 삼천이라···.”
알라리크는 잠시 눈을 감으면서 고민했다.
곧 그의 눈이 떠지면서 비디메르에 되물었다.
“고작 삼천으로 되겠나?”
“게르마니아 놈들은 강철 무기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놈들이 많습니다. 삼천이면 충분하지요.”
“오천을 주지. 기왕이면 확실한 게 좋으니까 말이야.”
“감사합니다. 주군!”
“비디메르 일이 틀어져도 괜찮으니 자네만이라도 돌아오게, 병사를 다 잃어도 상관없어.”
“주군···.”
그렇게 떠나온 게르마니아였다.
비디메르의 예상대로 게르마니아의 부족들은 실전으로 다져진 고트족 군대를 상대하지 못했고, 속절없이 밀려 나갔다.
비디메르가 가는 곳에는 불길이 치솟아 올랐고, 그 뒤로는 알라리크의 깃발이 꽂혔다.
오천에서 시작한 군세는 이제 십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이 비디메르가 넉 달 만에 이룬 성과였다.
그리고 비디메르 또한 자연스럽게 마리우스가 게르마니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신께서 우릴 도우시는구나.”
“장군, 주군께서는 병사를 모아서 돌아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셨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예? 상황이 바뀌다니···. 그게 무슨···.”
“내가 게르마니아에 왔고, 마리우스도 게르마니아에 왔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비디메르의 말에 부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이내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자, 장군···.”
“이건 운명이야. 이제는 끝을 보라는 신들의 뜻이란 말일세.”
“장군!”
“병사들을 훈련하고, 전투를 준비하게···. 내 직접 마리우스 놈의 목을 베어서 주군께 바치겠다.”
비디메르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그날의 치욕을 떠올렸다.
단둘이서 맞붙었던 그 날의 테살로니키의 기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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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게르마니아에는 비디메르 외에도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하나 더 있었다.
“장군, 이곳입니다.”
“그래, 이곳은 어디인가?”
“길잡이가 말하기를 게르마니아라고 했습니다.”
부관의 말에 가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력을 회복해서 로마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한 지 어언 3년쯤이 흘렀지만, 가니우스는 여전히 세상을 떠돌고 있었다.
가니우스의 부대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다시금 권력을 틀어쥔다는 처음의 목적도 잃은 지 오래였고, 지금은 그저 하루하루 떠돌면서 질긴 목숨을 연명할 뿐이었다.
“프라바타.”
“예, 장군.”
“이렇게 떠도는 것도 지겹지 않나.”
“지겹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제 우리를 받아주는 곳이 없잖습니까.”
프라비타는 짜증을 내는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도 줄을 잘못 선 죄로 어쩔 수 없이 가니우스의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그가 가차 없이 프라비타를 버렸듯이, 프라비타 또한 기회가 있다면 가차 없이 가니우스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상황과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가니우스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게르마니아에서는 정착할 수 있을까.”
“정착이라니요. 장군.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시는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까?”
“프라비타. 이제 3년이 다 되어가네, 당장 다음 주에 먹을 식량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인데 돌아가기는 어떻게 돌아간다는 말인가.”
“장군, 병사들이 들을까 두렵습니다.”
“그들도 잘 알고 있을 테지···. 우리에게 남은 건 이제 아무것도 없어.”
가니우스는 고개를 떨궜다.
“약한 소리 마십시오. 언젠가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겁니다.”
프라비타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역시 자네뿐이야.”
가니우스는 그런 것도 모르고 웃을 뿐이었다.
토이토부르크로 가는길 - 3
“그렇게 노려보다가 하루 다 지나가겠네.”
“끄으응···.”
“흐으음···.”
프랑크 공작 브레누스와 부르군트 공작 게지카.
둘 사이의 견해차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게지카는 자신들의 승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이미 확보한 땅들로 모자라서 프랑크족이 점유하고 있는 땅 전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브레누스는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반복했으니 합의가 될 리가 있나.
둘의 의견은 정확하게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런 도둑놈 같으니, 뭐가 어쩌고 어째? 우리 프랑크족을 게르마니아에서 몰아내려는 네놈의 간악한 수를 내가 모를 것 같았더냐!”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놈이로구나, 난 당장이라도 군대를 몰고 가서 네놈의 군사와 백성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도 있어! 그런데 뭐? 땅을 돌려달라고?!”
정말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누구의 편을 들기도 모호했고, 그렇다고 둘의 타협점을 찾자니 서로 자신의 의견을 조금도 굽히지 않는 터라 힘들었다.
“색슨 놈들이 등에 칼을 꽂기 전만 하더라도 매일같이 패퇴하기 급급했던 건 네놈들이 아니었나?”
“허, 자네의 신뢰도가 얼마나 낮았으면 동맹이 등에 칼을 꽂았겠나?”
“네놈이 색슨 공작인 시네발드에게 딸을 들이밀면서 꼬드긴 게 아니냐!”
“공작쯤 되는 사람이 이놈, 저놈 해서 쓰겠나? 품위를 유지하게 품위를 말이야.”
브레누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이쯤에서 한번 말려줘야 했다.
탁자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제법 기다란 탁자가 단번에 갈라지면서 무너져내렸고, 모든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또 말하는군. 나는 허수아비인가? 왜 불러놓고 자네들끼리 떠들 것이면 나는 왜 불렀나?”
“가, 각하···.”
“그, 그것이···.”
다들 입이 떡 벌어져서 말을 더듬었다.
내 분노를 본 탓인지, 아니면 탁자를 쪼개는 모습 때문인지는 잘 몰랐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거 물어내라고는 안 하겠지···?
“됐어. 너희들끼리 싸우던지 말든지 알아서들 해. 난 간다.”
“가, 각하!”
사루스가 황급히 천막을 벗어나는 내 뒤에 따라붙으며 물었다.
“각하, 이렇게 나오셔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들을 너무 자극한 게 아닐는지···.”
“사루스.”
“예, 각하.”
“저 새끼들이 열 받게 하는데 어떻게 해.”
“그···. 조금만 참으셨으면···.”
당황하는 사루스에 웃으면서 되물었다.
“뭐가 아쉽다고 참겠어.”
“보아하니 부르군트 공작의 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이 그가 게르마니아를 통일한다면···.”
“그전에 때려 부수면 그만이야.”
“하지만···.”
“왜, 자신 없나?”
사루스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복잡했던 게르마니아에서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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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에도 게지카와 브레누스는 서로를 탓할 뿐이었다.
“자네의 모습이 얼마나 추했으면, 각하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셨겠나? 정신 좀 차려!”
“네놈의 추악한 욕심에 질려버리신 건 아니고?”
“추악하기는! 꽁지 빠지게 도망쳐놓고 다시 돌려달라고 징징거리는 자네의 모습이 제일 추하다네.”
“이놈이···!”
“그래, 여기서 아예 결판을 보자꾸나.!”
천막 안의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만 갔다.
주변에 있던 이들도 브레누스와 게지카가 검을 뽑아 들자, 어정쩡한 자세로 무기를 뽑아 들었다.
‘뭐야, 갑자기 싸운다고.?’
‘아이씨···. 오늘 각하께서 오신다길래 아껴뒀던 술을 꺼냈는데···.’
‘진짜로 싸우지는 않겠지?’
두 지휘관의 다툼과는 별개로 부하들은 싸움을 원치 않았다.
대부분의 게르마니아 귀족들은 이 전쟁에 발을 걸치고 있긴 했지만, 이 전쟁이 자신들의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그저 더 높은 직위를 가진 귀족과의 계약 때문에 불려 나온 것일 뿐이었다.
“게지카! 네놈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무슨 말씀을! 네놈이야말로 게르마니아에 각하를 불러들여서 네놈의 추악한 잇속을 채우려던 게 아니더냐!”
“다들 아주 잘-하는 짓입니다.”
“네놈은 또 누구냐!”
천막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데키무스가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게지카와 브레누스에 번갈아서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지금 각하께서 왜 화가 나셨는지조차 모르고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을 거면, 왜 각하를 부르신 겁니까!”
“아니, 그런데 네놈은 누구기에 건방지게 우리의 일에 참견질이냐!”
“브레누스. 이 멍청한 놈을 보았나···. 각하의 부관이신 데키무스 경이 아닌가!”
“뭐?”
게지카의 말에 브레누스가 당황하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아니, 저···. 이건 그러니까···.”
“됐습니다. 지금 당신의 무례가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브레누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게지카가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꼴좋군.”
“부르군트 공작! 자네는 뭘 잘했다고 또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가!”
“네?”
“자네의 그런 태도가 매번 분란을 불러오는 것도 모르겠나? 고작 전투에서 몇 번 이긴 것으로 우쭐거리면서 상대를 깔보는 게 좋냐 이 말이야!”
“그것이 아니고···.”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각하께서도 자네의 그런 꼴사나운 모습에 질린 것이 아니겠나!”
게지카 또한 고개를 떨궜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휘어잡은 데키무스가 무기를 들고 있는 이들에게 일갈했다.
“자네들은 여기가 전쟁터인 줄 아는가! 당장 무기를 거두지 못해!”
다들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도 냉큼 무기를 집어넣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키무스가 말했다.
“의견이 엇갈리는 것은 회담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자네들처럼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야만적인 행동일세. 내 총독 각하를 잘 설득해볼 것이니 자네들은 오늘의 일을 잊지 말고 가슴 깊이 간직하게.”
“예, 장군.”
다들 마지못해서 대답하는 기색이었다.
이 모습에 데키무스가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서는 천막을 빠져나갔다.
데키무스가 떠나고 침묵에 잠긴 천막 안에서 브레누스와 게지카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우리가 조금 심하긴 했지.”
“우리라고 하지 말게, 자네의 그 욕심이···.”
“자네는 조금 전까지 크게 혼이 나고서도 그런 말이 하고 싶은가?”
“크흠···. 미안하네.”
“후우···. 부하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군.”
“나도 마찬가지일세.”
브레누스와 게지카는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이제 곧 여름이야.”
“늦어도 이번 달까지는 씨를 뿌려야겠지.”
“땅을 전부 돌려줄 수는 없어.”
“우리가 원래 살던 땅이었네.”
게지카가 술을 들이켰다.
“우리 조상들이 살던 곳이기도 했고 말이야.”
“프랑크족은 전부 굶어 죽으라 이 말인가.”
“이제부터 방법을 찾아야지···. 그러려고 각하를 부른 게 아닌가.”
“으음···. 그건 그렇지···.”
이번엔 브레누스가 술을 들이켰다.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정작 우리 둘의 사이를 중재해달라고 해놓고서는 싸우는 모습만 보여드렸어···.”
“못난 꼴만 보여드렸지.”
“각하께서는 다른 로마놈들과는 다르게 우리를 아끼시지 않았는가?”
“그렇지, 우리 같은 촌놈이 언제 그런 휘황찬란한 연회를 구경이나 해봤겠는가?”
“크크크···. 그래 맞아.”
“그뿐인가? 규칙과 규율이라고는 없는 이 게르마니아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주셨지.”
“그것도 맞지.”
브레누스는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게지카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거기다가 고작해야 이 촌 동네에서 평생 벗어나지도 못할 우리에게 나름 그럴듯한 직위도 하사해주셨고 말이야.”
“그래 그 덕분에 재미 좀 봤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둘의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