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62/187)

테오데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웃었다.

이윽고 그의 웃음이 멎자, 다시 한번 물었다.

“다 웃으셨으면 병사들을 내주시지요.”

“자네에게 병사들을 다 내어주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안되면 말고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니, 테오데머가 날 붙잡았다.

“그냥 갈 생각인가?”

“안된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시간 버릴 바에는 하루라도 빨리 강을 건너가서 병사를 징집하던가 하겠습니다.”

“농담도 못 하겠군.”

“일에 농담이 어딨습니까.”

테오데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일라가 자네를 도와달라고 했네. 그냥 보냈다가는 한 소리 듣겠지···.”

“3만 명입니다.”

“그렇게까지는 힘드네, 우리도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니까 말이야.”

“주시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으신 겁니까.”

“2만 명까지는 지원해줄 수 있네.”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리푸아리 들을 이끌고 미리 약속해둔 장소에서 세르비우스와 만났다.

“기다리게 했군.”

“아닙니다. 각하, 저희도 막 도착했습니다.”

“준비는 다 됐겠지?”

“강 건너에 정찰병들과 선발대를 보내 안전을 확보해놨습니다.”

“좋아. 전군 도강한다.”

******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 388년 만에 로마군이 다시금 라인강을 건넜다는 소식은 곧 게르마니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로마놈들이 강을 넘었다고 합니다.”

“아니, 그놈들이 왜?”

“듣자 하니 게르마니아의 일을 중재하신다고···.”

“중재? 중재는 무슨 놈의 중재란 말이야!”

“그걸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셔도···.”

로마군은 게르마니아 이곳저곳에 퍼져있는 다른 게르만 부족의 병사들보다 그 숫자는 적었지만.

그들과 비교하여 장비의 수준도 월등히 좋았고, 병사들의 훈련상태도 뛰어난지라 모든 이들이 그들의 행보를 주목했다.

“사루스.”

“예, 각하.”

“병사들은 어떤가, 동요하는 기색은 없나?”

“그동안 성실하게 훈련에 임한 녀석들입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래, 이번이 첫 전투이자 첫 원정이로군.”

생각해보니 슬슬 게르만 군단병들에게 군단 숫자를 붙여줄때가 되었다.

순수 게르만인들로 구성된 군단과 게르마니아가 합쳐지니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17, 18, 19 셋 중에 어느 숫자가 좋은가.”

“예? 그건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생각해두게 이번 게르마니아 정벌이 끝나면은 자네 군단에 붙일 숫자니까 말이야.”

게르마니아.

말로만 들었지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무가 울창하고, 산과 언덕이 많은 것이 저곳에 누가 숨어있지 않을까 두려웠다.

슬쩍 세르비우스에 물었다.

“정찰병들은 충분한가?”

“충분히 뿌려뒀습니다. 그리고 파라몬드가 마중 나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토이토부르크에서도 아르미니우스가 엄한 곳으로 병사들을 안내해서 벌어진 일이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파라몬드는 믿을만한 친구이고, 장군께서는 바루스가 아니잖습니까.”

“조심하자는 거지.”

“마침 저기 파라몬드가 오는군요.”

고개 너머에서 파라몬드가 몇 명의 기병들과 함께 오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빠른 것이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각하!”

파라몬드는 말에서 떨어지듯이 내려서 무릎을 꿇으면서 격하게 나를 환영했다.

“아니, 자네 무릎은 괜찮은가?”

“각하가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렸다고···? 그렇게나 전세가 불리한 건가?”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부족 간에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곳에서 크게 패하여 땅을 많이 잃었습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오자마자 뭘 해보지도 못하고 돌아갈 뻔했다.

“데키무스.”

“예, 각하.”

“네게 기병대를 떼어줄 테니, 가서 둘의 싸움을 말리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

“말을 듣지 않으면 어쩔까요.”

데키무스를 돌아봤다.

그게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알아서 처리해.”

******

“로마군이 본격적으로 이 전쟁에 끼어들기 전에 끝을 봐야 합니다!”

“아닙니다. 이대로 끝을 봤다가는 각하께 크게 문책당할 수 있습니다!”

부르군트 공작의 진영은 크게 둘로 갈라졌다.

이대로 끝을 봐야 한다는 쪽과 지금이라도 싸움을 멈추고 협상을 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부르군트 공작은 둘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질 뿐, 확실한 답변을 내리지 못했다.

“공작님, 우리의 승기가 확실합니다. 저 프랑크 놈들을 밀어버리고 남은 땅을 가져가는 겁니다.”

“자네 미쳤나? 그렇게 되면 로마놈들이 잘도 가만있겠군!”

“가만있지 않으면 어찌할 건가, 이곳은 우리 땅이지 로마놈들의 땅이 아니야!”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은 우리를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왜 모르는가!”

둘의 언쟁이 격해지자 부르군트 공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어서 둘을 진정시켰다.

“다들 뭘 그렇게 언성을 높이는 건가, 다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보게.”

“주군!!!”

한 병사가 숨 가쁘게 그를 찾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로, 로마군이···.”

“로마군이 강을 건넜다고? 그건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니더냐.”

“그것이 아닙니다!”

“그럼 뭘 말하고 싶은 게냐.”

“로마군 기병대가 주둔지 밖에서 공작님을 찾고 있습니다!”

“뭐라고?”

******

“이런다고 놈들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면 나오게 만들어야지.”

데키무스는 굳게 마음먹으며 주둔지를 바라봤다.

그가 이끌고 온 기병들은 고작 삼백에 불과했고, 부르군트 공작의 주둔지에는 못해도 수만의 병사들이 있었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당장 도망가는 것부터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긴장되는 시간이 흘러갔고, 주둔지의 문이 열리면서 수천의 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대로 무장한 병사들이 주둔지 밖으로 나오자 데키무스는 창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무래도 대화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구나.”

“장군, 지금이라도 뒤로 물러나서 본대와 합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각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셨고 우리는! 그걸 따르면 된다. 전원 전투준비!”

데키무스의 말에 병사들이 마음을 다잡으면서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수 있게 준비했다.

하지만, 이들이 전투를 벌이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로마군을 환영하는 바이오!”

화려하게 치장되어있는 말에 올라탄 부르군트 공작이 웃으면서 병사들과 함께 그들을 마중 나왔기 때문이었다.

토이토부르크로 가는길 - 2

“부르군트 놈들이 문을 열고서 너희를 환영해줬다고?”

이게 말이야 방구야.

선발대로 보냈던 데키무스는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전령을 보내서 본대를 부르고 있었다.

복장이나 암구어를 제대로 알고 있는 걸 보면 아군이 맞는 것 같지만, 도통 믿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니 신뢰가 가질 않았다.

“이걸 믿어 말아.”

“데키무스 장군이 붙잡혔을 수도 있습니다.”

“흐으음···.”

“각하, 진짜입니다. 부르군트 공작이라는 자가 우리를 환영하면서 각하의 중재에 응하겠다고 했습니다.”

“각하,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다 이긴 전쟁을 이렇게 쉽게 던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루스 경의 말이 일리가 있긴 합니다.”

“흐으으음···.”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이대로 이놈을 따라가자니 토이토부르크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영원히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결국에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세르비우스 경과 3군단은 이곳에서 대기하시오.”

“각하, 괜찮으시겠습니까?”

“두 시간 뒤에 사람을 보낼 테니, 연락이 없으면 그 뒤는 세르비우스 경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세르비우스를 지나치며 사루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물었다.

“사루스, 잠시 부탁하지.”

“예, 각하!”

******

부르군트의 주둔지로 향하니, 프랑크 공작도 군대를 이끌고 마중 나와 있었다.

“각하,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댁들이 있는걸 보니 함정은 아닌 것 같군.”

“예? 함정?”

“아닐세. 그런데 자네들은 누가 부른 건가?”

“부르군트 주둔지에 로마군이 나타났다고 하기에 급하게 병사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그래? 크게 패했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듯 보이네.”

내 말에 프랑크 공작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지난 전투에서 정예병을 많이 잃은지라 대부분이 신병들입니다.”

“그러기에 왜 쓸데없이 싸움을 벌이고 그러는가, 문제가 있으면 같이 모여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풀면 될 것을 말이야.”

“송구합니다···.”

“자네들은 저들과 사이가 좋지 못하니 내가 먼저 들어가겠네, 자네들은 따로 사람을 보내면 그때 오게나.”

“하지만 각하···.”

“맞습니다. 싸움에서 진 개는 꼬리를 말고 도망가야지요.”

우리의 대화에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주둔지에서 부르군트의 병사들과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나오고 있었다.

“자네는 누구기에 대화에 끼는가?”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는 부르군트족을 이끄는 부르군트 공작 게지카라고 합니다.”

게지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뒤져봤지만, 뭔가 떠오르는 건 없었다.

멀뚱멀뚱 그를 보고만 있는 게 민망했는지, 사루스가 조심스럽게 귓가에 대고 말했다.

“각하, 지난 연회들에서 각하께서 매번 가까이 두시면서 술을 드셨습니다.”

“그래?”

왜 난 기억이 없지.

이래서 술이 원수라는 건가?

진짜로 기억에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자리쯤 되면 모른다고 모르는 척을 할 수가 없었고, 안다고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잘 지낸 모양이구먼. 내가 못 알아볼 정도니 말이야.”

“하하하 역시 각하이십니다. 그동안 저를 잊지 않았을까 염려했는데, 괜한 걱정이었군요.”

웃으면서 말하던 게지카는 자연스럽게 옆에 있던 프랑크 공작에게도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브레누스 자네도 있었지, 지난 전투에서 꽁지 빠지게 도망가던 게 눈에 선했는데···. 용케도 모습을 보였군.”

“크흠···. 지난 전투에서는 내 신세를 많이 졌으니 다음에는 그 신세를 갚아야지.”

“하하하 도전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네.”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주변에서는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좋은 날에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지 말고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하지.”

“모시겠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게지카가 앞장서니 브레누스가 이를 말렸다.

“각하, 놈들이 무슨 함정을 숨겨뒀을지 모릅니다. 섣불리 안으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뭣이?! 나를 모욕하려 하는 건가!”

“네놈의 비겁한 술수에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각하께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이제는 그냥 싸우라고 내버려 뒀다.

물론 내가 말리고자 마음먹었다면, 권위와 힘으로 두들겨 패서라도 말렸겠지만 그렇게 억눌렀다가는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래, 서로 싸워라.

살아남는 놈이 내 편이다.

“지금 다들 뭘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도 파라몬드가 둘을 뜯어말렸다.

“지금 각하께서 앞에 계시는데 두 분은 뭘 하시는 겁니까! 각하께서 손수 이 싸움을 중재하려고 오셨는데 이런 못 볼 꼴을 보이시려는 겁니까!”

“자네는 누구길래 우리의 대화에 끼어드는가!”

“위대한 프랑크의 전사이자 지도자인 마르코메르의 아들! 파라몬드다!”

당당한 파라몬드의 기세에 게지카가 감탄했다.

“브레누스 놈의 휘하에는 허수아비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기세하나는 대단하구나.”

“번번이 아군의 보급선을 공격하면서 귀찮게 하던 그놈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슬슬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제는 내가 나서서 수습할 차례였다.

“그만, 자네들 내 앞에서 무슨 추태란 말인가?”

“으음···.”

“각하, 그것이 아니옵고···.”

“듣기 싫다. 나는 중재를 해달라고 해서 온 것이지 자네들 싸움 구경하러 온 게 아니야 알고 있나?”

“알고는 있습니다만···.”

브레누스가 게지카의 말을 잘라먹으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각하께서는 내 부탁을 듣고 오신 것이네!”

“어허, 자네는 말을 왜 그렇게 하는가? 내가 자네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예? 각하···. 그것이 아니고···.”

브레누스와 게지카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제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흘러왔다.

이제는 협상에 임할 때였다.

“날이 춥군. 들어가도록 하지.”

“모시겠습니다.”

“아, 잠깐 그 전에···.”

파라몬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는 가서 세르비우스 경에게 난 괜찮으니 주둔지를 잘 지키고 있으라고 전하게.”

“데려오는 게 아닙니까?”

파라몬드의 물음에 주변에 있는 두 공작을 둘러보면서 대답했다.

“워, 나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네.”

“저도 있습니다. 각하.”

“그래, 사루스도 있지. 하하하.”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파라몬드가 떠나고, 멀뚱거리면서 서 있는 둘에게 물었다.

“그래, 이제 자네들이 왜 싸웠는지부터 들어야겠지···. 자세한 건 안에서 듣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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