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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심통이 난 안토니나를 코프루스에 맡기고 응접실로 향하니 데키무스가 따라붙었다.
“생각보다 강 건너의 싸움이 생각보다 크게 번진 것 같습니다.”
“짧게, 중요한 것만.”
“강 건너 세력이 크게 다섯으로 갈라졌는데, 그중에 셋이 전쟁 중이고 조만간 나머지 둘도 참전할 모양입니다.”
그대로 멈춰서서 데키무스를 돌아봤다.
방금 잘못 들었나?
“뭐라고?”
“자기들끼리 죽을 듯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으로 연회를 했던 게 몇 달 전이지?”
“다섯 달···. 아니 넉 달 전쯤일 겁니다.”
“도대체 그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게르마니아에서 그 지랄이 나는 건데!”
분명히 내 계획대로라면 10년 정도는 조용히 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10년은커녕 1년도 못 가고 게르마니아가 찢어지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싸우는 것이야 늘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난번에 들었을 때는 그저 가볍게 세력다툼을 벌이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듣고 보니 강 건너 야만인들의 전쟁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응접실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니, 파라몬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는···?”
파라몬드는 나를 보자마자 맨바닥에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각하, 저와 제 부족민들을 살려 주십시오···!”
파라몬드가 눈물을 보였다.
화들짝 놀라서 바닥에 엎드려있는 그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강 너머에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했는가?”
“그것이···.”
데키무스에 들은 말이 그저 골치 아픈 정도였다면, 파라몬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충격으로 말이 제대로 안 나올 정도였다.
세 부족의 다툼에 다른 두 부족이 곧 끼어든다는 건 데키무스에 들었지만, 그 두 개 부족을 고트족이 지원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몇 개월간 이어진 전쟁으로 부족민들은 노예처럼 착취당하고 있었고,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던 작은 부족들은 강제로 합병당해 노예가 되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게르마니아의 동쪽에서 스키타이를 봤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식은땀이 흘렀다.
“스키타이가 확실한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여럿이서 말을 타고 다니는지라 스키타이라고는 했는데···.”
아무리 봐도 훈족이었다.
스키타이는 수백 년 전에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 후계도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 남은 건 훈족뿐이었다.
“그래,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편히 쉬게.”
“각하, 잠시만···.”
“뭔가?”
“공작께서 다른 이들과의 싸움을 중재해달라고도 하셨습니다.”
“알겠네.”
파라몬드에 노예를 붙여주고는 데키무스를 돌아봤다.
데키무스는 잔뜩 굳은 얼굴로 물었다.
“전부 부를까요?”
“세르비우스와 사루스만 불러. 최대한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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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급하게 불러모아서 미안합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강 건너의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세르비우스가 물었다.
“생각보다 더 심하다니요? 야만인들끼리 싸우는 게 하루 이틀이었습니까.”
그 말에 머리를 긁적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 건너에서 수십만의 야만인들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군요.”
“허허···. 수십만이라···. 조금 많군요.”
“사루스의 말에 따르면 병사들만 따졌을 때라고 하더군요.”
세르비우스의 입이 다물어졌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세르비우스가 말했다.
“3군단도 가야 합니까···?”
“움직일 수 있는 군단은 전부 움직일 생각입니다. 일단 스틸리코 장군에게 보고하고 새로 군단을 편성할 생각도 있습니다.”
“신생 군단은 논외로 하고, 두 개 군단이라···. 보조 군에 기병대까지 하면···.”
“한 놈 패놓는 건 일도 아니지요.”
“게르마니아의 일이라면 리푸아리들도 데려가시는 겁니까? 그들보다 게르마니아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없을 텐데.”
세르비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데머가 순순히 병사를 내어주겠습니까?”
“안 내주면 대가리를 깨부숴라도 받아내야지요.”
“......지난 일로 스틸리코 장군에 대한 반감이 심할 텐데, 장군께서는 그분의 사위시니 좋은 대접은 못 받을 겁니다.”
여기서 세르비우스가 말하는 지난 일은 몇 년 전에 찬탈자 에우게니우스와 아르보가스트가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이끄는 동로마군에게 패한 일을 말하고 있었다.
테오데머는 아르보가스트의 사촌으로 평소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휘하에서 활약한 스틸리코를 원수 대하듯 하고 있었다.
“으음···. 그건 그렇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도와줄 사람은 아닙니다.”
“일단은 병사들을 준비시키세요.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예, 각하.”
세르비우스가 회의실을 나섰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사루스가 물었다.
“리푸아리들은 용맹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강 건너의 일로 골치가 아픈데, 그들과도 문제가 생기면···.”
“무슨 방법이 없을까.”
“죄송합니다. 저도 그쪽은 잘 모릅니다.”
“쯧···. 어쩐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무시하고 바로 강을 건너갔겠지만, 지금은 병사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게르마니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오랜 기간 로마의 국경을 지킨 리푸아리 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우선은 자네 휘하의 병사들을 정비하면서 내 명령을 기다리게나.”
“알겠습니다.”
조용해진 회의실에서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는데,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당장 게르마니아 건도 중요했지만, 아칸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과 게르마니아 함대를 이끌고서 사라진 카티우스를 찾는 것도 중요했다.
“뭐 이렇게 일이 많아!!!”
짜증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아칸을 찾는 일이야 카르타고에서 사라진 거라 그냥 게르마니아에 없다고 하면 될 일이었지만, 카티우스가 때맞춰 같이 사라진 게 영 거슬렸다.
그만한 함대를 이끌고서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보다 도통 모르겠다.
그뿐인가?
어쭙잖게 만지작거리면서 손안에서 쥐고 흔들려던 게르마니아는 지금 저들끼리 지지고 볶고 난리가 났다.
역시 사람은 안 해본 일을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상훈아, 제발 철 좀 들어라.’
어머니가 항상 하시던 말씀.
이제야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애초부터 머리를 쓰고 그럴 사람은 못됐다.
되지도 않는 정치질을 한다고 일을 벌여놨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언젠가는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을 뿐이고 말이다.
이제는 수습할 때다.
“에라이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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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가실 필요는 없으시잖아요···.”
“그래도 일을 벌인 게 난데 가보기는 해야지.”
“오래 걸리시겠죠.”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에우독시아는 말없이 조금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면서 은근히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날 때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평생 구박받은 아버지를 보고자란 나로서는 굉장히 긴장됐다.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달라붙어 조심스레 배를 쓰다듬어주면서 물었다.
“마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당신이 날 두고 또 멀리 떠난다니까 조금 불편하네요. 이번에는 또 어떤 여인을 데리고 올지도 기대되고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듣기로는 리푸아리 들을 찾아간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응? 맞긴 한데···. 누구한테서 들은 거야.”
“그건 비밀이에요.”
“끙···.”
누군지는 몰라도 참 입이 가벼웠다.
“거긴 왜 가시는데요.”
“도움을 좀 구하려고.”
“그래요? 마침 거기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아는 사람?”
“편지하나 써드릴 테니 가보면 아실 거예요.”
“그래 주면 나야 고맙긴 한데···.”
솔직히 별로 믿지는 않았다.
그냥 에우독시아의 기분에 맞춰줬을 뿐이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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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아일라의 남편이로군.”
그녀가 알고 있다는 사람이 리푸아리 들의 수장.
테오데머였다.
“이런 ㅆ···.
토이토부르크로 가는길 - 1
조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방은 넓었지만, 나와 테오데머 단 둘뿐이라 굉장히 서먹하면서도 어색했다.
“들게.”
“잘 먹겠네.”
“먹겠네?”
“......잘 먹겠습니다.”
조심스레 포도주를 들이켰다.
좋은 포도로 만들었는지 부드럽고 달콤하면서도 목 넘김이 좋았다.
“직접 기른 좋은 품질의 포도들로 만든 것이니 제법 입맛에 맞을 거야.”
“그, 그렇군요.”
“아일라는 잘 지내고 있나? 먼 곳으로 입양 가고 얼굴을 못 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말이야.”
도대체 이 사람은 에우독시아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말하는 것만들어보면 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사람 같았다.
“지금은 아그리피넨시스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 조만간 한번 찾아봐야겠군.”
“편하실 대로 하시지요. 그런데···.”
눈을 치켜뜨면서 그에게 물었다.
“아일라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흠···. 아일라가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군.”
“보아하니 나이 차이도 제법 나는 것 같은데···.”
“사촌일세.”
입에 머금고 있던 포도주를 그대로 내뿜었다.
다행히도 테오데머의 얼굴에 뿜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자네 괜찮은가?”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허허···. 아일라가 가족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한 모양이군? 그럴만하지···. 형님이 그렇게 가버리셨는데···.”
형님? 그건 또 무슨 소리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형님이라니요? 아일라에 남자 형제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자네 정말 하나도 모르는 모양이군.”
“알려주십시오.”
“흠···.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그래! 자네 아르보가스트라는 사람을 알고 있나?”
“제국의 찬탈자 아닙니까?”
내 말에 테오데머의 수염이 파르르 떨리면서 금으로 만든 술잔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르치며 말했다.
“자네 그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말게, 형님은 로마를 위하시던 헌신적인 분이었네.”
“아니 그럼 찬탈자를 찬탈자라고 하지, 뭐라고 합니까?”
“자네가 찬탈자라고 부르는 그분 이 아일라의 오빠인 건 알고 지껄이는 건가!”
“예?”
머리를 망치로 한 서너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솔직히 에우독시아가 입양되기 전의 일은 알지 못했다. 몇 번 물어보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그녀가 대답을 피하는 통에 더는 묻지 않았던 것인데, 아르보가스트가 그녀의 가족이었다니 조금 충격이었다.
“하나도 못들은 모양이군. 내 이번엔 참겠네만, 다음은 없으니 처신 잘하게.”
“아···. 감사합니다.”
“아르보가스트···. 그러니까 내 사촌 형님이자 아일라의 친오빠였어, 아일라는 오빠를 잘 따랐고 말이야.”
“그렇군요.”
“그런데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건 보토님이 돌아가시고 형님이 그 뒤를 잇게 되면서부터였어.”
“잠깐, 보토는 또 누굽니까.”
테오데머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돌아봤다.
“형님과 아일라의 아버지이자 내 숙부 되는 분일세. 자네는 그런 것도 몰랐나?”
“말을 안 해주는데, 제가 어떻게 압니까···.”
“쯧쯧쯧···. 최소한 알아보려는 노력이라도 했었어야지 말이야. 자네를 보아하니 아일라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네그려.”
“음···.”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동안 그녀에게 무심했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됐다.
“사람들은 발렌시안 황제를 형님이 암살했다고 믿고 있지만, 형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야, 차라리 대놓고 죽이지 힘없는 어린 황제를 암살해서 무엇하겠는가?”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런데 암브로시우스 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새끼가 한 말은 잊어버려! 주교라는 놈이 정치에 기웃거리고 있는데 그런 놈의 말을 믿는가?”
테오데머의 말은 그 뒤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의 말은 아르보가스트를 옹호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를 띄워서 이곳에 처박힌 자신의 처지를 포장하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시군요.”
“그래! 스틸리코 그놈 자리가 원래 형님 자리였다고! 그 악독한 스틸리코 그 새끼가 형님을 쳐 죽이고 자리를 뺏은 거라고!”
아르보가스트는 전투에서 패해 죽은 거였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흥분해있는 그를 자극해서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자네가 스틸리코와 가깝게 지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인가?”
테오데머는 내게 화살을 돌렸다.
“제가 스틸리코의 충신이라면, 왜 친위대 대장에서 게르마니아까지 왔겠습니까? 여기서 뭐 좋은 게 있다고.”
“하긴···. 그놈은 사람을 길거리에 널린 돌쯤으로 취급하는 놈이었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제는 제가 말해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테오데머가 머리를 긁적였다.
“귀한 손님을 앉혀두고 너무 내 이야기만 했군. 그래,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지금 게르마니아의 상황이 많이 좋지 않음을 알고 계실 겁니다.”
“자네가 무슨 술수를 썼는지는 모르겠다만,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난리가 나지.”
“강을 건너려고 합니다.”
테오데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내 도움이 필요하겠군.”
“얼마나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묻겠네. 얼마나 필요한가?”
테오데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푸른 눈은 내 반응을 궁금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최소한 3만 명은 필요합니다.”
“우리 병사들을 탈탈 긁어갈 셈인가?”
“그렇다면 저야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