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58/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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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제 성의를 받아주십시오.”

예상했던 대로 족장들은 사죄의 의미로 선물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대부분이 병영에 널려있는 수많은 무기나 갑옷들이었고, 그나마 덩치가 크고, 왕국을 자처하는 부족들은 황금으로 나를 기쁘게 했다.

“허허···. 뭘 이런 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챙겼다.

몇 달이나 연회를 열었더니, 슬슬 창고가 텅텅 비어가고 있었고, 식사때마다 올라오는 음식의 가짓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선물을 받던 중에 지난번에 싸움을 주도했던 족장은 독특한 선물을 내밀었다.

“제 선물입니다. 받아주십시오.”

“아니, 저저···.”

“아니, 저것을···.”

족장이 건넨 것은 말라비틀어진 듯한 모습의 무였다.

“이게 무엇인가?”

“이름 붙은 것은 없으나, 먹으면 달콤한 맛이 나는 신기한 식물입니다.”

“그래?”

생긴 건 영락없이 오래된 무같이 생겼는데.

한입 베어 물었더니, 달짝지근한 맛이 나는 게 제법 괜찮았다.

“괜찮군.”

“말 먹이를···.”

“대담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쯧쯧···.”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어.”

“각하께서 조금 전에 드신 것은 말 먹이로나 주는 풀입니다. 저놈이 각하께 모욕을 주려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

맛만 좋은데.

이걸 말먹이로 준다고.?

내 생각과는 다르게, 족장의 얼굴을 붉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각하!”

“허허···. 저 말이 사실인가?”

“각하께 망신을 드리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 부족은 다른이들보다 작은 곳이라 부족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각하께 드릴만 한 것이 그것뿐이었습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다시 한번 크게 한입 베어 물면서 말했다.

“살면서 받은 선물 중에 가장 마음이 드는구나, 백성들을 생각하는 네 마음이 마음에 들었다. 이름이 뭔가?”

“마르코메르의 아들 파라몬드입니다.”

“그래, 선물 잘 받았다.”

파라몬드가 자리로 돌아가니, 뒤에서 조용히 있던 데키무스가 귓속말로 말했다.

“각하, 마르코메르라면 몇 년 전에 강을 건너와서 로마를 공격했던 야만인입니다.”

“그래? 생각보다 거물의 아들이었군.”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데키무스의 말을 듣고 파라몬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또 무언가 생각이 날듯 말 듯 간질간질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는데, 오랫동안 머리를 쓰지 않아서 그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거 괜찮은데, 돌아갈 때 씨앗과 재배법을 좀 알려주고 가게나.”

“예, 각하!”

“자, 오늘도 이 자리를 빛내주신 프랑크, 부르군트, 색슨 여러분. 제가 그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같이 모여서 논다고는 하지만, 규칙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무슨 규칙 말입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규칙이라기보다는 예절에 가깝지요.”

예절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예절이라고 해서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을 쭉 둘러봤는데, 수행 인과 귀족의 구분을 짓기가 어렵더군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건 그렇지.”

“그런가? 어차피 다 똑같은 이들이 아닌가.”

족장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들이었다.

“따지고 보자면, 이곳에 모인 이들은 로마에서는 귀족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랫것들과 비슷한 취급을 당해서야 쓰겠습니까?”

“그런가?”

“들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여러분이 명예를 빛내는 만큼 아랫것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그만한 품격을 보여야 함이 맞겠지요? 귀족이란 앞에서 이끄는 자니까 말입니다.”

어느샌가 연회장에 모인 이들이 내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간단한 예절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라인강의 수비 - 10

거창하게 예절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딱히 별다를 건 없었다.

그저 로마에 있는 간단한 예절에서, 로마로 떨어지기 전 그러니까 한국에서 한창 학교에 다니던 시절 배웠던 예절들을 적절히 섞었을 뿐이었다.

술 마실 때는 고개를 돌린다던가, 상급자를 보면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를 올린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니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제법 있어 보이는 듯했다.

간단한 것들부터 몇 가지 알려줬을 뿐인데, 저들끼리 신나서 따라 하고 난리가 났다.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대족···. 아니, 각하.”

“질문? 무슨 질문인가.”

“이 예절이라는 것들이 실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우리는 숲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다른 족장들도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다시금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주 좋은 질문일세.”

그리고 표정을 구겼다.

“아주 멍청한 질문이기도 하고 말이야···. 예절이라는 것은 인사와 같네. 자네는 다른 이에게 왜 인사를 하나? 그게 쓸모있는 행동이라 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그렇지, 인사라는 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기 위해 하는 것이야. 내 말이 틀렸나?”

주위를 둘러보면서 동의를 구했다.

“아닙니다.”

“예절이라는 것도 인사와 같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관계에서 규율과 질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 규율이라고 하니 내가 로마에서···.”

거의 한 시간에 걸쳐서 내 길었던 군 생활을 풀어놓으며, 규율과 질서가 가져오는 평화와 예절의 연관성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다.

이 모든 것을 들은 족장들은 질린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겠군요···.”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은···. 우리는 부족민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겁니까?”

족장들은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럴 때 이들의 기강을 다잡아야 했다.

“그렇지. 자네들은 만인을 이끄는 자들이 아닌가? 이름하여 ‘푸른 피’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푸른 피···?”

“그래, 보통 내 고향에서는 만인들을 이끄는 부류들을 푸른 피라고 부르면서 다른 족속들과는 다르게 우대했다네.”

“그 푸른 피라는 게 뭡니까?”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좋은 질문일세. 푸른 피란 무엇인가! 푸른 피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일세, 여기서 말하는 만들어지는 것이란···.”

“그···. 각하 저희는 그렇게 어려운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아, 실수.”

한번 목을 가다듬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자네들은 자신이 다른 이들을 이끌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한 푸른 피라는 것이지.”

“오오···.”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그대들 또한 진정한 로마인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지!”

“로마···.”

“오오···. 로마···.”

“로마인···?”

이제 거의 다 왔다.

이제는 낚싯대를 끌어 올려야할 차례였다.

“내가 로마의 적법하고도 위대한 통치자이신 호노리우스 폐하에게 부여받은 권한으로 선포하겠네, 자네들은 모두 게르마니아의 왕일세.”

“내가 왕이라고?”

“각하! 저보다 턱없이 작은 다른 부족들도 왕이라니 이건 이상합니다.”

“으음···. 그렇군, 전부 왕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겠어. 그럼 이건 어떻겠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 입으로 향했다.

이제는 낚싯대를 힘껏 끌어 올릴 시간이었다.

“내 고향에서는 왕의 밑에 있는 귀족들을 부르는 여러 호칭이 있었다네.”

“그게 무엇입니까?”

“흠흠···. 이제부터 부족들의 크기에 따라 급을 나눠줄 테니 잘 듣게나.”

그 뒤로는 사루스가 조사해둔 표를 따라 읽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많이 들은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제제를 족장들에게 골고루 하사했다.

정확히 따지자면 계약식인 서양의 오등작제보다 직급에 가까운 동양의 오등작제 였지만 말이다.

다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낮은 계급의 이들이 높은 계급의 이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작위를 내렸으니 이제는 편을 가를 차례였다.

“이제는 앞으로 연회에서 앉을 자리를 배정해 주겠네,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듣게나.”

의도적으로 자리를 뒤섞었다.

낮은 작위의 족장들 사이에 높은 작위를 받은 족장들을 끼워 넣었다.

물론 바로 이웃하고 있는 놈들끼리 말이다.

그 뒤로는 가만히만 있어도 됐다.

“아니 이게 누군가.”

“흥···. 네놈과 같은 자리라니···.”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지켜만 보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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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공작님 아닙니까.”

“음···.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군. 아드울프 백작.”

위와 같은 대화를 게르마니아 이곳저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기존 게르만족의 풍습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라서 말 그대로 서로의 호칭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차이가, 자신과 다른 이들이 다르다는 생각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부족 단위로 흩어져 살았던 이들은 높은 계급의 부족장에게 몸을 의탁하고 보호를 받고 싶어 했다.

물론 높은 계급의 부족장들은 이들을 받아들이면서 세력을 넓혔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덩치 불리기의 끝에는 필연적으로 다툼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었다.

발단은 굉장히 사소한 일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내 소가!”

“크흠···. 미안하게 되었네.”

“미안하면 다인가! 우리 마을의 귀한 소를 이렇게 만들어 놓다니···.”

숲에서 사냥하던 사냥꾼이 다른 부족의 방목장에 있던 소를 야생동물로 착각해서 활을 쏜 게 원인이었다.

“변상해주겠네.”

“소 한 마리가 얼마인지나 아십니까?”

평소라면 서로 원만하게 끝날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뭐?”

그 사냥꾼은 마리우스에게 무려 남작 작위를 하사받은 이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사냥꾼은 평소와는 다르게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않았고, 그대로 활을 뽑아 들어서 농부를 쏴 죽였다.

“자네 제정신인가? 우리와 한번 붙어보겠다는 건가!”

“저놈이 저를 무시했습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인 건가?”

상대 족장의 말에 사냥꾼은 눈을 부라렸다.

“고작이라니요? 저는 모욕을 당했고, 그에 맞는 보복을 했을 뿐입니다.”

“하···.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가? 우리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못할 것도 없지요.”

“이놈!”

공교롭게도 그 사냥꾼은 일정량의 금액을 상납하면서 이웃의 백작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분란이 발생하자마자 백작이 개입해서 판을 뒤집었다.

“듣자 하니 자네가 내 휘하의 족장을 사로잡고 있다고 들었네만.”

“백작님 그것이 아니고···.”

“당장 풀어주게.”

“백작님, 그 녀석은 제 부족민을 사사로이 죽인 놈입니다!”

“두 번 말하지는 않겠네, 풀어주게.”

게르마니아 전역에서 위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마리우스가 작위를 분배한 지 몇 달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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