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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헤라클리우스.”
거지꼴을 한 그를 아칸이 반겨주고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네.”
“후···. 스틸리코의 사냥개들이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힘들었습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말게 이곳은 안전하니.”
“반갑습니다. 헤라클리우스 님.”
“이분은···?”
“카티우스.”
아칸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게르마니아의 전 총독이지.”
“지금은 게르마니아 함대의 제독이지요.”
헤라클리우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는 아칸에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군대는 다 뭐고, 이분은 왜 여기게 신 겁니까?”
“세상에는 기회를 잡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네 헤라클리우스, 난 그런 이들이 기회를 찾을 수 있는 등대가 되어준 것뿐이야.”
“예···?”
“기회의 땅에 온걸 환영하네, 헤라클리우스.”
아칸은 아직 어안이 벙벙한 헤라클리우스를 끌고 안으로 향했다.
헤라클리우스가 움직이자 그가 가리고 있던 표지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론디니움]
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말이다···.
라인강의 수비 - 8
그날 회의가 끝나고 마음이 무거웠다.
나름대로 스틸리코의 명령에 따라 아칸의 신임을 샀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아칸의 속임수에 놀아났다니···.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뭐···. 이런저런 생각?”
“제 생각은요?”
이렇게 치고 들어온다고.?
최고의 대답을 생각해내느라 머리를 혹사하고 있을 때쯤 테르만티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농담이에요.”
그러고는 뒤에서 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버지가 또 당신을 괴롭히나 보죠?”
“그럴 리가 있나···. 이번엔 다른 일이야.”
“어디 보자···. 그럼 황제 폐하인가요?”
테르만티아의 목소리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마도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모양인 듯했다.
“황제 폐하는 언제나 내게 고민을 안겨주시긴 하지···. 그런데 이번엔 아니야.”
“그래요? 그럼 뭘까아···?”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웃으면서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그래서 안토니나랑은 좀 친해졌어?”
“안토니나요? 뭐···. 나름대로 친해졌죠.”
“그래? 제법이네···. 오늘은 뭘 했는데?”
“같이 산책도 하고, 바둑도 두고, 수다도 떨고···. 남들 하는 것처럼 했어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몇 주 동안 게르마니아 전역에 산재한 문제들을 파악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만큼 전임총독이 싸놓은 똥이 너무 많았다.
이 정도면 작정하고 후임에게 엿을 날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였지만, 이미 가슴속에서는 가장 먼저 때려죽여야 할 놈이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내 결재가 필요한 문서들이라고?”
“예, 오늘 안에 처리해주셔야 할 겁니다.”
“돌겠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틀 전쯤에 국경지대에서 야만인들과 제국군대 간에 소요사태가 있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22군단이 관리하는 구역에서 강을 건너오려던 프랑크족들과 싸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싸움? 어쩌다가.”
데키무스는 덤덤하게 보고를 이어갔다.
“사냥감을 쫓던 프랑크인 들이 강을 건너다가 로마인과 마주쳤던 모양입니다.”
“하···. 사망자가 나왔나?”
“아뇨, 신께서 도우셨는지 양측 모두 서로 기분만 상했을 뿐,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다고 합니다.”
“슬슬 다시 시작하려는 건가?”
“막시무스 장군이 순찰을 강화하겠다고는 했습니다만···.”
슬슬 겨울이 다가오는지라 강 건너에 있는 야만인들이 굶주릴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옛말에 이르기를 사흘 굶고서 이웃집 담장을 안 넘는 이가 없다고 했다.
야만인들은 강을 넘어올 게 분명했고, 특별 대책이 필요했다.
“사루스는 뭘 하고 있지?”
“게르만 군단 병사들을 훈련하고 있을 겁니다.”
“불러와.”
데키무스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땀범벅이 된 사루스가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앉지.”
사루스가 자리에 앉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병사들 훈련은 잘되어가고 있나?”
“다른 부족 출신들을 섞어놓는 게 조금 힘들었지만, 지금은 제법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혹시 바로 전투할 수 있겠나?”
“전투라···. 아마 힘들 것 같습니다.”
“아쉽게 됐군.”
프랑크족과 싸운다는 선택지는 힘들어졌다.
그럼 다음 선택지를 골라야 했다.
“사루스, 강 건너에 있는 야만인들에 대해 알고 있나?”
“제가 알기로는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이 살고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둘 다 게피나족을 피해서 밀려온 것이지요.”
“으음···. 그렇군. 혹시 그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을까?”
“게피나 족 말입니까?”
“아니, 프랑크와 부르군트 말이야.”
내 말에 사루스가 당황하며 물었다.
“그 친구들은 왜···.”
“내 고향의 전통 중에는 이사를 왔으면 이웃집에 음식을 돌리는 전통이 있었다네.”
“예?”
“거참 말귀가 어두워서야 쓰겠나, 인근의 부족장들을 불러모으게 같이 밥이나 한 끼 하자고 말이야.”
“각하, 조금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부른다고 올 녀석들이 아닙니다.”
“그래? 그럼 직접 찾아가야 하나?”
사루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로마를 적대한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각하의 초대를 받을 리가···.”
“이봐 사루스.”
“예, 각하.”
“자네도 처음 국경을 넘을 때, 군인이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었나?”
“그건···.”
“다르지가 않지. 막시무스 장군은 오래전부터 저들과 거래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더 쉬운 편이지.”
사루스의 얼굴에는 고민이 가득해 보였다.
하긴 조금 뜬금없어 보이는 말이긴 했다.
“막시무스 장군에게 잘 부탁해봐.”
“음···. 아마 제가 부탁하면 와줄 친구들이 몇몇 있기는 합니다.”
“아무나 좋으니까 불러오기나 해. 최대한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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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개소리야.”
“진짜입니다!”
“그러니까 강 건너에 로마 총독이라는 놈이 새로 부임했는데, 같이 밥 먹자고 했다고?”
“예.”
매서운 주먹이 날아왔다.
그리고 부하의 머리에 강하게 내리꽂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진짠데···.”
“진짜라고 해도! 내가 미쳤다고 거기에 가겠느냐!”
“족장님의 안전은 총독의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고 했습니다.”
“으음···.”
족장은 고민했다.
자신의 부족은 그렇게 큰 부족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국경에서 애매하게 멀었던지라 총독이라는 놈이 마음만 먹으면, 부족을 짓밟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위험해 보이는 초대에 응하는 것도 두려웠다.
“족장님, 그냥 한번 다녀오시지요.”
“뭐? 너 돈 받았냐!”
“사루스가 있답니다!”
“뭐? 사루스?”
“예, 그 미친놈이 총독 휘하에 있다고 하던데요.”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족장은 황급히 갑옷을 챙겨입으면서 말했다.
“당장 준비해!”
“병사들은 얼마나 데려가실 겁니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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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나도 몰라 인마···.”
“저거 다 야만인들 아닙니까?”
아그리피넨시스의 병사들은 줄지어서 들어오는 야만인들의 행렬에 혀를 내둘렀다.
“무기는 두고 가셔야 합니다.”
“이건 내 장신구야.”
“어허! 내 방패에서 당장 손 떼!”
“어림도 없다 이놈!”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족 간에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얼굴을 들이미는 거냐!”
“오냐, 마침 잘 만났다.”
“여기서 싸우시면 안 됩니다!”
제법 소란이 있었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이 초대에 응했다는 증거였다.
하나둘씩 자리에 앉으면서 연회가 시작됐다.
총독관저에 있는 거대한 홀에 모인 족장들은 난생 처음 보는 웅장한 건물에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일개 지방 총독도 이런 곳에서 사는데 황제라는 사람은 얼마나 좋은 곳에서 사는 거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당장 우리는 내일 먹을 것을 고민하는데···.”
“여길 털면 제법 짭짤하겠는데?”
“쓸데없는 소리.”
다들 저마다 감상을 내뱉고 있을 때.
거대한 문이 열리면서 마리우스가 걸어 나왔다.
당당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호란에 모인 이들은 마리우스의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 사람이···. 총독인가?’
‘생각보다 젊은데?’
‘생긴 것도 로마놈들과는 아주 다른데···.’
‘배고픈데, 밥은 언제 주는 거지’
“다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다. 난 게르마니아 총독 가이우스 마리우스라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마 초면부터 반말을 내뱉어서 그런 듯 보였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다들 밥부터 먹고 시작하지.”
손가락을 튕기자 대기 중이었던 노예들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테이블로 음식을 날랐다.
오늘 연회를 준비한다고 테르만티아와 에우독시아가 제법 힘을 썼다.
노예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고급음식들은 야만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다들 마음 편히 드시길.”
“뭐, 뭐부터 손을 대야 할지···.”
“이건 또 뭔가?”
“오오···.”
족장들은 처음에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음식을 들더니, 맛을 보고서는 눈이 뒤집혔다.
“오오···. 오오오!”
수천 년을 쌓아온 로마의 맛이 야만인들의 입속에서 정복의 깃발을 꽂고 있었다.
이제는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흡입하는 수준이 된 부족장 중에는 음식을 가지고 옆자리에 있는 이와 다투는 경우도 생겼다.
“어험···. 그건 제가 먼저 잡았습니다.”
“무슨 소리? 내가 먼저 마음을 두었다네.”
“아무리 그래도 먼저 잡은 쪽이 우선이지요.”
“허, 어린놈의 새끼가···.”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음식은 충분하니 싸우지들 말게.”
그렇게 전쟁 같은 식사가 끝나고 난 뒤에는 술자리가 벌어졌다.
손수 한 명 한 명 술을 따라주고는 내 자리로 돌아와 술잔을 높이 들고서 외쳤다.
“우리 회원분들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근데 회원이 뭐지? 자네는 아는가?”
“이럴 때는 모름지기 가만히 있으면 무시당하지는 않는다네.”
술이 한 잔씩 들어갈수록 분위기가 달아올랐고, 알딸딸한 기분에 다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낼 때였다.
“이렇게 다 같이 모인 모습을 보니, 아주 기분이 좋아!”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하루하루가 오늘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술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들이키면서 물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자주 만나서 모임을 가지는 게 어떤가?”
“좋습니다!”
“불러만 주시면 메일이라도 오겠습니다!”
“그래, 밥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먹으면 친구 아니겠나?”
“그렇지요!”
다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듯했다.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던가, 어느 쪽이든 내게는 좋은 징조였다.
“그동안 저 강 건너에서 덩치 큰 부족들한테 치이고, 다른 야만인들에게 치이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꼬?”
“뭐···. 숲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숙명이지요.”
“그래도 농사는 제법 잘되는 편입니다.”
“언제 시간 되면은 농부 몇 명을 보내주게나, 우리 쪽 친구들한테 가르쳐보게.”
능청스러운 내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다들 한마디씩 보탰다.
“하하하! 진짜 농사가 뭔지 가르쳐줘야겠군요!”
“들어올 때 보니 비실비실한 것이 무기는 제대로 휘두를지 원···.”
“우리 전사들은 울타리 안의 나약한 놈들과는 다르지요! 하하하하.”
그런 모습을 가만히 곁에서 지켜보던 데키무스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각하, 전부 처리할까요?”
“아직이다. 내버려 둬.”
“저놈들의 모욕이 도를 지나쳤습니다.”
“데키무스 명령이다. 내버려 둬.”
“끄응···. 알겠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족장들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높이들이었다.
“어허! 누구 마음대로 그만 마시라고 했나? 빨리들 잔 채워.”
목을 가다듬고서 다시금 외쳤다.
“게르마니아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