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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살아계셨군요.”
“내가 죽을 곳이라도 다녀왔나.”
“얼굴만 보면 죽다 살아나신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면 최전방에 처박아버린다.”
아그리피넨시스에 도착해서야 마차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고난이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서 오세요.”
“아···.”
헤라클레스가 받은 열두 개의 고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앞의 고난이 그에 미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입구에서는 테르만티아가 마중 나와 있었고, 마차에서는 에우독시아가 안토니나의 손을 잡고서 내리고 있었다.
“각하께서는 능력도 좋으시군.”
“사루스 제발 그 주둥아리 좀 다물어.”
두 여인의 눈이 마주치니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두가 긴장한 채로 둘을 바라볼 동안 유일하게 안토니나만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긴장되는 순간.
“말은 많이 들었는데···. 만나는 건 처음이죠?”
먼저 입을 연 쪽은 테르만티아였다.
“예, 만나서 반가워요.”
“저도 반가워요. 날이 추우니 자세한 건 안에서 이야기하실까요?”
“그,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입을 열자마자 두 여인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
본능은 어서 도망치라고 했지만, 내 이성은 단단하게 두 다리를 속박하고 있었다.
지금 도망친다면 잠깐은 편하겠지만, 앞으로의 일상이 굉장히 피곤하고 우울해질 터.
“자자···. 들어가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쭈뼛거리면서 두 여인의 손을 붙잡을 뿐이었다.
그러자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힝···. 나도 아빠 손···.”
안토니나는 그렇게 말하며 에우독시아와 내 사이에 끼어들더니, 그녀와 내 손을 잡으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테르만티아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겁이 나서 도저히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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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 관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시동부터 식사를 책임지는 요리사까지 건물 내의 모든 이들이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벌써 아이가 있을 줄 몰랐는데요.”
“저도 두 번째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두 번째라···.”
선공을 취한 건 에우독시아였다.
테르만티아는 한방 맞았다는 듯한 얼굴로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마리우스?”
“예?”
“잠시 저희 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럼 저야 좋죠.”
“그럼 필요하면 불러···.”
조심스럽게 안토니나의 손을 붙잡고 방을 빠져나왔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방문을 조심스레 닫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 엄마 화났어?”
“그런 것 같은데···.”
“아빠가 잘못한 거야?”
“음···.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아빠 혼나는 거야?”
“혼나겠지···?”
문득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안토니나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고 있는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게 느껴졌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었지.
인생에 실패는 있어도 포기는 없는 법이라고.
결국에는 모든 일이 다 잘 풀리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독재자요. 테르만티아 양의 아버님은 역사에 둘도 없는 독재자예요.”
“말이 조금 심하시다는 생각. 안 해보셨나요?”
“제 오라버니는 그날 비명에 돌아가셨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무래도 내 바람은 그저 바람이었던 모양이다.
안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에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큰 소리가 들리길래···.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그럴 리가요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데요···. 그렇죠?”
테르만티아의 말에 에우독시아는 미소로 화답했다.
“마리우스, 이리 와 봐요.”
“응?”
불러서 가긴 했는데, 한가지 고민이 있었다.
“뭐해요. 앉으세요.”
“그렇게 서 있으면 다리 아프겠어요.”
누구 옆에 앉는 것이 문제였다.
둘 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내심 자기 옆에 앉길 바라고 있겠지.
여기서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가는 로마보다 먼저 내 안락한 가정이 무너질 위험이 있었다.
“나도!”
잘했다 우리 딸.
위기에서 날 건져 올린 것은 안토니나였다.
열린 문틈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던 안토니나가 재빨리 뛰어와서 에우독시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최대한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테르만티아의 옆자리에 앉았고, 말이다.
에우독시아는 약간 서운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별건 아니에요. 둘이서 이야기 해봤는데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더라고요.”
밖에서 듣기론 전혀 아니던데.
“생각보다 잘 통하기는 했죠.”
“그래서 말인데···. 당신을 돌아가면서 쓰기···. 아니, 만나기로 했어요.”
방금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에우독시아는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고, 테르만티아는 성취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오늘부터요.”
이 이후의 일을 회상할 때, 고난의 행군이라고 되뇌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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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피곤해 보이십니다.”
“피곤하지···.”
일주일 동안 너무 바빴다.
낮에는 안토니나와 그동안 놀아주지 못했던 것까지 놀아줘야 했고, 밤에는 쉴 틈도 없이 부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인데.”
“스틸리코 장군께서 명령서를 보내셨습니다.”
“명령···? 무슨 내용인데.”
“카티우스와 아칸의 연관 점을 알아보고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카티우스랑 아칸···?”
둘이 연관이 있다고?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회의실에는 게르마니아 전역에 배치되어있는 로마군단의 군단장들이 모여있었다.
“각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됐어, 앉아.”
내 말에 다들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고, 나는 그런 참석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여러분을 여기로 모은 건 스틸리코 장군으로부터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지원군이 오는 겁니까? 이제야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겠군요!”
막시무스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회의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이에 가만히 듣고 있던 14군단장 베루스가 한마디 했다.
“아직 총독 각하께서 말씀하시기 전인데, 너무 흥분하지 맙시다.”
“으음···. 죄송합니다.”
“아쉽지만, 지원은 아닙니다.”
“지원이 아니라면 세금을 올려보내라는 독촉장이겠군요.”
“데키무스, 그것도 아니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사루스가 물었다.
“그럼 무엇입니까?”
“게르마니아 전임 총독 카티우스와 아칸과의 연관 관계를 조사해서 보고하라는데···. 뭐 아시는 것들 있습니까?”
내 말에 14군단장 베루스가 답했다.
“저는 이곳에서 13년을 복무했지만,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적도 없습니다.”
22군단장 막시무스 또한 답했다.
“저도 그 녀석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매번 얼굴을 맞대는 것은 그 녀석의 부하였지요.”
“맞습니다. 아마 이름이···. 니케타스였던가?”
“니케타스가 맞을 겁니다. 그놈이 내년 농사지을 종자까지 깡그리 긁어갔던지라 각하가 아니었으면 전부 굶어 죽을 뻔했습니다.”
“우리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정말 희대의 개새끼였습니다.”
점잖아 보이는 베루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개새끼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문제는 그 개새끼가 어디 있냐는 건데···.
“갈리아로 도망간 게 아니겠습니까?”
데키무스의 말에 사루스가 답했다.
“제 생각에는 배를 탄 것 같습니다.”
“배?”
“예, 많은 재물을 들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면 배가 제일입니다.”
“그래?”
막시무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모군티아쿰에서 주둔 중이던 함대가 얼마 전부터 안 보였습니다.”
“함대가?”
아직도 함대가 남아있긴 했구나.
“당시에는 라인강을 둘러보러 간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총독이 사라진 시기와 맞아떨어지는군요.”
“복귀했습니까?”
“아뇨, 몇 달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습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겁니까.”
내 질책에 막시무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저 정찰이 오래 걸리는 줄 알고···.”
“생각보다 일이 커진 것 같습니다. 제국함대가 전임 총독을 따른다는 게 아닙니까?”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거기에 아칸이라면···.”
“아직도 살아있다니···.”
스틸리코가 아칸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돌아가는 일이 심상치가 않았다.
조용히 회의를 지켜보던 세르비우스가 말했다.
“카티우스가 아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동안의 착취가 말이 되는군요.”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아칸이 지난 반란 이후에 몸만 건사해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세르비우스는 숨을 고르고는 다음 말로 회의장을 뒤집어 놨다.
“아칸은 어디 있을까요?”
“그거야 당연히···.”
카르타고라고 말하려는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듯이 머리가 울렸다.
그리고 내 생각을 되짚어봤다.
왜 카르타고라고 생각한 거지?
스틸리코가 보여줬던 화물선은 카르타고로 향하고 있었고, 아칸 또한 카르타고를 자주 언급했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면.
그 의심 많은 사람이 카르타고라는 중요지점을 노출할 리가 없었다.
만약, 정말 만약에 아칸이 카르타고를 강조했던 게 그쪽으로 시선이 쏠리게 하기 위함이었다면?
“카르타고···. 카르타고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이 어디가 있지?”
“카르타고에서 배를 타면 제국 전역으로 갈 수 있지요.”
“이런 씨발···.”
아칸에 있어 카르타고는 스쳐 지나가는 장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제야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