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로가 당황했다.
“마리우스 님이 중간에서 빼먹을 분은 아니십니다!”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아마도 전임 총독이었던 카티우스 그놈이 챙긴 것이겠지.”
“그럼 북아프리카 속주는 어떻게 된 겁니까?”
“뻔하지, 아칸 그놈이 카르타고로 간 것이야.”
아칸.
그가 바다 건너에 있었다.
북아프리카 속주와의 연락은 끊긴 지 오래였고, 총독 또한 소식이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이 말하는 것은 하나였다.
스틸리코는 서류에 적힌 마지막 이름에 표시하면서 말했다.
“마리우스가 제법 재밌는 걸 알려줬어 안 그래?”
“으음···. 이게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귀족들과 유력자들을 전부 적으로 돌리는 게 아닙니까?”
“적이라···. 자네는 그들이 내 적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스틸리코와 눈이 마주친 폴로는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그래도 어둠 속에서 찌르는 비수를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엔 놈들이 가진 게 너무 많아. 잃을 게 많을수록 행동은 굼뜨고 느려지지.”
“그렇군요···. 실언이었습니다.”
“아닐세, 지금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어. 야만인들이 조용한 틈을 이용해서 정예군단을 재건하고, 아칸을 토벌해야 하네.”
“듣기만 해도 정신없이 바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서 북방으로 마리우스를 보낸 것이야.”
“예?”
폴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그게 왜 마리우스 님과 연결되는 것입니까?”
“북방이 너무 조용해, 그곳의 총독과 군단장들이 황도가 공격당했다는 소식에 가만있을 리가 있겠나?”
“아···. 장군께서는 그들이 들고 일어날 거라고 보시는 거군요.”
“그래, 마리우스라면 어떻게든 해주겠지. 그동안 우리는 북아프리카를 되찾고, 아칸을 처단하다.”
“겸사겸사 정예군단도 재건하고 말입니까?”
“바로 그거지.”
“결국, 모든 건 마리우스 님이 얼마나 잘 버텨주냐의 문제로군요.”
폴로의 말에 스틸리코가 웃으면서 말했다.
“버텨? 글쎄···. 그 친구라면은 전부 부숴버리지 않을까 싶네만.”
“설마요···. 차라리 야만인들과 형제를 맺는 게 더 현실성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하하하.”
스틸리코와 폴로가 웃었다.
그들 곁에서 묶여있던 귀족들은 웃지 못했다.
******
일행의 순방은 강을 타고서 게르마니아 최남단인 아르젠토라툼과 그곳에 배치된 14군단까지 돌아본 뒤에야 끝이 났다.
아르젠토라툼에서 제법 풍족한 접대를 받고,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금까지 두둑하게 받은 마리우스의 모습은 한층 거만해져 있었다.
“아빠!”
“이런 곳에서 당신을 만나네요.”
“아, 아일라.”
아그리피넨시스로 가는 길에 우연히 에우독시아의 일행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도에서 딱 마주쳐버린 상황에서 마리우스의 머리는 전쟁터에서 싸울 때보다도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신이 마중 나왔을 리는 없고···.”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당신이랑 안토니나를 마중 나왔지!”
“그래요?”
“그럼! 그렇지 데키무스?”
화살을 데키무스에 돌렸다.
데키무스는 얼굴 한번 변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마리우스 님이 영부인을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렇지 사루스?”
“저 여자가 누군···. 컥.”
“말조심해, 각하의 ‘첫 번째’ 부인이시다!”
“재밌네요.”
데키무스의 말에 에우독시아가 미소를 지었다.
안토니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좋았는지 품에 안겨서 쉴 틈 없이 조잘대고 있었다.
“아빠, 그런데요. 황제 폐하가요.”
“응? 꼬맹···. 황제 폐하가 왜?”
“아빠가 그랬다고 하면서요 우리 집에 수레를 가져와서,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갔어요!”
“음···?”
꼬맹이가 드디어 정신이 나가버린 것인가?
왜 멀쩡한 남의 집을 터는 것이지?
이런 생각이 들 때쯤에 에우독시아가 내게 말했다.
“듣자 하니, 당신이 황제 폐하께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필요한 만큼 쓰라고 하셨다면서요.”
“아···. 그랬던가···?”
꼬맹이와 나눈 수많은 대화 중에 그런 대화를 하였는지 생각해봤지만, 잘 기억나질 않았다.
“그런데 뭘 사길래 수레로 창고를 털어가는 건데?”
“도서관이요.”
“도서관?”
그 호노리우스가 도서관에 관심을 가진다니, 미래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법한 말이었다.
나도 그랬고 말이다.
“그럴 리가 있나, 매일같이 노는걸 더 좋아하시는 게 폐하인데.”
“아버지에게 듣기로는 페테르 대왕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그러신다던데요.”
“페테르···?”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 몰랐다.
분명, 처음에 이야기할 때는 위인전 읽어주듯이 가볍게 이야기 한 것이었는데, 호노리우스는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에 그렇게 큰돈을 후원할 도서관이 있었습니까?”
“아뇨, 콘스탄티노플이 아니에요.”
“거기가 아니라고? 그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하나 있었다.
설마, 아닐 거다.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은 분명 카이사르의 침공으로 활활 불타올랐다고 배웠는데···!
“아이깁투스의 알렉산드리아에요.”
“알렉산드리아···?”
이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챙긴다는 건가, 꼬맹이의 취미생활을 위해서 내 피 같은 돈이 희생되고 있었다.
눈물이 절로 났다.
******
“오늘은 여기까지예요. 궁금한 점 있나요?”
강단에 선 여인의 물음에 학생들은 입을 다문 채로 초롱초롱하게 여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없는 모양이로군요. 다들 편히 쉬시고 내일 봐요.”
“감사합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수많은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강단에 서있던 여인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강의실을 정리했다.
“히파티아.”
“아빠.”
히파티아라고 불린 여인이 늙은 아버지에게 다가가 안겼다.
아버지는 딸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강의는 다 끝난 모양이구나.”
“예, 오늘 저녁은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난 괜찮단다. 오늘 저녁에는 다른 분들과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또 술 드시는 거예요?”
“술이라기보다는 세월을 나누는···.”
“이제 나이도 나이신데 건강도 신경 쓰셔야죠.”
테온은 히파티아의 잔소리에 껄껄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히파티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자 그제야 테온이 당황하며 말했다.
“히파티아, 그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마.”
“알아서 하세요.”
“정말이란다. 내 신에 맹세코 일찍 들어오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이번 한 번만 더 속아볼게요.”
“허허허···.”
두 부녀는 강의실을 나와 도서관을 거닐었다.
넓은 도서관 이곳저곳에서는 수많은 노예 들과 학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도서관에 있는 장서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히파티아가 굳은 얼굴로 테온에 물었다.
“아빠, 도서관을 후원해줄 사람은 구해보셨어요?”
“으음···. 일단 도시의 유력자들이 후원해준다고는 했지만, 턱없이 모자라는구나···.”
“연구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연구도 연구지만 돈이 없어서 장서들을 관리하는 노예들을 크게 줄였단다.”
“어디서 뚝 하고 후원자가 떨어졌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총독께서 힘쓰고 있으시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좋은 소식이 들릴게다.”
부녀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도서관의 입구로 걸어가니, 그곳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그러게 말이다.”
히파티아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히파티아 교수님?”
“아가톤?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아, 지금 황제 폐하께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칙서를 보내셨다고 해서 구경 중이었습니다.”
“칙서?”
히파티아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살펴봤다.
그곳에는 몇몇 병사들과 그들을 이끄는 것으로 보이는 백인대장이 큰 소리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이 도서관의 관계자는 어디 있나!”
“제가 관계자예요.”
“자네가···?”
백인대장은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히파티아의 모습에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묘한 눈빛을 보냈다.
“저는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니 관계자라고 할 수 있죠.”
“황제 폐하께서 이 도서관을 후원하고자 하니, 필요한 것이 생기시면 총독부에 있는 친위대를 찾으십시오.”
“예···? 황제 폐하께서요?”
“정확히 말하자면, 마리우스 경께서 황제 폐하를 설득하셨다고 하더군요.”
“예?”
“저는 다 전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백부장은 병사들과 함께 검은 망토를 펄럭이면서 사라졌다.
“마리우스는 또 누구지···?”
라인강의 수비 - 7
아그리피넨시스로 가는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에우독시아는 테르만티아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여서 더 미안하고 두려웠다.
차라리 나를 원망하거나 욕이라도 했으면, 마음이 좀 풀렸을 텐데 에우독시아는 내게 원망조차 없었다.
헤어지던 그때처럼 웃으면서 나를 챙겨줄 뿐이었다.
“당신, 뭘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으음? 그냥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지 뭐···.”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다 잘될 거에요.”
“아일라···.”
나를 위로해주는 그녀의 모습에 감동하였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손을 붙잡으려니,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각하, 사람들이 다 보는 장소에서 그런 짓은 조금 자제를···.”
“데키무스, 각하의 일을 방해하지 마라.”
분위기 괜찮았는데···.
아쉬움에 에우독시아를 돌아보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으로 데키무스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일라?”
“부르셨어요?”
“아니 조금 전에 데키무스를···.”
“춥네요.”
“응?”
“겨울이오는지 슬슬 날이 춥네요. 아버지가 먼 길 가는 데 힘들이지 말라고 마차를 주셨는데···.”
에우독시아가 가르친 손끝에는 길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마차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안에서 이야기해요.”
“그거 좋지, 안토니나도···?”
에우독시아가 나를 붙잡았다.
“안토니나는 데키무스 경과 여기 계신 분이 잘 돌봐주실 거에요. 맞죠?”
“다, 당연하지요.”
“데키무스 눈치가 늘었군.”
“닥쳐.”
티격태격하는 둘을 뒤로한 채, 에우독시아의 손길에 이끌려 마차로 향했고, 아그리피넨시스에 도착할 때까지 후계문제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눠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