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키무스가 나가고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막시무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원래 친위대에서 복무하던 친구인데, 국경은 처음인지라 실례를 했습니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죽은 아들놈처럼 말하던 사람을 만나니 아들놈이 생각나는군요.”
“아드님 말고 다른 가족은 없으십니까?”
“있긴 합니다. 하지만 안 본 지가 제법 오래되어서 가끔 소식을 주고받는 정도입니다.”
“힘드시겠군요.”
“이제는 이곳의 시민들과 병사들이 제 가족이나 마찬가지지요.”
막시무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야만인들과 교류하다 보니 이런 모습이 된 거로군요.”
“예, 저들의 왕도 만나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는 합니다.”
“왕이요?”
“아, 지금 강 건너에는 자기들을 프랑크라고 부르는 게르만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왕을 뽑아서 다스리게 하더군요.”
“지금 프랑크라고 하셨습니까?”
사루스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막시무스는 갑자기 끼어든 사루스의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고, 말이다.
“자네는 누구기에 대화에 끼는가?”
“저는 고트족의 위대한 전사이자 마리우스 각하의 휘하에 있는 사루스라고 합니다.”
“사루스라···. 거기에 고트족?”
막시무스는 내게 시선을 던졌다.
마치 설명해달라는 듯이 말이다.
“지난 메디올라눔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해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메디올라눔에서 전투가 있었다고요?!”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황제 폐하는 무사하십니까?”
“예, 황제 폐하께서는 잠시 일이 있으셔서 동방에 가 계십니다.”
“그건 다행이로군요.”
잠시 호들갑을 떨던 막시무스가 안심된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아무튼, 그 전투에서 메디올라눔을 공격하던 것이 라다가이수스라는 야만인이 이끄는 일곱 부족의 연합군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였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늦은 저녁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이 흘러갔다.
나이 차이가 제법 많이 났고, 군대에서 보낸 세월도 차이 났지만 군대라는 공통점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이곳의 잠재적인 문제점들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예, 사실 이제 슬슬 한계점이었습니다. 프랑크 인들에게서 강철을 사 오려면 식료품이나 공업품이 필요한데, 전임 총독 놈이 하나도 남김없이 긁어가 버리는 탓에 올해는 거래조차 못 했습니다.”
“으음···. 돌아가면은 최대한 강철을 모아서 보내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다들 군역을 피하려고 하는지라 부대원이 모자랍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22군단의 일은 다키아 3군단이 대체할 것이니, 당분간은 아그리피넨시스에서 병사들과 편히 쉬시지요.”
하지만 막시무스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열여섯에 군에 들어와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이 나이까지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고, 그중 20년을 여기서 보냈으니 죽을 때도 여기서 죽겠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계속 계시겠다는 것입니까?”
“어차피 병사들 또한 비슷한 생각일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판노니아에서 근무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안전한 후방으로 빠지고 싶어서 자기 엄지손가락을 자르는 미친놈들이 수두룩했는데, 정작 그곳보다도 더 최악인 이곳에서는 남겠다니?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장군, 이런 가혹한 최전선보다는 안전한 후방이 더 좋지 않습니까?”
“가혹하다니요.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이미 이곳은 우리의 고향입니다.”
막시무스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막시무스는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마치 멀리 있는 길을 걸어온 나그네가 그루터기에 앉아 돌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그 또한 최전선에서 군 생활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시다면야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병사들은 되는대로 징집해서 보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그거 듣던 중에 반가운 소리로군요. 햇병아리여도 상관없으니 머릿수만 채워주십시오.”
“최전선으로 보낼 군대인데 햇병아리를 보내서야 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본적인 교육은 제가 하겠습니다.”
“이번 총독께서는 지난 총독보다 말이 잘 통해서 아주 좋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밤이 깊을 때까지 술잔을 기울이고 밖으로 나오니 오들오들 떨고 있는 데키무스의 모습이 보였다.
“가, 각하.”
“데키무스?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나?”
“가, 각하께서 기···. 기다리라고 하셔서···.”
“아이고···. 이런···.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막시무스가 붙여준 백인대장의 뒤를 따라갔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들판에서는 갑옷을 벗어 던진 병사들이 열심히 농작물을 수확하고 있었다.
다들 지친 모습이었지만, 수확물을 보면서 힘을 내는 듯했다.
그렇게 복층구조의 오두막에 도착하니, 따뜻한 집이 우리를 반겨줬다.
“쯧쯧쯧···. 자네는 어떻게 요령이 없나, 적당히 오래 걸리겠다 싶으면 잠시 몸을 피해있어야지.”
“각하의 곁을 지키는 게 제 업무 아니겠습니까.”
“그러려면 자네의 몸은 언제나 최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
더 말해봤자 입만 아팠다.
이런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모습 때문에 곁에 둔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아무튼, 몸조심해. 폴로처럼 쓸데없이 나대다가 다치지 말고.”
“하하하, 폴로는 메디올라눔의 영웅이잖습니까, 그 정도면은 영광의 상처라고 할 수 있지요.”
“영광? 그런 건 다 쓸모없어. 살아나야지 우선 살아남아야 영광이 따라오는 거야.”
“그런 것 치고는 각하께서는 항상 최선두에서 적과 싸우시지 않습니까?”
“그거야 버릇이 잘못 들어서 그래. 이제 고쳐야 하는데 잘 안되더라고.”
진짜다.
난 언제나 냉정하게 전장을 관찰하면서, 스틸리코처럼 근엄하게 있으려고 했다.
다만, 전장에 서는 순간부터 이성이 날아가서 정신을 차렸을 때쯤이면 이미 적진 한복판 이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모군티아쿰의 병사들을 보니, 다들 하나같이 일과가 끝나고는 농사를 짓고 있더군.”
“예, 다들 근무가 끝나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걸 게르마니아 전역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글쎄요···. 병사들이 근무도 힘든데 농사를 지으려고 하겠습니까?”
데키무스는 영 탐탁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저희도 싸움이 끝나고서야 농사를 짓지, 농사와 싸움을 같이 하는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사루스도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들어보게, 병사들의 급료는 몇십 년째 동결된 상태야 들어오는 돈은 적은데, 들어오는 족족 장비값과 기타 생활비로 빠져나가니 생활이 힘들지.”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들 병역을 피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일과시간이 끝난 병사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는 거야.”
“그 땅에서 나온 수익을 일정 부분 세금으로 걷으시려는 겁니까?”
“바로 그거지, 거기다가 가족들까지 같이 살게 해서 병사수급도 원활하게 하고, 보급 부담도 줄일 수 있는 데다가 군대가 오래 주둔하니 주변에 시민들도 모여들 것 아니야.”
“괜찮은 것 같습니다만, 경작지를 소유한 병사가 죽게 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데키무스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냥 자식들한테 물려주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그 땅은 개인의 소유가 되겠군요.”
“그렇지.”
“언뜻 보면 좋아 보이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무슨 문제.”
언 몸이 좀 녹았는지, 데키무스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당장 떠오르는 건 하나입니다. 당장만 해도 병사들이 군사훈련을 받기 싫어하는데, 농사까지 짓게 된다면 돈도 잘 안 나오는 군사훈련보다는 농사에 집중하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사루스도 한마디 보탰다.
“맞습니다. 잘 벼려진 검은 잘 관리해줘야 날카로움을 잊지 않는 법입니다. 무뎌진 검으로는 무엇도 벨 수 없습니다.”
“흠···. 그렇군.”
“각하께서 생각하신 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미래에 생길 부작용을 생각하면 안 하느니만 못합니다.”
데키무스의 말을 듣고서 잠시 고민했다.
나름대로 들판에서 농사를 짓는 병사들을 보니, 아그리피넨시스에서 빈둥거리는 병사들을 써먹을 방법을 떠올린 것인데, 부하들이 반대했다.
반대로 둘의 말을 듣고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장 나라가 휘청거리는 상황인데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 현재가 힘든데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각하, 지금이 힘들다고 미래를 포기하면···.”
“아니, 데키무스 포기가 아니지.”
“예?”
“우리 선대들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더 후대로 넘기는 과정이라고 해주게.”
“예···?”
데키무스와 사루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중에 똑똑한 놈이 알아서 잘 뜯어고쳐서 해결하지 않을까?”
라인강의 수비 - 6
다음날.
모군티아쿰 시민들의 환대와 22군단 병사들의 사열을 받으면서 주둔지를 떠났다.
막시무스는 전날 약속했던 지원을 꼭 기억해달라면서 마지막까지 부탁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번 한 약속은 잘 지키는 편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신병만큼은 꼭 보내주십시오.”
“정 안되면 제 휘하의 게르만 병사들을 보내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보시죠.”
말을 몰고서 모군티아쿰을 떠났다.
라인강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서, 강가를 따라서 늘어져 있는 라임과 그에 속한 요새들을 돌아보면서 방어선을 점검했다.
지난번 스틸리코 장군이 방문했던 덕분인지 생각보다 요새들의 준비가 충실했다.
몇몇 요새에서 병사들의 근무 태만을 지적한 것 외에는 대부분 준수했다.
“라인강의 방비가 생각보다 튼튼하네?”
“듣자니 올해는 야만인들이 강을 넘은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것참 별일이군.”
나와 데키무스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사루스를 바라봤고, 사루스가 움찔거리면서 말했다.
“왜 저를 보시는 겁니까.”
“혹시 아는 거 없나?”
“뭐가 말입니까.”
“강너머 야만인들이 조용한 이유 말일세.”
“그거야 뭐···. 아래쪽이···.”
사루스가 말끝을 흐렸다.
“제대로 말해보게, 뭐라고?”
“제가 알기로는 알라리크와 라다가이수스의 휘하에 여러 부족이 연합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들이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아···. 그렇군.”
사루스의 말을 들으니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물었다.
“그럼 몇 년간은 야만인들이 조용하겠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알라리크나 라다가이수스에 합류한 게르만족들은 고트, 수에비, 반달 등이 주류였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부르군트, 프랑크, 앵글로색슨 같은 녀석들은 합류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으음···. 그럼 저들이 라인강을 넘어오지 않은 것은···.”
“아마도 서로 간에 세력을 확장한다고 그럴 것입니다.”
“끙···. 그럼 다음에 몰려올 때는 질리도록 몰려올 수도 있다 이 말인가?”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미치겠군.”
가만히 듣고 있던 데키무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각하, 스틸리코 장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원은 무슨···. 방해나 안 하면 다행이지.”
“예?”
“그 양반도 지금 굉장히 바쁠 거야, 우리한테 신경도 못 쓸 정도로 말이야.”
“수도에서 그럴 일이 있습니까?”
고개를 돌려 메디올라눔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니,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간질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지, 그래도 일이 벌어졌다면 그냥 끝나지는 않을 거야.”
******
마리우스의 말대로였다.
메디올라눔에서는 피의 숙청이 일어나고 있었다.
야만인들을 피해서 도시를 잠깐 떠났던 귀족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스틸리코와 그가 이끄는 친위대였다.
“다들 오랜만입니다.”
갑작스럽게 스틸리코를 만난 대부분 귀족은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장군께서 마중을 나오실 줄 몰랐습니다.”
“하하하···. 먼 곳에서 오시는데 당연히 마중 나가야지요.”
“그럼 저는 이만···.”
“잠깐,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서 문제 생긴 것은 없는지 확인을 해야지요.”
“클라우디우스 퀸틸루스.”
갑자기 스틸리코가 이름을 불렀다.
움찔한 귀족은 스틸리코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십니까.”
“퀸틸루스, 자네를 적전 도주 및 직무유기, 횡령 등의 혐의로 체포하겠네.”
“예? 그게 무슨···.”
“잡아.”
친위대 병사들이 자신을 붙들 때까지 퀸틸루스는 연신 스틸리코와의 오해를 풀려고 했다.
“장군, 뭔가 오해하신 모양인데···. 그때는 다들 제 목숨 살리려고 황도를 빠져나가던 때가 아닙니까? 장군? 장군!!!”
하지만 스틸리코는 끌려가는 그에게 눈길 한번 비추지 않고 곁에 있는 폴로에 물었다.
“다음은 누구지.”
“치안 관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입니다.”
“리키니우스면 아칸 쪽인가?”
“예, 최근까지도 아칸과 선이 닿아있는 모양입니다.”
스틸리코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마리우스의 말을 들을 것을 그랬어.”
“뭐가 말입니까?”
“아칸 녀석을 진작에 쳐냈어야 했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거물이었어.”
“그래도 놈을 쫓아냈으니 다행 아닙니까.”
“아니, 최근에 중앙으로 올라오는 세수에 문제가 생겼어.”
“무슨 문제 말입니까?”
“북아프리카, 게르마니아에서 들어오는 세금이 뚝 하고 끊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