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52/187)

******

처음에는 걱정도 앞섰지만, 게르만 병사들은 생각보다 성실하고 믿음직했다.

다만,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내 주변을 둘러싸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병사들이 들고 있는 날카로운 창끝이 나를 향할 것 같아 조금 긴장됐다.

“사루스, 병사들보고 행군대형으로 바꾸라고 하면 안 되겠나?”

“안됩니다. 이곳은 언제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곳입니다. 각하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이래서야 한 달은 걸리겠어.”

“그래도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각하께 문제가 생기면···.”

사루스의 얼굴은 사뭇 비장했다.

그래서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어휴···. 그래도 적당히 해 그러다가 지쳐서 싸우지도 못하겠어.”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요 며칠간 푹 쉬었더니 힘이 넘쳐납니다.”

“그래···.”

나도 포기했다.

옆에 있던 데키무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게르만 병사들이 생각보다 충성심이 깊은 것 같습니다. 각하.”

“저희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입니까?”

사루스의 태도가 참으로 뾰족했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각하와 자네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이려고 싸우던 이들이 아닌가?”

데키무스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맞받아쳤다.

“그건 나도 좀 궁금하군, 솔직히 나는 자네들의 마을을 때려 부수고 가족들을 죽이지 않았던가.”

나도 궁금했다.

왜 이 녀석들은 나를 따르는 거지?

이에 사루스가 대답했다.

“각하께서 우리의 가족들을 죽이시고 마을을 불태우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라다가이수스의 탓입니다.”

“라다가이수스의 탓이라?”

“예, 대족장이라는 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전장에서 가족을 잃은 것일 뿐입니다. 물론 병사 중에서도 각하를 원망하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전쟁 중에 벌어진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자네들의 충성심에 의혹이 있는 건 사실이네.”

데키무스가 사루스의 말을 끊었다.

“자네들은 잊었다고 하지만, 원한은 가슴속에 묻어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에케하르트!”

사루스의 부름에 한 병사가 뛰어왔다.

병사의 앞에선 사루스가 말했다.

“이 친구는 지난 전투에서 젖먹이 아들과 늙은 부모를 잃은 친구입니다.”

“안된 일이군.”

“충성심을 증명하라고 하셨지요? 하겠습니다.”

사루스가 병사와 눈을 마주치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는 이에 눈을 감고서는 몸을 떨면서 검을 뽑아 들고 목으로 가져다 댔다.

“잠깐!”

“왜 그러십니까.”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충성심을 증명하라고 하셨잖습니까, 부대는 언제나 제 통제하에 있다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알았어, 자네 충성심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네. 그러니 그만해.”

잠시 데키무스를 한번 노려본 사루스가 병사의 칼을 뺏어 내게 걸어오더니, 무릎을 꿇고서 두 손으로 공손히 검을 바쳤다.

“각하와 우리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우리가 로마에서 살아가려면 각하가 필요하고, 각하께서도 우리 힘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말없이 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내 검집을 풀어서 그에게 건넸다.

“그래, 믿겠다.”

“저도 믿겠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서 데키무스에 물었다.

“이제 됐어, 우리가 처음으로 갈 곳은 어디지.”

“22군단의 본부가 있는 모군티아쿰입니다.”

“최전방? 갔다가 화살 맞는 거 아니야?”

“그럼 다른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사루스가 있는데 그럴 리가 있나.”

내 말에 사루스의 굳은 얼굴이 조금은 펴지는 듯했다.

“지금 22군단장이 누구였지?”

“플라비우스 막시무스라고 20년 동안 복무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20년을 여기서 근무했다고?”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이 험난한 북방에서 20년이나 근무하면서 라인강을 지키고 있었다니, 그러면서도 역사에 이름한 줄 남지 않았다고?

뭔가 역사 속의 숨겨진 명장을 만나는 기분이 들어 피가 끓어올랐다.

“오늘 안에 모군티아쿰으로 갈 방법은 없겠나?”

“없습니다.”

“있습니다.”

사루스와 데키무스의 의견이 엇갈렸다.

의견이 엇갈린 둘을 서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거리를 어떻게 반나절 안에 가겠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건 로마의 방식이라 그런 것입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반나절은 무리겠지만 내일 새벽녘쯤에는 도착할 수 있습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관심을 보이니 사루스가 말을 이어갔다.

“예, 날렵하고 튼튼한 배를 준비한 다음에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겁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가는 길에 절반은 지쳐서 쓰러지고, 나머지 절반은 물에 휩쓸리겠지.”

데키무스는 시종일관 비관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사루스는 덤덤하게 맞받아쳤다.

“아닙니다. 슬슬 가을이 끝나가는 이때쯤이면 강물이 거칠지 않고 잔잔한 편입니다. 별다른 수고 없이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으음···.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긴 하군···. 그런데 그런 사실은 어떻게 안 건가?”

데키무스의 말에 조금 전까지 덤덤하던 사루스가 당황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그, 그것은 사냥감을 쫓다 보니···.”

“쯧쯧···. 한두 번 넘어온 게 아닌 모양이었군.”

“...죄송합니다.”

“다 옛날 일이 아닌가, 덕분에 빠른 길도 알게 되었고 말이야.”

“뭐···. 그렇습니다.”

데키무스는 영 탐탁지 않다는 모습이었지만, 마지못해 내 의견에 동조해줬다.

사루스는 여전히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사루스, 사나이가 과거일 적에 연연해서 되겠나? 걱정하지 말게, 나는 자네의 과거에는 관심 없어 그러니 가서 배나 알아보게.”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병사들을 동원하면 금방 만들 수 있습니다.”

“만든다고···?”

배라는 게 원래 그렇게 뚝딱하고 만들 수 있는 물건이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본인이 만들겠다는데 뭐 어쩌겠나.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이곳에서 멈춰서야겠군.”

“천막을 칠까요?”

“일하고 나서 병사들이 쉴 곳이 필요하겠지···. 좋아, 그리고 취사병들에게 식사도 준비하라고 전해.”

“예, 장군.”

******

다음날 점심쯤이 되어서야 모군티아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군티아쿰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못해도 아그리피넨시스에 버금가는 도시쯤을 생각하고 왔는데, 정작 눈에 보인 것은 전형적인 중세마을이었다.

“이게 뭐야···.”

마을 주변에는 석재로 단단하게 성벽을 세워두었지만, 마을 내부의 길은 진창길로 질척거리고 있었다.

성벽 주변에 있는 집들의 모양이나 군 주둔지의 모습은 로마식에 다른 게 섞여 들어가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마을을 바라보고 있으니, 성벽 위에서 멀뚱거리던 경비병이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십니까···?”

“여기가 모군티아쿰이 맞나?”

“예, 모군티아쿰입니다.”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르군···.”

병사들의 무장이나 장비, 시민들의 모습까지 전부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로마 마을이라기보다는 문명화된 게르만 마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자네는 22군단 소속인가?”

“어···. 맞을 겁니다.”

“맞을 겁니다? 자네 소속도 모르나?”

“아이고···. 나으리 이놈이 신병이라 아직 어리숙해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곁에 있던 한 병사가 다른 병사를 밀치면서 내 앞에 섰다.

“후···. 막시무스는 어디 있나?”

“막시무스라고 하시면···?”

“군단장 말이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금방 사람을 보내서 알리겠습니다. 그런데 누구라고 전할까요···?”

“게르마니아 총독이라고 전해.”

“초, 총독 각하···. 예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앙다물어진 굳은 입과 또렷한 두 눈이 인상적인 노장이 왔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22군단장 플라비우스 막시무스. 맞습니까?”

“예, 접니다.”

“이번에 새로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부임한 가이우스 마리우스라고 합니다.”

“총독이라···. 전임자분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저도 별다른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쯧···. 그 개새끼는 내 손으로 찢어 죽였어야 했는데 말이야.”

막시무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예?”

“혼잣말입니다. 날이 추워졌으니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성문을 열어라!”

막시무스의 말과 함께 성문이 열렸고 일행은 성안으로 들어갔다.

라인강의 수비 - 5

쌀쌀했던 바깥과는 다르게 건물 안은 무척이나 온난하고 따뜻한 것이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대부분 가벼운 차림이었다.

마리우스가 권한 상석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노예가 다가와 잔에 뜨거운 물을 따라줬다.

“이곳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따뜻한 물을 들이고는 합니다.”

“그렇습니까?”

한잔 가볍게 들이키고서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막시무스에게 물었다.

“이곳은 다른 곳과는 조금 다르더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로마에 있다기보다는 저 강너머에 있는 야만인들의 마을에 온 기분이었습니다.”

내 말에 막시무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래도 또 말을 잘못한 모양이었다.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물론 나쁜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지역에 맞는 방식이라 생각해 신기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시군요···. 하긴 제가 이곳에서 근무하는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에는 로마의 방식대로 주둔지를 지었다가 큰 낭패를 겪었지요.”

“낭패라면?”

막시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고된 한숨 소리였다.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는 이미 야만인들의 세상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로마의 속주였지만, 정작 살고 있던 것은 야만인들이었지요.”

“어허···.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 있더군요. 그래서 처음 부임한 이래로 3년간은 야만인들과 끝없이 싸웠습니다.”

막시무스는 뜨거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서는 입가에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말을 이었다.

“그때, 제 아들놈을 전쟁 중에 잃었습니다.”

“저런.”

“그리고 그때 주변을 둘러보니 알겠더군요. 가족을 잃은 병사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잠깐만, 그럼 3년 동안 지원도 못 받으신 겁니까?”

“지원은 무슨! 총독이라는 놈들은 항상 우리의 지원요청을 무시했고, 중앙으로 보내는 편지들도 하나같이 쳐냈어!”

막시무스는 굉장히 흥분한 듯 보였다.

잠시 씩씩거리던 막시무스가 이내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갑자기 소리쳐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저라도 화가 났을 겁니다.”

“이해해주니 고맙습니다. 나이를 먹다 보니 가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곤 합니다.”

“그러시군요···.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뒤로는 강 건너의 야만인들과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교류요?!”

가만히 듣고 있던 데키무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적과의 내통은 반역행위입니다!”

“데키무스. 소란 떨지 말고 앉아.”

“장군, 아니 각하! 저 야만인들과 교류하는 것은 이적행위입니다.”

“자네 지금 이적행위라고 했나?”

막시무스의 눈이 서슬 퍼렜다.

데키무스를 바라보는 눈빛은 수십 년을 전쟁터에서 보낸 사람답게 흉흉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20년 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적들에게 한 치의 땅도 내어준 적이 없네, 그런데 이적행위라고?”

“적과 교류하는 것이 이적행위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내 아들놈도 자네처럼 말하고는 했지···. 그놈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조금 전에 설명해줬을 테고 말이야.”

“그래도 적과의 교류는···.”

“데키무스, 잠시 나가 있어.”

“각하, 하지만···.”

“나가 있으라고 했다. 이 일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

“명을 따르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