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르마니아로 향하는 가도.
한적했던 가도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행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발맞춰서 행군하는 병사들의 뒤로 지난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이제는 로마의 시민이 된 야만인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이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 어마어마하네.”
“시민들과 병사의 가족들까지 10만에 가까운 일행입니다. 당연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지요.”
담담하게 설명하던 데키무스를 한번 노려봤다.
데키무스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곁에 있는 세르비우스에 말했다.
“세르비우스, 나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게르마니아까지 오게 돼서 미안합니다.”
“어쩌겠습니까, 시키면 따르는 것이 군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총독께서 병사들의 편의를 봐주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가족과 생이별하는 건 막아야지 않겠습니까, 제 가족을 부르는 김에 겸사겸사 한 일입니다.”
“그래도 감사해야 할 일인 건 맞습니다.”
세르비우스는 고개를 돌려 행군 중인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게르마니아에서 근무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저도 게르마니아는 처음입니다.”
“듣기로는 야만인들이 수시로 국경을 넘어오고, 숲이 끝없이 늘어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또 야만인과 싸울지도 모르겠군요.”
내 말에 데키무스가 물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크게 깨졌는데 또 오겠습니까?”
“데키무스. 자네는 모를 거야.”
“뭐가 말입니까.”
고개를 돌려 세르비우스와 눈이 마주치니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가 판노니아에서 근무하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던가?”
“폴로 경이 몇 번 들려주기는 했습니다.”
“그때는 아침 먹고 야만인들과 싸우면 저녁쯤에 못 보던 놈들이 몰려와서 또 싸웠어.”
내 말에 데키무스가 당황하며 물었다.
“그 정도입니까?”
“판노니아는 최전선이라 그런 것이고, 다키아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쯤은 왔던 것 같군요.”
“그래서 최전방의 병사들이 기를 쓰고 후방으로 가려는 게 아니겠나.”
데키무스는 제법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잔뜩 굳은 얼굴은 좀처럼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데키무스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자네 말대로 이번에 크게 이긴 거로 당분간은 조용할 테니까.”
“당분간은 말이로군요···.”
세르비우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라다가이수스 그놈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데키무스가 대답했다.
“제가 마지막으로 본건, 광장에서 채찍을 맞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럼 죽었겠군요.”
“그럴만하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들 하시나요?”
테르만티아였다.
새하얀 백마를 타고 언덕을 올라오는 테르만티아의 모습에 데키무스와 세르비우스는 황급히 자리를 비켰다.
“저는 대열을 점검하러 가보겠습니다!”
“흠흠···. 저는 보급 수레들을 점검하러 이만···.”
“다들 어디 가십니까!”
비겁한 배신자들 같으니!
돌아오라고 몇 번이나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데키무스와 세르비우스는 이미 멀어진 뒤였다.
“어디 계셨던 거에요, 한참 찾았잖아요.”
“차, 찾으셨다고요?”
이 여자가 왜 나를 찾는다는 말인가.
이제 부부이니 찾는 게 맞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에우독시아 하나로도 벅찬데, 이제는 테르만티아까지 있으니 참으로 머리가 아팠다.
“별건 아니고, 얼굴이나 보려고 했죠.”
“아, 예···. 그···.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지요?”
“다른 분들이 편의를 봐주셔서 괜찮아요.”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는 말이 뚝 하고 끊겼다.
할 말이 없으면 그만 가보면 될 것인데, 테르만티아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더 할 말이라도···?”
“우리가 할 말 있어야 만나는 사이인가요···?”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하하하···. 계속 보고만 있기에 가슴이 두근거려서 말이 헛나온 모양입니다.”
“그러시구나~”
테르만티아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
제법 오랜 시간을 길에서 보내고 나서야 게르마니아의 아그리피넨시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그리피넨시스는 처음 생길 때부터 로마의 식민지였던 탓인지 황도의 풍경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도시의 규모가 황도보다 심히 작았다는 것뿐.
도시로 진입하려는데 경비병들이 행렬을 막아서면서 내게 말했다.
“뉘십니까.”
로마에 떨어진 이래로 가장 당황스럽고, 어이없으면서 멍청한 질문 중 하나였다.
이 행렬을 보고도 이런 질문이 나올 수가 있나?
“지금 먼 길을 와서 피곤하니 비키게.”
“도시는 봉쇄되었습니다. 돌아가시지요.”
“이분이 누군지 알고 그러는 것이냐, 당장 길을 비켜라.”
데키무스의 따끔한 한마디에 경비병이 움찔거렸지만, 이내 창을 겨누면서 말했다.
“누,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아그리피넨시스는 봉쇄되었습니다. 로마인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라면···.”
“비켜.”
“예?”
“게르마니아의 총독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왔다. 길을 비켜라.”
“총독···?”
말없이 손을 들어서 총독의 인장반지를 보여주니 이내 경비병의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버리더니, 이내 길에서 비켜섰다.
“죄, 죄송합니다!”
“일하는 것도 좋지만, 융통성도 갖추게.”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잠시 멈춰 섰던 일행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시가 봉쇄되었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몰라, 가보면 알겠지.”
도시로 들어서니 아그리피넨시스의 시민들은 총독의 행렬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고, 나 또한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먹고살기 팍팍한 모양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황도보다 사람들이 많이 야위었어.”
내 말에 데키무스가 시민들을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장군, 황도에는 식량이 몰려서 풍족한 것이지 대부분 시민이 저럴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다기엔 너무 마른 것 같은데.”
“아무래도 변방이다 보니 식량 공급에 차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보나 마나 얼마 되지도 않는 거, 누가 또 떼먹은 모양이로군.”
“대부분은 그렇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총독관저에 도착하고 나서야 사람들이 굶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데키무스···.”
“예, 장군···.”
“전에 이런 걸 본 적이 있나?”
“황도에서나 본 것 같습니다.”
“도저히 말이 안 나오네.”
“저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건···.”
데키무스와 내 눈앞에는 황도에서나 볼법한 거대한 궁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메디올라눔이나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궁전보다는 그 크기가 무척이나 작았지만, 그래도 주변에 있는 다른 건물들보다는 크고 화려했다.
오죽하면 테르만티아도 총독관저의 모습에 놀라며 한마디 했을 정도였다.
“우와···. 아버지 별장보다 큰 것 같은데.”
부임 첫날부터 골치 아픈 일들의 연속이었다.
입구에서부터 경비병이 행렬을 막아서지를 않나, 전임 총독은 인수인계를 제대로 해놓지 않아서 아예 맨땅에서부터 다시 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자기한테 문제가 생길만한 자료들은 죄다 파기해버렸어, 인구, 세금, 병력배치도까지 죄다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야.”
“저, 저는 병사들과 주변 순찰이나 하겠습니다.”
데키무스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데키무스, 그건 세르비우스에 맡기고 자네는 내 옆에서 일이나 도와.”
“장군···.”
“이제는 각하라고 불러.”
라인강의 수비 - 4
총독부를 탈탈 털었지만, 쓸모있는 문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전임 총독이 자신에게 해가 될만한 문서들을 꼼꼼하게 전부 없애버린 탓에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이 개새끼가 들키는 게 무서우면서, 뭐 이렇게 많이 해 먹었어!”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일이란 없는 법.
본인은 완벽하게 지웠다고 생각했겠지만, 증거는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다.
시민들이 마시는 물에서부터 창문에까지 세금을 매겨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고 간 모양이었다.
“후···. 데키무스, 게르마니아 지도나 가져와 봐.”
“군사지도로 말입니까?”
“아니, 행정지도로 가져와.”
데키무스가 가져온 지도에는 내가 다스릴 게르마니아의 도시와 마을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다만···.
“잠깐, 이건 오현제시대 지도잖아.”
“이것뿐이었습니다.”
“하···. 군사지도도 가져와 봐.”
군사지도도 확인해봤지만, 하나같이 오래된 물건들뿐이었다.
가장 오래된 것이 아우구스투스 시절, 그러니까 공화정 말기에서 제정 초기쯤에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나마 최근 것이라고 할만한 게 로마가 셋으로 갈라졌던 시기에 갈리아 제국의 황제 테트리쿠스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로마는 망했어.”
“무슨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절로 한탄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전방의 군인들은 어떻게 쳐들어오는 적을 막아낸 것인지 의문이었다.
“각하, 이 번기 회에 지도를 새로 만드시지요.”
“새로 만들자고? 당장 시민들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지도 만들 돈을 어디서 구해?”
“일단 각하의 창고에서 꺼내쓰고,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메워 넣으시지요.”
“그게 횡령 아니야 이 미친 새끼야.”
내 욕지거리에도 데키무스는 실실 웃었다.
“착한 횡령이라고 해두지요.”
“됐어, 당분간은 불편해도 이걸로 쓰지 뭐.”
“조만간 세금 징수일인데, 그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거야 창고에···. 있을 리가 없지 씨발.”
말 그대로였다.
전임 총독이란 녀석은 이것저것 해 처먹는 거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국가에 상납해야 할 세금마저 털어먹고는 잠적해버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내 손에 잡히면 손수 십자가에 매달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흠···. 어쩌죠.”
“난들 알겠냐.”
“각하, 진지하게 이번에만 각하의 주머니에서 채워 넣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채워 넣고 싶어도, 바쳐야 할 세금이 얼마인 줄 알아야 채워 넣을 것 아니야.”
“으음···. 그건 그렇습니다.”
산 넘어 산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못써 먹을만한 곳은 아니었다.
일단 제국의 가장 변두리인 지역이라 중앙정부의 힘이 약했고, 관심도 적었다.
거기에 지속적인 이주민의 유입으로 인구수도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었으며, 주둔 중인 부대도 많았다.
다만, 개판이 된 재정이 이 모든 장점을 말아먹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뭐라도 해보려면, 재정을 어떻게 해서든지 복구시켜야 했다.
“일단, 속주를 한번 돌아봐야겠어.”
“지금 당장 말입니까?”
“그래, 세르비우스 한테 병사들 좀 빌려와.”
잠깐 고민하던 데키무스가 말했다.
“이번에 편입한 게르만 군단병을 쓰시지요.”
“그거 괜찮겠네, 마침 할 일도 없이 다들 빈둥거려서 일 좀 시키려고 했는데.”
“그럼 준비시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