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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리코가 날 불렀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뒷일은 데키무스에 맡긴 채로 한달음에 스틸리코에게로 달려가, 맨땅에 머리를 박으면서 죄를 청했다.
“장군! 저는 결코 장군을 적대하거나 곤란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네.”
“그것이 아니라···. 예?”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스틸리코의 심중을 살피려고 했지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생각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분명, 포로들에 대한 건으로 굉장히 열 받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멀쩡했다.
“자네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것이니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고 거기 앉게.”
“예? 아, 예···.”
의자에 앉으니 스틸리코가 내게 물었다.
“이번 전투에서 수고가 많았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라···. 뭐 그런 거로 하지, 그래서 포로들은 어찌하려는 건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포로들을 노동력과 병력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포로일세, 그리고 대부분 전쟁포로는 노예가 되어 승자의 주머니를 채워주곤 한다네,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노예로 판다고 한들 이들이 로마에 가지는 적개심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
“저들을 노예로 판다면, 저들이 가지고 있는 적개심은 결국 로마를 찌를 것입니다. 반면에 로마의 시민으로 끌어들인다면 새로운 노동력을 얻는 것이지요.”
“미래의 위험요소를 자네가 끌어안겠다는 말이군.”
“굳이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스틸리코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 훌륭해.”
“감사합니다.”
“그럼 포로들에 관한 건은 자네에게 완전히 맡기겠네.”
“감사합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그때.
스틸리코가 말했다.
“그래도 자네에 대해 말이 많은 건 사실이네.”
“으음···. 그건 그렇겠지요···.”
“그래서 나도 자네에게 제안을 하나 하지.”
“제안 말입니까···?”
스틸리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게르마니아 총독직을 주겠네, 라인강의 방어선을 정비하고 오게나 사위.”
이 양반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런 험지로 보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내부에 있는 불만을 잠재우면서, 생각보다 커버린 나를 견제하려는 의도인 것은 알겠지만,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아니, 잠깐.
그런데 방금 사위라고 하지 않았나?
당황하며 스틸리코에게 물었다.
“사위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역시 자네라면 그것부터 물어볼 줄 알았네.”
“장군!”
“내 딸이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고 나도 자네가 마음에 들어, 그런 자네를 머나먼 북방으로 보내려고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아서 말이야.”
“저는 이미 부인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했나, 내 딸을 정실부인으로 인정해 준다면 자네가 누구를 만나든지 신경 쓰지 않겠네, 단!”
웃고 있던 스틸리코가 돌연 살벌해진 얼굴로 말했다.
“내 딸을 울리면, 내 친히 아피아가도에 매달아 주겠네.”
“제 의사는 중요하지 않은 겁니까?”
“싫은가?”
스틸리코의 말에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것은 에우독시아가 보일 반응이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스틸리코 가문과의 결합에 에우독시아의 아버지로서 쓴소리할 수는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괜찮은 판단이었다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에우독시아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이 안 됐다.
“싫다면 어쩔 수 없고···.”
“아니, 누가 싫다고 했습니까?”
“그럼 됐네.”
나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 나와버렸다.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스틸리코는 먹잇감을 낚아챈 독수리처럼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당장 결혼식을 치르는 건 힘들겠고···. 자네가 부임지로 떠날 때 테르만티아도 따라갈 거야. 그곳에서 돌아오는 대로 식을 진행하지. 기왕이면 손자는 둘 정도가 좋겠군.”
“잠깐, 잠깐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네, 삼일 줄 테니 준비를 마치고 게르마니아로 떠나게. 아, 그리고 자네의 친위 대장직은 당분간 폴로가 대행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돌아오는 날 다시 복직시켜 주겠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스틸리코의 말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아니, 그러면 에우독시아와는 생이별하라는 말입니까···?”
“누가 그러랬나? 게르마니아로 부르게.”
“그 험한 곳으로 어떻게 부릅니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내가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스틸리코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번에 자네가 포섭했다는 야만인들을 붙여주지, 인원분배를 잘해서 데려가면 될 일이 아닌가.”
“장군···.”
“가서 삼 년 정도만 고생하게, 자네가 멀리 가 있는 동안에 난 내부를 정리해야겠어.”
스틸리코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 인사발령이 나를 찍어내기 위함인지, 아니면 중앙을 정리할 동안에 나를 저 멀리 대피시키기 위함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듣고 싶은가?”
스틸리코의 무심한 눈이 마주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몸이 얼어붙고 복잡하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비워졌다.
“생각해보니, 야생에서 느끼는 산림욕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자네가 게르마니아에서 뭘 하건, 난 신경 쓰지 않겠네. 시민들을 갈취하던, 강을 넘어서 영토를 넓히건,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건 자네 마음대로 하게. 책임은 모두 자네가 지는 거야.”
“반란이라니요···.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럼 산림욕? 잘 즐기게나.”
“감사합니다. 장군···. 아니, 장인어른···.”
방을 나서는 스틸리코의 등 뒤에서 시원하게 감자를 먹이니 그나마 기분이 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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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거리면서 황궁을 빠져나오니, 온몸 이곳저곳에 붕대를 감은 채로 죽을상인 폴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또 혼나신 모양이로군요.”
“폴로.”
“그래서 이번엔 또 왜 혼나신 겁니까?”
“혼난 거 아니니까 신경꺼라, 그나저나 눈 하나는 어디 팔아먹었나.”
오랜만에 본 폴로의 모습은 예전과는 달랐다.
폴로는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다.
“전투 중에 잠깐 한눈팔았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그래도 적응되니 괜찮습니다. 그 옛날에 한니발 바르카도 애꾸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무덤에 묻혀계시던 한니발 장군이 벌떡 일어날 말이로군.”
“거 참, 이럴 때는 그냥 그렇다고 맞장구치셔야지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리우스 님, 원대 복귀를 환영합니다.”
“원대 복귀는 무슨···. 앞으로 친위대장은 내가 아니라 너다.”
“예···?”
“아주 제법이야?”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장군이 계시는데 제가 왜 친위대장이 됩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폴로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니, 도대체 이런 인사(人事)는 어떤 정신머리 없는 놈이 한 겁니까?”
“이런 미친 새끼야 입을 조심해.”
황급히 폴로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도 주변에 사람이 적어서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없는 듯싶었다.
“도대체 누구길래 그럽니까.”
“누구겠어?”
“스틸리코 장군이 그랬단 말입니까?”
“그래, 게르마니아 총독직을 맡기시더군.”
“아니, 거기는 사실상 버린 땅 아닙니까?”
“그렇지.”
폴로는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걸 아시면서 간다고 하셨습니까?”
“폴로, 조만간에 스틸리코 장군께서 칼을 뽑아 드실 것 같다.”
“그건 또 무슨 소 리습니까.”
폴로가 물었다.
“이건 내 생각이긴 한데, 지금 황도에 있는 귀족들 대부분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뭔가를 하려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그게 뭡니까.”
“나도 몰라! 내가 알았으면 시발! 게르마니아로 갔겠어?”
“으음···. 그건 그렇습니다만···.”
“됐고, 몸조심해. 티투스 님이 매번 아침점호 때마다 해줬던 말 기억하지?”
“검에는 눈이 없고, 검을 휘두르는 손만 있을 뿐이다. 말입니까?”
“그래, 당분간은 바짝 엎드려 있어.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폐하의 곁에 항상 붙어있고.”
“에이···. 스틸리코 장군께서 설마 저까지 쳐내시려 하겠습니까?”
“너는 내가 게르마니아로 갈 거라고 생각이나 했냐?”
폴로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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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안토니나가 쪼르르 달려와 까치발을 들고선 힘겹게 테이블에 얼굴을 올려놓았다.
에우독시아는 보고 있던 편지를 내려놓고는 안토니나를 안아 들고서 무릎에 앉히면서 말했다.
“안토니나, 엄마랑 글자공부나 할까?”
“저는 좋아요!”
“같이 읽어볼까?”
에우독시아가 편지를 펼치니 안토니나가 익숙한 글씨체를 알아봤다.
“어, 이거 아빠가 쓰신 것 아니에요?”
“맞아, 눈썰미가 좋구나.”
에우독시아는 안토니나와 즐겁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장문의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안토니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한 글자씩 읽을 때마다 미소짓는 에우독시아의 얼굴을 보면서 신나게 읽었을 뿐이었다.
“잘했어요.”
조심스레 안토니나를 껴안은 에우독시아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한 손으로는 따스하게 안토니나를 쓰다듬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마리우스가 보낸 편지를 반으로 접어서 조심스레 책상 위에 놓았다.
“잠시라도 눈을 팔면 파리들이 꼬여버리니 원···.”
“파리? 으아···. 파리는 싫어요···.”
“그러게 말이야···. 파리들을 어떻게 한담···?”
“아저씨들이 잡아주지 않을까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니.”
에우독시아는 편지를 내려놓으면서 안토니나와 눈을 맞추고서는 물었다.
“안토니나, 아빠가 저 먼 곳으로 떠나신다고 하는구나.”
“네? 떠나신다고요···?”
안토니나는 제법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제 못 보는 거예요?”
“그럴 리가, 아빠가 사람을 보내신다는구나.”
“우리 이사하는 거예요?”
에우독시아가 이제는 제법 살이 오른 안토니나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라인강의 수비 - 3
서부에서 날아온 승전소식은 동부의 콘스탄티노플까지 날아왔다.
거리의 시민들이 둘 이상 모이면, 하나도 빠짐없이 메디올라눔 전투의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이 소식은 황궁에 있는 호노리우스에게도 전해졌다.
“마리우스가 또 이겼다고?”
“예, 폐하. 야만인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로마하고 페르시아는 괜찮은지 모르겠네.”
“폐하, 로마는 안전하고, 페르시아 또한 쉽사리 로마를 넘볼 수 없습니다.”
“하긴, 지난번에 로마가 페르시아를 힘으로 누른 뒤로는 잠잠하더라고.”
“그렇습니까?”
에우트로피우스와 호노리우스.
둘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묘하게 대화가 이어졌다.
곁에 마리우스가 있었다면 둘이서 무슨 만담을 하는 거냐고 놀렸겠지만, 마리우스는 현재 게르마니아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역시 마리우스라니까.”
“그렇습니다. 폐하. 마리우스 경 같이 능력이고 충심이 깊은 인물은 드물지요.”
“그건 그래.”
고개를 끄덕이던 호노리우스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에우트로피우스에 물었다.
“혹시 페테르 대왕이라고 들어봤어?”
“페테르 대왕 말입니까?”
잠시 고민하던 에우트로피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피로스는 들어봤어도, 페테르라는 사람은 처음 들어봅니다.”
“페테르라니! 페테르 대왕이야!”
에우트로피우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음···. 모를 수도 있지···. 이번엔 봐줄게.”
“감사합니다. 폐하.”
“아무튼, 나도 마리우스한테 듣고서 황궁 내에 있는 책이란 책은 전부 뒤져봤는데, 페테르 대왕을 찾을 수가 없어.”
“그렇군요···. 저도 제법 역사에 조예가 있다고 자부하지만, 페테르라는 이름은 처음 듣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음···. 나도 마리우스한테 들은 이야기이긴 한데, 나보다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고, 반란을 일으킨 누이들을 처벌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고 했어.”
한참 이야기를 듣던 에우트로피우스가 감탄했다.
“듣자니, 참으로 위대한 대왕이로군요.”
“나도 관심이 생겨서 더 찾아보려고 하는데, 찾아보기가 너무 힘들어.”
“음···. 폐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도서관을 기억하십니까?”
“그건 또 뭐야.”
“소신도 어릴 적에 스승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듣기로는 아주 거대한 도서관에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었다고 하더군요.”
“오···. 그러면 거기에는 페테르 대왕의 일대기가 있겠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호노리우스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당장 알렉산드리아로 가자!”
“폐하, 아쉽게도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문을 닫았습니다.”
“어째서!”
크게 실망한 호노리우스의 외침에 에우트로피우스의 빛나는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현재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위상은 예전만 하지 못합니다. 아이깁투스가 로마의 품 안에 들어온 이래로 수많은 외부의 침략과 내전으로 도서관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럼 이제 없는 거야?”
“남아는 있습니다만···. 말 그대로 남아만 있을 뿐이지 도서관을 지원하는 이가 없어서 유명무실합니다.”
“지원하는 사람이 없다고? 그럼 내가 하지 뭐.”
“예? 폐하, 지금 황도를 복구하고 테살로니카를 복구하느라 자금에 여유가 없습니다. 재고해주시면···.”
호노리우스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면서 말했다.
“마리우스가 그랬어! 뭐 살 거면 창고에서 꺼내지 말고 저금통에서 꺼내쓰라고!”
“저금통···?”
“마리우스가 필요한 거 있으면 꺼내다가 쓰라고 했어!”
“혹시···.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저금통이란 것이 마리우스 경의 창고를 뜻하시는 겁니까?”
“응.”
마리우스가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비명을 지른 것은 이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