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48/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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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전투는 완전히 끝나버렸다.

라다가이수스는 얼마 도망가지도 못하고 개처럼 끌려와야 했고, 살아남은 부족민과 병사들은 굴비처럼 묶인 채로 내 앞에 끌려왔다.

“반갑다. 네가 대장인가?”

라다가이수스는 말없이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괜히 말을 걸었나 뻘쭘해져서 다시 물었다.

“다시 묻겠다. 네가 대장인가?”

“장군께서 묻지 않느냐?!”

나는 손을 들어서 마요리아누스를 제지했다.

“그래, 한 가지만 묻겠다. 11군단의 일은 네가 한 거겠지?”

“11군단? 그게 뭐지?”

“너희들과 마주친 부대 말이다.”

“아, 그거?”

라다가이수스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놈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바로 배를 걷어차서 입을 다물게 했다.

“크헉, 쿨럭- 우웨웩”

“답변 고맙군. 얘네들 도망 못 가게 잘 감시해, 반항하는 녀석은 저기 불길에다 던져버려도 좋다.”

“예, 장군.”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소리쳤다.

“모두 태워버려라! 우리가 도착했음을 모두에게 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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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성벽이 돌파당하고, 수많은 게르만 병사들이 황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폴로는 다른 친위대 병사들에게 업혀서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가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지휘부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스틸리코는 예비대를 투입해, 병사들과 시민들을 내성까지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다.

“장군,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화살과 기름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적은 밖에서 성문을 열라고 아우성칩니다.”

“흠, 마치 최후의 날이 온 것 같구먼.”

“장군, 지금 농담하실 때가···.”

“농담 같았나?”

스틸리코의 가벼운 한마디에 장내에 있던 다른 이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분명 폴로가 지원을 요청했다고 했는데, 누군가 그걸 무시했어 안 그렇나?”

“저는 그저 절차를···.”

“나가.”

“예?”

“절차는 무슨 놈의 절차! 대가리 대신에 돌덩이가 들어차 있는 우둔한 자야, 그대는 내 병영에 필요 없으니 당장 꺼져!”

“자, 장군?!”

스틸리코가 손짓하니 병사들이 거칠게 장교를 붙잡았다.

“놔라!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억!”

거칠게 저항하던 장교가 몇 대 얻어맞고서는 축 늘어져서 개처럼 끌려나가자 장내에 있던 다른 이들의 얼굴이 굳었다.

“다른 연락 같은 건 못 받았나?”

“무슨 연락을 말씀하시는지···.”

“마리우스.”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었습니다. 아마 도착하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겁니다.”

“일주일이라···.”

스틸리코가 혀를 찼다.

“쯧쯧쯧···. 정작 필요할 때는 곁에 없구먼.”

“어···?”

“뭔가?”

“장군 뒤, 뒤에!”

스틸리코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연기···.”

“저 방향이면···. 적의 본대가 있는 곳입니다.”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로군.”

“내부 충돌일까요?”

“아니, 마리우스다.”

“예?”

스틸리코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지금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은 얼마나 있지?”

“부상병을 제외하면, 전투 중인 병사들까지 합쳐서 이천 명 정도 될 겁니다.”

“전부 준비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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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메디올라눔을 공격하던 병사들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슬슬 눈치채고 있었다.

“이봐, 저기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지랄 말고 이거나 들어,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무거워.”

“아니, 저기 봐봐. 저거 우리 마을 쪽에서 나는 거 아니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무슨 마을에서 연기가 난다고···.”

병사의 손에 들려있던 약탈품이 땅에 떨어지면서 바닥에 쏟아졌다.

새하얀 밀가루였다.

“뭐야···.”

“마을이 불타는 거 맞지···?”

해가 떠오르고 아침이 밝아오자 도시 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보다도 시커멓고 커다란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내성으로 로마군을 몰아넣고 약탈에 열중하던 병사들은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보면서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가족을 걱정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성 밖으로 향했다.

“어디 가는 것이냐! 당장 돌아와!”

지휘관들이 이를 막아서려 했지만, 라다가이수스도 아닌 그들의 말을 들을 병사들은 없었다.

본진과 가장 가까운 동문으로 향한 병사들의 앞에 보인 것은 타오르는 마을과 그들의 앞에 서 있는 기병대의 모습이었다.

“손님들이 슬슬 돌아가려는 모양이야.”

“손님 말입니까?”

“돌아가는 길이 불편하지 않게 잘 모셔야지 않겠나?”

마리우스가 창을 높게 들고서는 말을 몰아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마리우스를 시작으로 병사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 모습을 본 게르만 병사들이 당황하면서 다시 성으로 들어가려 했다.

“죽여라.”

내성에 숨어만 있던 병사들이 어느샌가 따라붙어서 뒤를 막아섰다.

게르만 병사들이 무작정 달려들었지만, 이미 단단하게 진을 짠 로마군을 뚫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두 침착하고 내 명령에 따라 움직여라!”

“장로님, 이미 병사들이 겁에 질려서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몸을 피하시지요!”

“라다가이수스 그놈을 살려둬서는 안 돼!”

“장로님, 복수도 우선은 살고···. 억!”

“필리버트?”

“장로님, 주군의 명입니다.”

병사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혼란한 와중에 한 병사가 투구를 벗으면서 장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는 검을 겨눴다.

“허···. 지금 이 상황에 나를 죽인다고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나? 그놈은 이미 죽었을 게 뻔하지 않나!”

“당신 목 정도면 내 목숨 정도는 살릴 수 있겠지. 그러니 얌전히 죽어줘야겠어.”

“아니, 그게 무슨···.”

그게 장로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라인강의 수비 - 1

메디올라눔의 공방전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있었고, 이를 진정시켜야 할 지휘관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악마다! 악마들이 온다.!”

“도망쳐!”

“어디로 도망가란 말이야!”

게르만 병사들은 혼란에 빠진 지 오래였다.

거기에 기병들까지 난입하니, 몇 시간 동안의 전투로 완전히 지쳐버린 병사들은 완전히 사기가 꺾여버렸다.

너 나 할 그것 없이 무기를 내던지고는 두 손을 높이 들면서 적이었던 로마군에게 자비를 구걸했다.

“후···. 또 로마의 하루가 지나는군.”

“장군, 이번에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팔다리도 멀쩡하고 손가락 발가락 모두 멀쩡하지 않은가 하하하!”

“장군께서는 장군의 갑옷 여기저기에 꽂혀있는 화살들이 안 보이십니까?”

“음···. 그래?”

고개를 돌려서 몸을 둘러보니, 마요리아누스의 말대로 갑옷 이곳저곳에 적의 화살이 꽂혀있었고, 몇몇 부분은 사슬이 끊어져서 날아가 있었다.

“이번 전투는 제법 거칠었던 모양이군!”

“거친 게 아니라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나는 신의 보호를 받는 몸이라고도 할 수 있겠어.”

“아니, 그게 무슨···.”

“그래도 이번에는 자네가 겁먹지 않고 잘 따라와 줬군.”

마요리아누스 또한 망토는 어디 팔아먹었는지 너덜거렸고, 그가 입고 있는 비늘갑옷의 비늘 부분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투구는 찌그러져 있었고, 정강이 보호대 또한 반쪽만 남아있었다.

“하하하, 내가 뭐랬나 마요리아누스! 우리가 이길 거라고 했지!”

“예···. 이기긴 했습니다만···.”

마요리아누스는 여기저기 무너지고, 부서진 메디올라눔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황도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괜찮아, 괜찮아!”

마요리아누스의 등을 팡팡 치면서 말했다.

“살아남았으니 된 거야. 살아있으면 뭐든 할 수 있지 않겠어?”

“오···.”

“왜? 감탄했나?”

“장군과는 짧은 시간 동안 함께했지만, 장군께서는 오랜 친구처럼 대하시는군요.”

“같이 전투를 치렀으면 형제이자 동료인 셈이지, 아닌가?”

“그럼 제 죄는···?”

“뭐, 공을 세웠으니 부대를 바꾸는 거로 처리하겠네.”

“예? 부대를 옮기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어디로 말입니까? 혹시 최전선을···?”

“아니.”

내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이름이 똑같아서 잠깐 헷갈렸지만,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서로마의 수명을 수십 년을 늘려놓은 서로마 최후의 명군인 마요리아누스의 할아버지였다.

아에티우스에 이어서 마요리아누스라니,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친위대.”

마요리아누스의 표정이 제법 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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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리코는 수레에 실려서 옮겨지는 시신들을 보며 마리우스에게 물었다.

“생각보다도 빨리 왔군, 아무리 빨라도 내일 저녁쯤에야 올 줄 알았는데.”

“말 위에서도 잠을 잘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귀중한 경험이었다고 해두겠습니다.”

“허···. 그러고도 병사들이 칼을 거꾸로 하지 않았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군.”

“일에는 항상 보상이 따르니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스틸리코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창고에서 은화 한 닢 나가는 것도 벌벌 떠는 자네가?”

“보상은 항상 확실해야지요. 다른 건 몰라도 병사들이 먹는 거랑 급료는 안 떼먹습니다.”

“다른 건 떼먹는다는 말이로군.”

“어허, 저는 나쁜 놈들만 털어먹습니다.”

“그래, 그건 참으로 다행이구먼. 하하하.”

마리우스와 스틸리코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서로 말없이 작은 동산만큼 쌓여있는 시체들을 보고 있었다.

“장군,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뭔가.”

“이번에 사로잡은 게르만 포로들을 제가 잠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이유가 있나?”

“무키우스님과 군단병들을 가족들에게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스틸리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을 묻어주지 않은 건가?”

“예, 아무래도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게 맞다 생각해서 그랬습니다.”

“포로들이 옮기게 할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마음대로 하게나.”

“감사합니다.”

마리우스가 고개를 숙이니 스틸리코가 헛기침하면서는 슬그머니 물었다.

“그래, 듣자 하니 동부에서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들었네만.”

“아, 예. 어쩌다 보니···.”

“그래···. 테르만티아는 어쩔 셈인가?”

“...? 잘 못 들었습니다?”

“쯧···. 내 딸을 홀려놓고 어찌할 거냐고 물었네.”

마리우스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여기서 말 한마디라도 잘 못 꺼냈다가는 앞으로의 군 생활은 물론이거니와 생활 자체가 피곤해질 수가 있었다.

“그, 그런 사실 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둘은 말을 나란히 하고 성문을 지나쳐서 시내로 향했다.

그들의 뒤로 로마 병사들이 행군하면서 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시민들은 그런 로마군을 환영하면서 꽃을 던지거나 꽃송이를 뿌렸다.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보게나.”

“......”

“마리우스 님, 오셨군요.”

스틸리코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르만티아는 준비해왔던 월계관을 두 손으로 들고는 까치발로 내 머리에 씌우려고 했지만, 닿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스틸리코는 더욱 맹렬하게 혀를 차고 있었다.

“장군, 조금만 고개를 숙여주시겠습니까?”

“아, 저 그게···.”

“뭐 하는 거, 행렬이 지체되고 있지 않은가.”

고개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스틸리코의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투구를 벗고, 몸을 숙여서 월계관을 씌워주기 편하게 해줬다.

“고마워요.”

머리 위에 무언가 얹히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내 머리를 틀어쥔 테르만티아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나중에 봬요.”

그녀가 떠나갔다.

그리고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좋겠군.”

“흠흠···. 이건 제가 원한 게 아니라···.”

“그럼 내 딸이 아무한테나 저러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건가?”

“그런 게 아니라···.”

“뒷말은 나중에 듣겠네.”

스틸리코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분명 전투에서 승리하고, 명예와 영광을 쟁취했지만, 개선식 내내 불안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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