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47/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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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밝혀주던 달빛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해가 뜨기 직전.

빛이라고는 여기저기 피어오른 불꽃과 횃불뿐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병사들이 싸우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왜 아직도 못 들어가는 거야!”

“적의 저항이 거셉니다!”

게르만 병사들을 지휘하든 서문의 병사들을 지휘하든 지휘관은 답답함을 느꼈다.

벌써 전투가 시작된 지 몇 시간이나 흘렀지만, 성벽을 넘기기는커녕 성벽 위에 깃발하나 꽂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주군에게 크게 벌을 받을 게 분명했기에 그는 쉴 틈도 없이 병사들을 채근했다.

“게으름뱅이들아! 저 벽을 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러는 게야!”

“장군, 적들이 너무 강합니다···.”

“적이 강하다고 포기할 셈이냐? 빨리빨리 움직여!”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휘관 또한 무너진 성벽 위에서 잘 만들어진 기계처럼 한 몸으로 움직이면서 아군을 도륙 내는 이들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도대체 저들은 뭘 하는 이들이란 말인가.”

“아군 병사들이 크게 겁에 질린 모양입니다. 다들 앞으로 나서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후···. 퇴각을 고민해봐야 하나···.”

그때였다.

“장군!”

“뭐야.”

“주군께서 모든 예비대를 서문에 투입한다고 하셨습니다. 꼭 성벽을 돌파해서 적장의 목을 가져오라고도 하셨습니다.”

“으음···. 시발···.”

지휘관은 퇴각을 고민하던 차에 주어진 대규모의 지원군에 기쁨보다는 부담감을 느꼈다.

“필리버트님과 장로님께서도 합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 그래?”

빠져나갈 구멍을 찾은 지휘관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얼굴이었지만, 이내 얼굴 한가득 기쁨이 감돌았다.

라다가이수스의 예비대가 서문에 도착하자 공세에 차도가 보였다.

친위대가 아무리 단단히 무장했다고 하더라도 그들 또한 물렁물렁한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었고, 수십 킬로의 장비를 입고 몇 시간 동안 전투를 벌이면서 완전히 탈진해버린 뒤였다.

다른 로마 병사들 또한 교대 없이 이어지는 전투에 지쳐버린 뒤였고 말이다.

“장군, 슬슬 뒤로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뒤로? 어디로 말이냐, 나는 그런 건 배우지 못했다.”

“장군···.”

“마리우스 님을 믿으라고. 그분께서 믿음을 져버린 적이 있더냐?”

“장군이라도 몸을 피하시지요. 저희가 막겠습니다.”

폴로가 고개를 저었다.

“마리우스 님이 오시면 제일 먼저 맞이할 영광은 나의 것이야, 쓸데없이 탐내지 마라.”

폴로와 친위대 병사들이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주위를 환기하고 있었지만, 이미 무너진 성문에서 적군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양팔은 하도 휘둘러서 감각이 무뎌졌고, 반나절을 서 있었던 두 다리와 관절은 삐걱거리고 있었다.

다들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점점 동작이 커졌고, 주위에 있는 동료들과 부딪히면서 점점 방진이 무너지고 있었다.

“살아있는 새끼는 대답해라!”

“또 왜 부르십니까.”

“마리우스 님이 가르쳐줬던 군가 기억나나?”

“푸른 소나무인가 뭔가 말입니까?”

“아니, 그거 말고.”

폴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앞에 달려드는 게르만 병사의 숨통을 끊고서는 무너진 성벽 여기저기 쌓인 시체들 사이로 걷어차면서 말했다.

“최후의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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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이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래 보이는군.”

“도와주러 가시지 않을 겁니까?”

“우린 고작해야 이천이다. 자네가 말하는 건 불난 집에 양동이 대신 컵으로 불을 끄겠다는 말이야.”

“그럼 이렇게 구경만 해야 합니까?”

“누가 구경만 한다고 했나?”

마리우스가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려 전투 속에서도 평화로워 보이는 라다가이수스의 부족을 가르쳤다.

“자네는 엘리전이라고 들어는 봤나?”

친위대는 적지에서 행군한다. - 11

“엘리전···?”

“모르면 잠자코 옆에서 지켜보게.”

“예? 어어···. 장군!?”

마리우스가 앞장서서 달려가자 마요리아누스와 기병대가 그 뒤를 따랐다.

갑옷으로 든든하게 무장하고, 마갑까지 두른 친위대 기병들이 앞장섰고, 가볍게 무장한 군단 기병대가 뒤를 따랐다.

물론 가볍게 무장했다고는 했지만, 친위대가 단단하게 무장한 탓에 그렇게 보일 뿐이었고, 군단 기병대의 무장 또한 충실했다.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빛이 온 세상에 가득 퍼지면서 주변이 환해지고 있었다.

“말들 지치면 안 되니까 천천히 간다. 친위대가 앞에서 방패가 될 테니, 군단 기병대는 재미나 보라고.”

“장군, 아군을 돕지는 않으시는 겁니까?”

“자네는 적이 많다고 두려워서 도망친 이가 뭘 그리 말이 많은가, 그렇게 돕고 싶다면 혼자서라도 가게.”

“장군···.”

“싫으면 내 옆에 딱 붙어있어, 잠깐이라도 사라지면 탈영으로 간주하겠다.”

마요리아누스가 화들짝 놀라면서 나와 말머리를 맞췄다.

어느덧 주변이 제법 환해지자 도시 앞에 세워진 야만인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뭘 해야 할지는 알고 있겠지? 전부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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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로 세워진 마을에서는 부족민들이 전쟁터로 떠난 가족들을 걱정하면서 밤잠을 설쳤다.

“으음···.”

“아버님 일어나셨어요?”

“아니다···. 아들놈이 걱정돼서 잠이 와야 말이지···.”

“금방 돌아오겠죠, 뭐라도 드시겠어요?”

“물이나 좀 다오···. 이게 무슨 소리냐?”

“예?”

땅이 뒤흔들리자 부족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집 밖으로 뛰쳐나왔고, 그런 그들의 앞에는 마을을 향해 다가오는 기병들이 있었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이 느긋하게 내달리는 모습에 처음에는 아군으로 착각했지만,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주, 주군에게 알려라! 적이다!”

“적이다! 적 기병대다!”

“로마놈들이다!”

마을에 남은 이들이라고는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노약자들뿐이었다.

하지만, 험난한 야생에서 살아온 그들은 적이라는 말에 당황하지 않고 무기를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로마군이 어디서 나타났다는 거야!”

“후, 후방에서 기병대가 튀어나왔습니다.”

“후방? 동부의 군대가 벌써 도착한 건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라다가이수스가 밖으로 나오자 부족민들이 무장을 갖춘 채로 울타리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활을 들어, 다가오는 기병대를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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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적이 활을 쏘려는 모양입니다.”

“나도 보고 있어.”

“지금이라도 회피기동을 하시는 게···.”

살짝 겁먹은 마요리아누스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어깨 펴고, 허리를 세우라고 마요리아누스 어차피 한번 사는 세상 뭐가 그렇게 두려운가.”

“장군께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돌봐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입대한 것뿐입니다!”

“그래? 나도 굶어 죽기 싫어서 입대했지.”

“장군!”

“죽음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친근하게 행동한다는 말을 아는가?”

“모릅니다.”

“자네는 이번 전투에서 무기를 휘두르지 않아도 좋네, 내가 활약하는 거나 뒤에서 지켜보라고.”

“예?”

멍한 얼굴의 마요리아누스에 말했다.

“그렇게 입 벌리다가는 눈먼 화살에 맞아 죽는다. 방패나 들게.”

“으엑!”

새벽 공기를 뚫고 날아온 화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지만, 방패와 갑옷에 튕겨 나가기 일쑤였다.

갑옷과 방패에 튕겨 화살 부러지는 소리가 참으로 요란하게 들렸다.

“이렇게 있으니 빗속을 걷는 느낌이군.”

“장군, 어떻게 좀 해보십시오! 으아아악!”

“하하하, 마요리아누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어! 즐기라고!”

“전쟁을 어떻게 즐깁니까!”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전쟁은 즐기는 게 아니지···.”

적의 화살 비가 멎으니 적과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졌다.

슬슬 말의 속도를 올리며, 화살이 잔뜩 꽂혀서 무거워진 방패를 내던지고는 양손으로 창을 잡고서는 외쳤다.

“자, 가자!”

“오늘은 군가나 구호 같은 거 안 외치십니까?”

“그건 전투 시작 전에나 하는 거지, 이게 전투인가?”

제일 선두에서 적의 울타리를 향해서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울타리가 부서질지, 내 말의 다리가 부서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멈출 수가 없었다.

“어어···!”

몇몇 용맹한 야만인이 가까이에서 활을 쐈지만, 갑옷에 박혔을 뿐, 기마 돌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말과 부딪힌 울타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부서져 버렸고, 뒤에 서 있던 사람들도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리듯이 기마 돌격에 휩쓸려 사라졌다.

“끼요오옷!”

그 뒤로부터는 전투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적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몇몇이 모여 어설프게 진형을 짜고 기병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손으로 태양을 가리려는 멍청한 행동일 뿐이었다.

기병은 볼링공이었고, 보병들은 볼링핀이었다.

공이 볼링핀을 맞히지 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핀에 맞고 튕겨 나가는 건 보지 못했다.

“끄아악-!”

“아악-!”

부딪혀서 튕겨 나간 이들 중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소수였다.

대부분 충돌과 함께 허리나 머리가 박살 나버려서 죽거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뭣들 하느냐?! 예비대를 투입해서···.”

라다가이수스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예비대는 이미 전부 보내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 사람을 보내서 부대를 회군시킨다고 해도, 그 사이에 이들이 부족민들을 학살하고 도망갈 시간은 충분했다.

거기다가 지금 병사를 뺐다가는 이도 저도 안 된다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무기를 들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무장시켜서 저들을 막는다.”

“주군, 이미 부족민들을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몸을 피하시지요.”

“아니, 아군이 성을 점령하고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

라다가이수스는 창을 꼬나쥐고서는 불을 지르느라 정신없는 로마군 기병에게 창을 던졌다.

창은 정확하게 병사의 등에 꽂혔고, 짧은 비명과 함께 병사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 소리에 주변에 숨어있던 아이들과 노인들이 뛰어나와 병사를 짓밟았다.

“어차피 숫자는 우리가 더 많아, 열 놈이 죽어도 한 녀석만 잡으면 돼!”

라다가이수스는 타오르는 마을을 바라보면서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쓸모없는 종자들을 솎아내는 거지···. 안 그런가?”

“주군···.”

“저놈들은 고작해야 마을 하나를 불태우겠지만, 우리는 제국의 심장을 불태우는 거란 말이야 안 그래? 응?”

라다가이수스는 주변에 동의를 구했지만, 누구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이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왜 대답들이 없는가!”

대답은 불길 너머에서 들려왔다.

“찾았다.”

이윽고 불길을 가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칠흑같이 검은색의 장비로 무장한 병사와 겁에 질린 병사가 따라 들어왔다.

라다가이수스의 호위병들은 재빨리 무기를 들고서 주군을 둘러싸면서 앞을 막아섰다.

가까이 말이 다가오자 다들 힘껏 창을 내질렀다.

잘 훈련받은 전투마답게 날카로운 창끝을 그대로 들이받은 말이 속도를 잃긴 했지만, 한번 피를 본 말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다 비켜!”

물론 그 위에 올라탄 사람도 미쳐 날뛰고 있었고 말이다.

“주군, 피하십시오!”

“저놈이 대장인 모양이다. 저놈만 잡으면 돼···!”

“뭣들 하는가? 주군을 모셔라!”

“어딜 도망가려고!”

마리우스는 호위병들에게 끌려가는 라다가이수스의 모습에 그대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호위병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리우스를 둘러싸 버렸다.

“장군!”

마요리아누스가 황급히 마리우스를 도우려 했지만, 주변에 있던 부족민들이 달려들어 몸으로 막아서는 탓에 돕지 못했다.

마리우스를 둘러싼 병사들은 눈치를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뭐야, 안 할 거면 나간다.?”

[하, 한 번에 덮친다.!]

“오, 이제야 하는 거야? 그런데 이걸 어쩌나.”

“장군!”

애타게 마리우스를 부르는 마요리아누스의 뒤로 온몸에 검댕을 묻혀 한층 더 새까매진 친위대 병사들이 나타났다.

“마음을 먹었으면 빨리했어야지.”

[이, 이게 무슨···.]

[이런 시발!]

병사들이 보인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모든 걸 포기한 채로 멍하니 바라보는 것.

조금이라도 삶을 연장하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달리는 것.

“전부 쓸어버려.”

“예,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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