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4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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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리코는 공세를 준비하는 라다가이수스의 부대를 보며 폴로에 물었다.

“현재까지 특이동향은 없었나.”

“우리가 땅굴을 파는 걸 눈치챘는지 적들의 공사가 중단된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건 다행이군.”

“땅을 다시 메울까요?”

잠깐 고민하던 스틸리코가 말했다.

“혹시 모르니 납으로 메워버리게.”

“예, 알겠습니다.”

라다가이수스의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첫 공격에서의 실패를 교훈 삼아서 단단히 준비했는지, 얼마 없는 철들을 긁어모아서 공성 탑과 충차를 튼튼하게 보강했다.

거기에 투석기들 또한 장인들과 로마 포로들을 다그쳐서 수십 대나 완성했다.

“준비됐나?”

“으음···. 주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장로, 우리가 저 성을 넘지 못하고 그냥 물러난다면 다른 부족민들이나 족장들이 날 뭐라고 보겠나? 금방이라도 등 뒤에 칼을 찌르려고 들게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포로들이나 데려오게.”

“포로들은 왜 찾으시는지요?”

라다가이수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요즘 따라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진 건가, 데려오라고 하면 그냥 데려오면 돼.”

“죄, 죄송합니다···.”

이윽고 메디올라눔의 성 앞에 로마 포로들이 줄지어 세워졌다.

“뭘 하려는 거지.”

“포로를 처형하려는 것 같습니다.”

“처형? 우리 군의 사기를 뒤흔들 셈이로군.”

“최전선에서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보통은 순찰 나갔다가 사라진 동료들이 붙잡혀 있었지요.”

“듣기만 해도 피가 끓어오르는군.”

“한번은 마리우스 님이 화를 못 참고서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전부 도륙 내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 성격이 어디 가겠나.”

라다가이수스의 병사들은 일렬로 세워둔 로마 포로들의 뒤로 다가가서 검을 높이들이며, 기괴한 함성을 질렀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질린다는 얼굴로 다음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저 개새끼들 또 저러네.”

“우리도 저렇게 되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 성벽이 이렇게나 높은 데다가 스틸리코 장군님이 계시는데 무슨 헛소리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동요하는 병사들의 모습에 스틸리코가 명령을 내렸다.

“저 포로들을 구할 방법이 없겠나?”

“없습니다. 마리우스 님이 계신다면 또 몰랐겠지만, 저들을 구한다고 병사들을 내보냈다가는 애꿎은 병사들만 죽을 겁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병사들이나 잘 다독거리게.”

이윽고 포로들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병사들은 참혹한 모습에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아버렸다.

포로들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어둠을 밝히는 수많은 불꽃이 천천히 성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친위대는 적지에서 행군한다. - 10

달빛 아래에서 앞이 겨우 보일까말까 한 한밤중에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적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수많은 불꽃이 일제히 성을 향해서 날아오는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총원 전투 위치로.”

“전투준비!”

“빨리빨리 움직여!”

백 부장들의 호통 소리가 커질수록 병사들의 발걸음도 덩달아서 빨라졌다.

“준비 끝났습니다!”

“목표는 전방에 다가오는 공성 탑이다. 쏴!”

투석기에 놓인 기름 항아리에 불이 붙었다.

이윽고 수많은 불꽃이 밤하늘을 갈랐다.

달빛 아래 어스름히 보이는 거대한 공성 탑들에 항아리가 맞으면서 불이 확 붙었지만, 겉면에 물을 적신 가죽이나 강철을 덧댄 탓에 눈에 보일 만큼 확 타오르지는 않았다.

다만.

“뭐가 저렇게 많아···.”

공성 탑의 겉면에 불이 붙으면서 주변에 모여있는 적들의 모습이 좀 더 명확하게 보였다.

희미한 달빛 아래 어스름하게 보이던 윤곽으로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불빛으로 비춰준 병사들의 수는 그 배는 되어 보였다.

“지금 연극 보러 왔나! 넋 놓지 말고 빨리 장전해!”

“아, 예!”

선임병의 호통으로 정신을 차린 신병이 황급히 움직이면서 기름 항아리를 들었다.

“투석기는 전부 준비되었겠지?”

“예, 줄도 넉넉히 준비해뒀습니다. 밤 동안 계속 써도 될 겁니다.”

“그래, 투석기들에 아군을 엄호하라고 전해.”

“예, 주군.”

라다가이수스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무언가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소리? 무슨 소리?”

뒤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 동료는 없었다.

단지 동료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떡이 있을 뿐이었다.

“장군, 야만인들이 투석기를 손본 모양입니다.”

“아군 투석기들은 뭐하고 있는 거지?”

“지금 다가오는 공성 탑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공성 탑은 포기한다. 적 투석기의 위치를 찾아내서 처리하라고 해.”

“바로 전하겠습니다.”

적의 투석기에서 쏘아진 돌은 성벽 위의 로마 병사들은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시가지에도 떨어지고 있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난번보다 성벽을 넘어오는 돌들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다행히 황궁이나 스틸리코의 지휘부까지는 돌이 날아들지 않았지만, 빈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황도의 외곽과 일반 시민들도 거주하는 그 변두리 지역까지 화가 미쳤다.

“모두 대피하시오!”

“우리를 따라오십시오!”

다행히도 이번에는 스틸리코가 보낸 순찰대가 제때 도착해서 사람들을 대피시킨지라 사람들이 조금 겁을 집어먹은 것 외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스틸리코가 전투 이후에 집을 새로 지어준다는 약속까지 한 상태인지라 다들 묵묵히 통제에 따랐다.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사격개시!”

어두운 적 병사들이 어느 정도 다가오자 스콜피오에서 커다란 화살과 사람 머리만 한 돌 탄환이 쏘아졌고, 궁수들의 손도 바쁘게 움직였다.

게르만 병사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방패를 머리 위로 올려서 화살 비를 피했지만, 운 없는 몇몇은 커다란 화살과 돌 탄환에 맞아 널브러졌다.

“조금만 힘을 내라! 성벽이 코앞이다.!”

어두운 밤에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서 공성 병기를 굴리느라 몇 대가 뒤엉켜서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제대로 성벽까지 안착할 수 있었다.

충차까지 성문에 닿았고,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공성 탑에 올라라! 먼저 성벽에 오르는 자에게 로마 금화 서른 닢을 주겠다!”

“궁수들 대기해! 문이 열리자마자 쏘는 거다! 전원 백병전 준비!”

양측 지휘관들이 목이 터져가라 소리를 치면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성벽 위의 로마군은 날아오는 적의 화살과 돌덩어리들을 피해 가면서 진형을 잡았다.

동료들과 어깨를 맞추고 진형을 갖춘 병사들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면서 동질감과 안정을 느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쏴!”

공성 탑의 두꺼운 나무판자가 열리고, 지난번과는 다르게 게르만 병사들은 방패를 들고 대열을 맞춰서 천천히 성벽으로 뛰어내렸다.

중간중간 방패의 사이를 뚫고 들어간 화살이 게르만 병사들을 쓰러트리긴 했지만, 대부분이 별문제 없이 성벽에 뛰어들 수 있었다.

그 밑에서 대기 중이던 로마 병사들이 고슴도치처럼 창을 바짝 세우면서 뛰어내리는 병사들을 하나둘씩 처리했다.

“계속 밀어붙여!”

“잘하고 있다! 이대로 떨어지는 놈들 하나씩 처리해, 두 눈 크게 뜨고 정신 똑바로 차려!”

폴로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서문에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던 성문은 완전히 틀어막은 덕분에 적의 충차 공격에도 거뜬했다.

“충차는 신경 쓸 것 없다. 성벽 위로 올라오는 녀석들부터 쳐내!”

폴로는 몸소 성벽을 누비면서 사다리를 걷어내고 성벽 위에 올라온 적들과 싸웠다.

“끅-”

“조금만 힘을 내라 곧 동부에서 지원군이 온다.!”

한참을 정신없이 싸우던 폴로는 문득 발밑이 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들뜬 마음에 성벽 너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밤이라 안 보이는 탓도 있었지만, 그래도 윤곽은 보일만 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전원 대피! 성벽에서 물러나!”

“장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당장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 아래로 물려!”

“예? 지금 전투 중···.”

“시발, 말대꾸 할 시간에 움직여! 병사들 다 죽이고 싶어?!”

발밑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폴로가 성벽을 뛰어다니면서 병사들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어어···?”

“뭐, 뭐야!”

“모두 피해!”

“성벽이 무너진다.!”

거대했던 성벽의 한 부분이 무너지고 있었다.

큰 소음과 함께 벽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리자 흙먼지가 하늘 높이 일어났다.

성벽이 무너질 때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뒤가 아니 앞으로 무너졌고, 그 덕분에 서문에 붙어있던 몇몇 공성 탑들이 넘어지면서 그 아래 모여있던 적들을 덮쳤다.

적이고 아군이고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당황했지만, 폴로는 머리로 판단하지 않고 우선 병사들부터 움직였다.

“마르쿠스!”

“캑캑···. 부르셨습니까?”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백부장이 다가왔다.

“당장 중앙으로 가서 눈에 보이는 예비대 아무나 끌고 와!”

“스틸리코 장군에게 보고는 안 드려도 됩니까?”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서 대신 전해달라고 해! 지금 한시가 급하다.”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 네가 늦으면 이곳이 뚫린다.”

“맡겨만 주십시오.”

마르쿠스가 전력으로 달려가는 것을 본 폴로는 주변에 있는 병사들을 끌어모아서 무너진 성벽으로 몰려드는 적들을 베어 넘겼다.

“여기가 뚫리면 다 죽는다.”

로마 병사들이 입안에 들어간 흙먼지를 뱉어내면서 폴로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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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 서쪽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벌써? 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전투 중에 갑자기 성벽이 무너져서 아군의 피해가 큽니다. 장군께서 지원을 청한다 했습니다.”

“필리버트에게 일이 생긴 모양인데···.”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라다가이수스는 대뜸 말을 꺼내는 장로의 모습에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그에게 물었다.

“뭔가 알고 있었나?”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래?”

라다가이수스는 평안해 보이는 장로에게 말했다.

“일단은 지원을 보내야겠지, 서문에 예비대를 전부 투입해.”

“전부 말입니까?”

“그래, 단번에 벽을 넘어가야 해.”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라다가이수스는 장로가 조용히 천막을 벗어나자 곁에 있던 호위병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최근 장로께서 필리버트님과 자주 접촉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지난번의 일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몇 년 전에 죽은 딸이 남긴 하나뿐인 손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쯧쯧···. 진작에 털어내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어떻게 할까요.”

라다가이수스는 말이 없었다.

대신 검지를 쭉 펴고서는 머리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

“한 번에 끝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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