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45/187)

그냥 마리우스가 안 따라오면 숲을 홀로 헤쳐갈 생각에 겁이 나서 그냥 잠자리에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자신은 친위대의 부대장이 되었고, 지금은 메디올라눔의 모든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병사들을 책임지고 있었다.

“장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폴로는 보고를 올리는 백 부장에게 오랜만에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예? 뭐가 말입니까?”

폴로는 투구 끈을 풀었다.

턱을 강하게 조여오던 투구 끈이 떨어지고, 투구를 벗어 던지니 땀에 젖은 머리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장군, 지금 뭐하시는···.”

폴로는 시끄럽게 자신을 부르는 백 부장에게 투구를 던져주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민들에게로 말을 몰았다.

다가오는 폴로를 보며 누군가가 돌을 던지려 했지만,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그를 말렸다.

그리고 폴로의 말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친애하는 로마의 시민들이여! 그리고 우리의 친구이자, 가족들이여!”

광장의 시선이 폴로로 향했다.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여러분들의 해산을 권하기 위함입니다. 저 또한 여러분에게 많은 고난과 슬픔이 함께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네가 뭘 안다는 거야!”

아이의 시신을 업은 여인이 시민들의 앞으로 걸어 나와 폴로 앞에 섰다.

“매일같이 좋은 음식, 따뜻하고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으면서 살아가는 너희들이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도대체 뭘 안다는 말이야!”

“맞아!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압니다. 잘 알지요!”

폴로가 시민들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저 또한 몇 달 전까지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곳에서 야만인과 몸을 부딪치며 로마를 지켰습니다.

그곳에서 수많은 동료를 잃어야 했고 말입니다.

예, 슬프지요. 누군가의 죽음은 슬픔을 불러옵니다.

마리우스 장군께서 그때마다 이런 말을 하시고는 했습니다.

산 사람을 살아야 한다.

신께서 무슨 뜻으로 우리의 친구, 형제, 가족들을 뺏어가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합니다!

살다 보면 상처에 새살이 차오르고 아물면서 흉터가 되겠지요! 우리는 그 상처를 보면서 떠나간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게 살아남은 이들의 짐입니다.”

폴로의 말에 광장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아이를 안고 있던 여인은 뭐라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앉아 울면서 물었다.

“요안이···. 요안이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할 겁니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에 다시 돌려주겠지요.”

그때, 광장의 적막을 깨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하군. 마리우스가 사람 보는 눈이 제법이야.”

“장군?!”

그곳에는 스틸리코가 서 있었다.

스틸리코는 노예 하나만을 거느린 채로 유유히 폴로에 걸어오며 말했다.

“시민 여러분, 무얼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제가 왔습니다.”

단 한마디였지만,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이었다.

모두 갑작스레 나타난 스틸리코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환호를 보냈고, 스틸리코는 자연스럽게 광장 한가운데 있는 단상 위에 올라섰다.

“여러분, 도시의 다른 이들은 언제나 여러분의 위에서 군림하기를 즐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도시의 위기가 찾아온 이때 그들은 어딨습니까?”

[도망갔습니다!]

“예, 그렇죠. 모두 도망가거나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필요로 할 때 저는 이곳에 나타났습니다!”

[스틸리코! 스틸리코! 스틸리코!]

“로마의 시민들이여, 병사들이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동안 스틸리코가 자리를 비웠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시민들은 스틸리코의 이름을 연호했다.

병사들 또한 스틸리코를 환영하면서, 스틸리코는 등장만으로 군대와 시민의 마음을 휘어잡아버렸다.

“아니, 이게 무슨···.”

“그동안 고생 많았네, 이름이···.”

“폴로입니다. 갈루스 폴로.”

“갈리아인인가?”

“아퀴타니아 출신입니다.”

“그래, 아퀴타니아의 전사 갈루스 폴로. 내게 지휘권을 넘겨주겠나?”

“물론입니다. 장군.”

폴로의 경례를 받으면서 스틸리코는 미소를 지었다.

친위대는 적지에서 행군한다. - 9

고작 지휘관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기라도 한 것처럼 암울하던 도시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상인들은 다시 문을 열었고, 시민들은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냈다.

물론 전투 중이라는 상황 내에서 최대한 그렇게 보낸 것일 뿐이지만, 일이 이렇게 돌아갈 때까지 스틸리코가 내린 명령은 단 하나였다.

“성문을 보수한다.”

“성문을 보수하기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거기에 성문을 보수하려고 해도 그 재료는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스틸리코는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백부장들을 뒤로한 채로 지긋이 폴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틀이면 되겠나?”

“충분합니다.”

“아니, 그게 가능하긴 합니까?”

“해봐야지요.”

다른 이들이 의심쩍은 눈빛으로 폴로를 바라봤지만, 폴로는 그길로 황도에 있는 장인들을 전부 불러모아 성문을 뜯어고쳤다.

처음에는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이들도 날밤을 세어가면서 얼추 성문을 뜯어고치는 폴로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저런 독종은 처음 봤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될 일에 저리 힘을 쏟다니 왜 저러는지 원···.”

다들 투덜거리면서 한마디씩 뱉었지만, 내심 폴로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고, 약속한 이틀째에 성공적으로 성문을 수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치우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요.”

“미래의 일은 미래의 내가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마리우스 님이 자주 하시던 말이었네. 자세한 뜻은 나도 몰라.”

“아, 예···.”

성문은 완벽하게 고쳐졌다.

아니, 완벽하게 틀어막혔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폴로는 이틀 만에 성문을 고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성문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성문을 틀어막는 데 집중했다.

이틀 동안 밤을 새우면서 구멍을 메우고, 온갖 지지대로 성문을 틀어막은 거로 모자라서, 안쪽에는 목책을 세워서 또 하나의 성벽을 세웠다.

적이 억지로 성문을 깨트리고 밀고 들어온다면 그 뒤에 있는 목책에 의지해서 적을 막으려는 생각이었다.

“...훌륭하군.”

“감사합니다.”

결과물을 본 스틸리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했던 건 그래도 멀쩡히 움직이는 성문이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성문이 아니라 벽에 가까웠다.

“장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뭔가.”

“그동안 뭘 하셨던 겁니까? 왜 말도 없이 사라지셨는지도 궁금합니다.”

폴로는 별 생각 없이 물어본 것이지만, 주변에 있던 장교들은 스틸리코를 바라보면서 그의 대답을 기대했다.

스틸리코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몸이 편치 않아서 집에서 요양했다네.”

“예? 연락을 전부 끊고서 말입니까?”

“듣자 하니 독한 전염병이라고 하더군.”

“아···.”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지만, 폴로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우스와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잘 대답하지 않는 마리우스로 인해 생긴 폴로의 습관이었다.

“적의 동향은 어떤가.”

“성 앞에 마을을 만들고는 알아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대로 이웃하고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한 건가?”

“음···. 죄송합니다.”

“쯧쯧···. 쓸데없는 것까지 닮지는 말게.”

핀잔을 들은 폴로가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적은 공성 병기를 다시 만들면서 공성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외에 특이사항은?”

“야간에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들이 땅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땅굴인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일단은 예상지점에서 역으로 땅굴을 파고 있고, 인근에 병사들을 배치해 뒀습니다.”

스틸리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말하게.”

“예, 장군.”

******

“그러니까 자네 말은 전투가 한창일 때 산을 쌓자 이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거대한 토산 위에서 공격한다면···.”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부족민들을 전부 동원한다고 해도 산을 쌓는 데 몇 달이 걸릴 게 뻔해, 그런데 그걸 전투 중에 하자고?”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용감한 줄 몰랐네, 그렇게나 공을 세우고 싶으면 다음 전투에서 제일 먼저 성벽을 올라갈 영광을 자네에게 넘기겠네.”

“죄송합니다.”

라다가이수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래, 다른 의견은 또 없는가?”

“주군, 땅굴을 이용하는 게 어떻습니까?”

“땅굴? 그건 이미 파고 있지 않은가.”

“예, 그걸 침투 용도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적의 성벽을 무너트리는 용도로 쓰는 겁니다!”

“성벽을 무너트린 다라···. 계속해보게.”

“예, 그러니까 지금 파고 있는 굴이 대충 성벽의 바로 밑쯤일 겁니다. 그 지점에서 굴을 무너트리면 그 위에 있는 성벽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지대가 무너졌으니, 성벽 또한 못 버티고 무너지겠지.”

“바로 그겁니다.”

라다가이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굴은 어떻게 무너트릴 생각인가?”

“성 인근에 해자가 있으니, 해자의 물을 땅굴로 유입시켜서 무너트릴 생각입니다.”

“필요한 건?”

“적의 시선을 끌어주십시오. 그 틈에 성벽을 무너트리겠습니다.”

라다가이수스는 곁에 있는 장로를 돌아보며 물었다.

“당장 병사들을 움직일 수 있겠나?”

“예, 명령만 내리신다면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좋아! 오랜만에 양과 염소를 잡아서 병사들에게 배불리 먹여라. 오늘 밤에야말로 성을 넘는다.”

라다가이수스는 성벽 위에 흩날리는 로마의 깃발을 지긋이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자신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

“다구르!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내려가봤자 또 이상한 거나 퍼줄 거면서 뭘.”

“요 근처에서 토끼 한 마리 잡아 왔어!”

“진짜?!”

아말릭의 말에 나무에서 뛰어 내려온 다구르가 모닥불 옆에 자리를 잡고는 노릇노릇하게 익고 있는 토끼를 보며 물었다.

“이게 웬 거야.”

“요 근처를 어슬렁거리는데 토끼 한 마리가 대뜸 내 앞으로 튀어나오더라고.”

“운이 좋군.”

다구르는 잘 익은 토끼 뒷다리를 큼직하게 베어 물고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크으- 이게 얼마 만에 고기냐.”

“뒷다리 하나만 먹어!”

“치사하기는···. 그런데 산속에서 이렇게 불을 피워도 괜찮을까?”

“뭐 어때. 이 근처에 로마놈들은 죄다 겁을 집어먹고 숨어버렸고, 동부에서 온다는 놈들도 한 달은 족히 걸린다는데 우리도 불 좀 피울 수도 있지.”

“아무리 그래도 장로님이 주위를 잘 살펴보라고 부탁하셨는데···.”

다구르의 말에 아말릭의 얼굴이 대번 찌푸려졌다.

“먹기 싫으면 줘, 나 혼자 다 먹을 테니까.”

“어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신나게 늦은 저녁을 해결하던 다구르는 갑자기 새떼가 나무 위로 한 번에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는 의아함을 느끼며 말했다.

“뭐야, 주변에 늑대라도 있는 모양인데.”

“슬슬 정리하고 돌아가자.”

“잠깐만 기다려봐, 늑대면은 한 마리만 잡고 가자고.”

“굳이 위험하게 그러지 말고 돌아가지 그래.”

“아들놈한테 선물로 목걸이 하나 마련해주려고 그런다. 조금만 기다려봐.”

“쯧쯧쯧···. 그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인마.”

“안 도와줄 거면 조용히나···.”

풀숲을 조심스레 헤친 다구르의 눈에 숲속을 내달리는 기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부 시커먼 기병들의 모습은 어릴 적 할아버지가 자신을 무릎에 앉혀놓고 들려주던 이야기에 나오던 악마가 절로 떠올랐다.

“이봐, 그냥 가자니까 그러네.”

“닥쳐 미친 새끼야.”

“뭐 이 새끼야?”

다구르는 눈치 없는 아말릭을 한 대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했다.

“저 앞에 적이 왔으니까 조용히 하라고 시발.”

“뭐가 왔다고? 어···?”

아말릭도 그제야 땅이 조금씩 울리면서 숲이 뒤흔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시발!”

“뛰어!”

다구르는 자신을 향해 말머리를 트는 적들을 보고서는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말릭또한 전력으로 도망가는 다구르의 뒤를 따라가면서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기병, 기병들이 있어!”

“아군 아니야?”

“아군 기병들이 여기 왜 있겠어!”

둘은 두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면서 숲을 벗어나려 했지만, 얼마 벗어나지 못하고 뒤를 따라 잡혔다.

“시발, 따라잡히겠어!”

다구르와 아말릭은 숲의 지형을 이용해서 요리조리 공격을 피하면서 도망쳤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끅-”

“아악-!”

온통 검은색의 갑옷과 망토를 휘날리는 병사가 던진 창이 아말릭의 등을 꿰뚫으면서 다구르의 종아리에 꽂혔다.

다구르와 아말릭은 볼썽사납게 땅을 굴렀다.

“시-벌···.”

다구르가 욕을 내뱉으면서 정신을 차리니 주변에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검은 병사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시, 시발 살려줘!”

[고트족인가, 아니면 반달?]

“아는 건 다 말할 테니까 살려줘!”

[우리말은 모르는 것 같군.]

[마요리아누스가 야만인 말을 좀 한다고 들었습니다. 데려올까요?]

[그래.]

다구르는 자신의 오른 다리에 꽂힌 창을 조심스레 뽑으려 했지만, 이내 자신의 목에 창이 겨눠지자 두 손을 들었다.

[마침 잘됐어. 이 새끼한테 뽑아낼 수 있는 건 다 뽑아내고 적당히 묻어버려.]

[그럼 다른 병사들은 쉬게 하겠습니다.]

[그래, 말들의 마구도 벗겨서 손실된 체력을 다시 채우고, 해뜨기 직전에 들어간다.]

[해뜨기 전이면 어두워서 아군끼리 뒤엉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불 지르면 다시 환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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