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44/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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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로마군의 피해고 만만치 않았다.

구멍이 뻥 뚫린 성문을 보수하는 건 둘째 치더라도 성벽에 달라붙은 사다리와 공성 탑, 그리고 성벽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치우는 것만 해도 고역이었다.

그뿐인가, 도시로 날아든 돌덩어리들 때문에 시내에서도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성벽을 기대면서 주저앉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후···.”

주변을 둘러보니 병사들 또한 너나 할 것 없이 쓰러져서 휴식을 취하고 있거나 부상병들을 성벽 아래로 부축하고 내려가는 게 보였다.

판노니아 이후로 이렇게 힘들고, 고된 전투는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장군.”

“그래, 무슨 일인가.”

잠시 추억에 잠길 시간도 없이 일이 몰아쳤다.

“화살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넉넉하게 준비해두지 않았는가? 갑자기 화살이 더 필요하다니?”

“오늘 전투에서 생각보다 화살을 많이 썼습니다.”

“뭐?!”

폴로가 몸을 일으켜 창고로 향했다.

창고지기의 말대로 창고 안에 가득해야 할 화살들은 흔적도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백 부장들은 병사들 통제도 못 하고 무엇을 한 거야!”

“그게···. 다들 싸우기에 바빠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맞았다.

지금 전투를 지휘해야 할 고급장교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부족했다.

굳이 따져보자면 폴로 또한 친위대의 부대장에 불과한지라 이런 대규모의 전투를 지휘해본 적도 없었고, 지휘할 권한도 없었다.

그저 이들 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이라 여기까지 불려 나왔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백 부장들에 대한 압박이 과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당장 전투를 지휘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서 싸우겠습니까?”

“맞습니다. 화살을 쏘는 것까지 계산해서는 못 싸웁니다. 그런 건 장군께서 관리 해주셨어야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백 부장들은 자신들의 짬에 대한 자부심인지는 몰라도 은연중에 폴로를 무시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서 폴로는 마리우스가 돌아오기만 을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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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리리쿰을 지나친 마리우스와 그의 부대는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했다.

하지만 너무 급격하게 움직인 탓이었는지. 일주일 거리를 사흘 만에 돌파했지만, 병사들이고 말이고 전부 탈진상태였다.

메디올라눔의 나흘 거리에서 퍼져버린 병사들을 보면서 고민하던 마리우스는 인근의 군영에서 말을 바꾸면서 선언했다.

“데키무스, 세르비우스님. 부대를 부탁하겠습니다.”

“예?”

“장군?”

“저는 기병대를 이끌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제 곧 메디올라눔입니다. 이틀이나 삼일 정도만 쉬면서 병사들의 피로를 풀고···.”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마리우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도 11군단의 병사들과 무키우스 님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지 않겠습니까? 최대한 멀쩡할 때 묻어드려야지요.”

“아무리 그래도···.”

“맞습니다. 위험합니다. 장군.”

“다들 잊으신 모양인데···.”

마리우스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당당하게 가슴을 펴면서 말했다.

“야만인들 때려잡는 건 제 전문이지요. 놈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시원하게 뒤통수를 후려칠 테니 다들 천천히 오십시오.”

마리우스는 말을 바꿔탄 채로 쉬고 있는 기병들 사이에서 마요리아누스를 불렀다.

“마요리아누스!”

“예? 예···. 장군.”

“보리는 먹을만한가?”

“예···.”

마요리아누스의 얼굴은 심히 좋지 못했다.

마리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자네의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고 싶지 않은가?”

“예···?”

마요리아누스의 두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자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 해주겠네, 같이 가겠나?”

마리우스는 웃고 있었다.

마요리아누스는 그의 미소와 제안이 악마의 제안처럼 느꼈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친위대는 적지에서 행군한다. - 8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마리우스는 기병들을 이끌고서 도로를 내달렸다.

지나가던 이민들과 상단행렬이 다급하게 비켜서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메디올라눔으로 향했다.

몇 시간이나 말을 타느라 허벅지가 아려오던 마요리아누스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장군, 말들이 지쳤습니다. 잠시 멈추어 서시는 게 어떻습니까?”

“벌써 그렇게 됐나?”

마리우스가 손을 들고서 천천히 속도를 줄이니, 뒤따라오던 병사들도 속도를 줄였다.

한참이나 뛰어오던 말들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투레질을 해대면서 숨을 골랐고, 말에서 내린 병사들도 다리를 부들거렸다.

“자네들을 너무 혹사했군.”

“아, 아닙니다!”

마요리아누스는 몇 시간이나 말을 타고서도 멀쩡한 마리우스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어.”

“얼마나 휴식을 취하실 생각이신지요.”

“한 시간.”

마리우스의 연이은 단답형에 마요리아누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조용히 물러났다.

마리우스의 머릿속에는 난도질 되어있던 티투스와 목만 덜렁 남아있던 루시우스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마리우스의 몇 안 되는 지인들과의 간만에 재회는 큰 충격이었다.

로마로 떨어져서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보내왔던 이들이라 그 충격은 더했다.

“개새끼들···.”

마리우스는 조용히 품 안에서 건빵 한 조각을 꺼내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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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다가이수스는 눈앞에 늘어선 지휘관들을 쭉 둘러보고는 물었다.

“성문을 담당한 이가 누구인가.”

“소, 소신입니다. 주군···.”

“그래, 왜 병사들을 뒤로 물렸지?”

“억울합니다! 제가 물린 것이 아니고···.”

“자네가 억울하건 말건 관심 없네, 왜 병사들을 뒤로 물렸나.”

“벼, 병사들이···.”

라다가이수스의 매서운 주먹이 떨고 있는 지휘관을 얼굴을 후려쳤다.

“억-”

“병사들이 왜 뒤로 물러났냐고!”

“그, 그것은 저도 잘···.”

“그래? 끌고 가서 목을 베라.”

“주군?!”

“주군,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를···!”

“끌고 가라고 했다!”

한 대 얻어맞은 지휘관은 아픔도 잊고 비굴하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라다가이수스의 결심은 확고했다.

다른 지휘관들과 장로를 바라보면서 도움을 구했으나, 모두 그의 시선을 외면할 뿐이었다.

그는 병사들의 손에 끌려나가면서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주군! 이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주군!”

잠시 바깥이 시끌시끌하더니, 이윽고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온몸에 피를 묻힌 병사가 들어와 라다가이수스에 물었다.

“주군, 시신은 어찌할까요.”

“잘 수습해서 가족들한테 줘.”

“알겠습니다.”

병사가 나가고, 라다가이수스는 막사 내의 적막을 깨며 물었다.

“장로.”

“예, 주군···.”

“자네는 우리 군의 피해 상황을 조사해서 저녁까지 가져오고, 다른 녀석들은 얼굴 보기도 싫으니 이번 주까지 저 성벽을 넘을 방법을 가져오도록. 못하면 최선두에서 성벽을 넘어야 할 거야.”

“예, 주군.”

병사들의 피해는 생각보다도 심했다.

전투가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3만에 가까웠던 병사들이었지만, 그중 사천 명가량이 돌아오지 못했다.

이는 순수하게 돌아오지 못한 이들만 계산한 것이었고, 전투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입은 이들까지 합치면 거의 오천에 달할 정도였다.

사상자가 이렇게까지 나오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병사들의 문제였다.

게르만 병사들은 좋게 말하면 용맹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규율이 없었다.

병사들은 같은 게르만인이라는 큰 틀에 묶여있긴 했지만, 그 안에서 고트, 반달, 수에비로 갈렸다.

또 그 안에서도 각자 부족들로 갈라졌다.

라다가이수스가 이들의 중심을 잡고는 있었지만, 오늘처럼 지휘관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경우가 종종 생기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병사들이나 지휘관을 처벌하기는 했지만, 그건 임시적인 방편이었을 뿐 본질적인 해결법이 아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메디올라눔을 포위한 라다가이수스의 군대가 골치를 썩이고 있을 때, 메디올라눔을 지키는 로마군의 사정도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사재기로 인해 식료품값이 치솟고 있던 차에 도시가 포위당하고 머리 위로 돌이 떨어져 버리니, 이제는 돈이 있다고 해도 식료품을 구할 수가 없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남성이라면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밀가루라도 배급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시민들이야 힘겹지만 버텨볼 만했다면, 도시 내의 빈민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식료품값이 요동칠 때부터 불안하던 것이 포위가 시작된 지 사흘 만에 벌써부터 굶어 죽는 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요안? 요안!”

“엄마···. 배고파요···.”

“아버지가 금방 먹을걸 구해오실 테니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줘···.”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있는 아들의 모습에 슬픔이 밀려왔으나,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에는 그녀 또한 너무 오랜 시간을 굶주린 탓이었다.

도시에 돌덩어리가 떨어지던 날.

먹을걸 구하러 간 그녀의 남편은 돌아오지 못했고, 아이 또한 굶주림으로 죽어버렸다.

아이의 시체를 안아 든 그녀는 거리로 향했다.

거리에는 그녀와 같은 수백 명의 이들이 모여있었다.

“내 집이···.”

“요안···. 요안···!”

“도대체 군인들은 뭘 하는 거야!”

“빵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데, 귀족들은 음식쓰레기로 산을 쌓던데.”

“에라 개 같은 세상! 확 망해버려라.”

거리 곳곳에 모인 시민들을 해산하고자 순찰대가 나섰지만, 역으로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 꼴이 되었다.

“지금은 전투 중이다. 당장 해산해라!”

“해산은 지랄, 네가 뭔데 우리보고 명령 질이야!”

“반복한다. 즉각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점점 흉흉해지는 시민들의 모습에 순찰대를 이끌던 병사가 침을 삼키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다른 순찰대원들도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 준비를 했지만, 시민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돌까지 주워서 던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

“전부 진압해!”

수십 명의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지만, 시민들의 분노는 꺼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더 분노에 차올라 손에 잡히는 것들을 던지거나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들고서 순찰대를 공격했다.

“후퇴!”

결국 버티다 못한 순찰대가 물러나는 것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미 거리에는 수많은 시민과 병사들의 피로 물든 뒤였다.

피 맛을 본 시민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상점을 약탈하고, 사람을 해쳤다.

그들을 따라 수많은 시민이 합류했고, 상황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이 소식을 들은 폴로와 심마쿠스도 이들을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이들을 말릴 수는 없었다.

“시민 여러분 잠시 진정하시고 제 말을···.”

“꺼져!”

대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가 노구를 이끌고서 시민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의 외침은 시민들에게 닿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심마쿠스는 폴로에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모든 일은 내가 책임지겠다.]

단 한 줄이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편지를 받아든 폴로는 고민에 빠져들었고, 주변에서는 그의 결단을 요구했다.

“장군, 코앞에는 적이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내분을 정리해야 합니다!”

“장군이 고민하실 때마다 거리에서는 죄 없는 시민들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본보기로 몇 명 죽이면 다시 조용해질 겁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폴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에 모여있던 시민들은 점점 늘어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검은 옷을 입은 친위대가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막아놓은 상태였다.

“적을 포위했습니다.”

“말조심하게 적이라니.”

폴로는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마르고 여위었으며, 하나같이 주변에서 여러 번 볼법한 이들이었다.

마리우스라면 어떻게 했을지를 고민해봤지만, 그는 마리우스가 아니었기에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판노니아에서 마리우스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마리우스 님, 이렇게는 못 살겠습니다. 그냥 저랑 같이 여길 뜹시다!’

‘지랄.’

‘당장 내일 저 멍청한 백부장 새끼를 따라가면 전부 죽는다니까요!’

‘잠이나 자라.’

‘아니, 전부 죽는다니까요?’

‘나도 알아.’

‘예? 아니 그럼 왜···.’

‘우리가 도망가면 시민들은 누가 지키냐?’

솔직히 그때는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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