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42/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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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모였는가?”

“예.”

“따라오는 자들은 없었고?”

“예. 마리우스 놈이 떠나고 친위대의 감시가 덜해졌습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라네, 우리가 그놈을 무시했다가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알지 않는가?”

“말도 마십시오. 한밤중에 친위대가 쳐들어오더니 자발적인 기부금이라고 얼마나 뜯어간 줄 아십니까?”

“그것뿐이겠습니까, 멀쩡한 갑옷을 뜯어고친다면서 추가로 더 뜯어갔지 뭡니까.”

“갑옷을요?”

한 귀족이 의문을 품자, 다른 이가 억울하다는 듯이 하소연을 했다.

“그놈이 멀쩡한 갑옷들이 낡아 빠졌다면서, 따로 고용한 장인들과 재산까지 모조리 긁어가 버렸소!”

“거기다가 최근에 빈민들이 우리를 보는 모습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예전에는 밥만 챙겨주면 고개를 조아리던 녀석들이, 이제는 대놓고 저를 욕하고 다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한 뚱뚱한 귀족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조했다.

“지난번에 마리우스 놈이 빈민들을 징집해간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이후부터 그런 모습이 종종 보이더군요.”

“허, 말세로군. 말세야.”

“그래서 우리가 모인 게 아니겠습니까?”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노인이 웃음을 지으면서 말하자, 방안의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마리우스. 그 야만인 놈이 뭘 안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우리에게서 뺏어갈 줄만 알지, 뭐 우리를 위해서 일하기를 했습니까?”

“자자···.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마리우스 놈과 그 밑에서 빌어먹는 에우트로피우스를 쳐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주최자로 보이는 노인은 방안에 모인 이들을 한번 쓱 훑어보면서 물었다.

“다들 좋은 의견이 있으신지요?”

“이렇게 모이기는 했으나, 저 친위대 놈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한 귀족의 말에 다른 이가 반박했다.

“가능하지요! 지금 친위대나 황궁이나 가니우스의 반란으로 인해 생긴 피해를 복구하고, 또 출정을 준비한다고 정신이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번에 동방 친위대를 복구하는데도 정신이 팔려있는 데다가 그 악랄한 마리우스 놈도 없으니 지금보다 좋은 때가 없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확실히 여러분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혁명을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한 법인데···. 다들 방법이 없겠습니까?”

“제 휘하에 있는 공방들에 은밀히 일러서 무기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저는 지방에 있는 제 노예들과 소작농들을 불러와 무장시키겠습니다!”

“음···. 다른 분들과는 달리 저는 내어놓을게 돈뿐이로군요. 미약하게나마 보태겠습니다.”

“하하하, 미약하다니요! 그 의지만 있다면 충분한 것을!”

“맞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귀족들이 하하 호호하면서 미래를 꿈꾸고 있을 때, 주최자인 노인이 말했다.

“하하하···. 다들 이렇게 의지가 강하니 마리우스 놈을 쓰러트리고, 이 땅에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들 오늘은 편히들 즐기시지요.”

다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동안 슬그머니 방을 빼져 나온 노인은 주변을 살피고는 후원으로 향했다.

“왔는가.”

“예, 나으리.”

건물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이가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

“이번에는 몇이나 모였는가?”

“이번에는 마흔세 명이나 모였습니다.”

“그래? 그들 중에 눈여겨 볼 자는?”

에우트로피우스의 두 눈이 달빛아래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친위대는 적지에서 행군한다. - 6

목표가 정해진 라다가이수스의 부대는 매서운 속도로 메디올라눔을 향했다.

판노니아와 그 인근을 지키던 기동부대가 가끔 그들을 막아섰지만, 압도적인 수적 차이에 밀려 도망치기 급급했다.

라다가이수스의 부대가 황도와 가까워질수록 시민들의 동요가 심해졌다.

폴로가 남아있는 병사들을 이끌고 시민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미 공포에 좀먹힌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글쎄 밀가루가 전부 팔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저기 쌓아놓은 건 모래에요? 돈은 두 배로 드릴 테니까 파세요!”

“이건 우리 가족들 먹을 거라고!”

“아니 사과 하나에 은화 다섯 닢이 말이 됩니까? 지난주까지만 해도 은화 두 닢이면 세 개는 샀잖소!”

“그건 지난주 가격이고, 너도나도 먹을거리를 사러 나오는데 나도 값을 올려야지 않겠어?”

야만인들이 다가온다는 소문이 퍼질수록 황도의 식료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지만, 스틸리코의 부재로 이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여러분! 빨리 황도를 떠나십시오! 이곳은 곧 전쟁터가 될 겁니다!”

“모두 남쪽으로 도망갑시다!”

거리는 피난을 떠나려는 시민들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병사들로 혼란스러웠다.

폴로는 당장 다가오는 전투를 준비하느라 바빴고, 심마쿠스 또한 아칸의 반란 이후에 귀족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느라 바빴다.

그나마 암브로시우스만이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음식을 베풀 뿐이었다.

“심마쿠스님, 병사를 추가로 징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스틸리코 장군에게 가게나.”

“장군께서 지금 자리에 안 계신 데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다고 내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닐세, 당장 거리를 나가보면 알겠지만 분노한 시민들이 금방이라도 들고 일어날 기세야.”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있기에는···.”

심마쿠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스틸리코 장군께서는 이렇게 바쁠 때 어딜 가신 것인지 원···.”

“심마쿠스 님께서도 모르시는 겁니까?”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지셨는데, 내가 어찌 알겠나? 장군의 가족들도 행방을 모르더군.”

폴로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래도 마리우스 님의 부대가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하니 조금만 버티면 될 겁니다.”

“그들이 올 때쯤이면 성이 함락당해있지 않겠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래 봬도 황도의 성벽은 높고 튼튼한 데다가 병사들은 용맹합니다.”

“자네가 그리 말해주니 힘이 나는군.”

“일단은 도시 내에 있는 빈민들이라도 끌어모아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필요한 게 있다면 주저 없이 말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갔다.

폴로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병력을 충원하려 했지만, 시민들의 외면을 받을 뿐이었다.

다들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과 목숨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고, 그런 이들 사이에서 폴로만이 외롭게 뛰어다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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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렇게 계셔도 되는 건가요?”

“안될 건 또 무어냐.”

스틸리코는 혼란스러운 바깥과는 다르게, 저택에 틀어박혀서 유유자적하게 아들과 바둑이나 두고 있었다.

“아버지···. 밖에서는 시민들이 황도를 떠나고, 폴로 경과 심마쿠스 경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이 모든 걸 지휘하셔야 할 아버지께서 이러시면···.”

“걱정하지 말아라. 마리우스가 오고 있다 테르만티아.”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마리우스 놈이 만든 이 바둑이라는 놀이를 아느냐?”

테르만티아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알긴 하는데···. 그게 이것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이 작은 네모난판 위에 무궁무진한 전략이 펼쳐진단다. 정말 신기하지 않으냐?”

스틸리코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을 두었고, 그의 아들인 에우케리우스의 얼굴이 굳었다.

스틸리코의 한수로 에우케리우스의 좌우 대마가 모두 잡혀버린 것이었다.

“야만인들이 이곳까지 온 순간, 여기가 놈들의 무덤이 되는 것이지.”

“졌습니다···.”

스틸리코는 시무룩한 에우케리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말했다.

“아직은 좁은 곳에 집중하면서 넓게 보는 시야를 기르지는 못했구나,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한 것이다. 너무 마음 쓰지 말아라.”

“예···.”

스틸리코는 아들을 위로했지만, 에우케리우스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스틸리코는 고개를 돌려 테르만티아에 물었다.

“스스로 죽으려고 달려오는 돼지들에게 내가 마음을 써야 하나?”

“돼지를 잡는 도살자는 마리우스인가요?”

“누군가는 하겠지. 지금은 마리우스가 제일 가능성이 크겠고 말이야.”

“가끔 아버지를 이해 못할 때가 있었는데, 오늘은 좀 심하네요.”

“그렇구나, 그럼 바둑이라도 한판 두겠느냐?”

스틸리코의 말에 테르만티아의 붉은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면서 말했다.

“바둑 좋죠···. 아버지, 그런데 보통 이런 건 내기가 끼어야 재밌는데···.”

“내기? 무슨 내기.”

스틸리코는 흥미롭다는 듯이 자신의 딸을 바라보고 있었고, 테르만티아는 스틸리코와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마리우스에게 편지를 받았어요.”

“내가 직접 전해주었잖니.”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쓰여있었는지 아세요?”

“내가 알아야 할 내용이냐.”

“아뇨, 그냥 안부를 묻는 편지였어요.”

테르만티아가 돌을 놓는다.

“안부라···. 결혼도 한 녀석이 무슨 짓인고.”

스틸리코도 돌을 두었다.

“하지만, 마리우스와 주고받았던 편지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어요.”

테르만티아는 스틸리코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듯이 진형을 무섭게 치고 들어갔다.

“그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다. 사사로운 마음은 버려.”

스틸리코는 노련하게도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테르만티아의 공세를 걷어냈다.

하지만, 돌을 두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둔 것이 테르만티아가 설계한 자충수라는 것을 말이다···.

“결혼이요? 아···. 그 여자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군인이 현지처를 두는 것쯤이야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겠어요?”

“혀, 현지처?”

테르만티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스틸리코가 눈에 띄게 당황했고, 그녀의 손끝을 타고 내려오는 바둑돌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마리우스가 황도로 오는 날이 제 결혼식이에요.”

“누구 마음대로?”

“제 마음이죠.”

“도대체 그런 놈이 어디가 좋다는 거냐?!”

“얼굴도 그 정도면 봐줄 만하고, 황제와 친한 데다가,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 전쟁 영웅에 젊잖아요.”

“그건 나도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냐!”

“그래서 그런 거예요. 아버지께서 은퇴하시면 그 사람이 뒤를 잇지 않겠어요?”

“네 동생이 있는데 왜 그런 놈을 쓴다는 게냐!”

테르만티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버지, 에우케리우스는 성격이 너무 급해서 안 되는 걸 잘 아시잖아요. 어쩜 부자간에 그리 닮았는지···.”

“에우케리우스는···.”

“어리죠, 지금도 그런데 크면 얼마나 더 심해지겠어요?”

“허···. 아직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많이 컸구나.”

“이런저런 일이 있었잖아요.”

어차피 스틸리코도 내심 마리우스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지라,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고마워요. 아빠.”

“크흠···.”

스틸리코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슬슬 황도에 쓸모없는 놈들은 걸러졌겠지.”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정치란 건 언제나 내일을 생각해야 해. 안 그러면 뒤처지기 마련이거든.”

테르만티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아빠···. 이 모든 걸 아빠가 설계하셨다는 거예요···?”

“그럴 리가 있나,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만 해주겠니?”

스틸리코는 미소를 지으면서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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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바글바글 하구나···.”

슬슬 날이 더워지고 점점 건조해지던 초여름.

서로마의 수도 메디올라눔(현재의 밀라노)에 라다가이수스와 그의 부대가 도착했다.

10만에 달하는 그의 부족민들로 들판을 가득 채운 라다가이수스는 메디올라눔의 높은 성벽을 보고 침음성을 흘렸다.

“생각보다 더 높은데···.”

“아무래도 로마 제국의 황도가 아니겠습니까.”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공성전은 정공법으로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적의 숫자가 적다고 하니, 괜찮을 것입니다.”

“성을 한 바퀴 둘러봐야겠어.”

성을 돌아보던 라다가이수스는 웅장한 메디올라눔의 성벽에 질려버렸다.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가장 높은 나무보다도 더 높은 성벽과 굳게 닫혀있는 성벽은 앞으로 있을 공성전의 위험을 짐작게 했다.

하지만, 단단한 철옹성 같아 보이는 메디올라눔에도 빈틈은 있었다.

“저기, 보이나?”

“무엇이 말입니까?”

“저 성문을 잘 보게나, 제대로 닫히지 않았어.”

“음···. 소신은 눈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더니···. 하늘은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군!”

라다가이수스가 발견한 것은 지난 아칸의 반란 당시에 문제가 생겼던 성문이었다.

문제가 생긴 성문을 고쳐야 했지만, 아칸이 벌인 일들을 수습하느라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었고, 성문은 여전히 고장 난 채였다.

물론 수성 측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은 알고 있었고, 임시로 성문을 보강하고 추가로 병력을 배치하는 등 준비를 해두긴 했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장군, 적이 너무 많습니다요···.”

“언제는 적었던 적이라도 있었느냐?.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마리우스 장군께서 오고 계신다.”

“마리우스 장군님이 오신다고요?”

폴로의 말에 경계를 서던 병사가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 되물었다.

“그래, 장군께서 대군을 이끌고서 오고 계신다. 며칠, 딱 며칠만 버티면 영광은 우리의 것이 되고···.”

폴로는 손가락으로 야만인들을 가르치면서 말했다.

“저 야만인들은 로마인들이 흘린 핏값을 자신들의 피로 갚게 되겠지.”

“뭔가 멋진 말 같습니다.”

“그런가? 사실 마리우스 장군에게 배운 것이라네.”

“오오···.”

둘이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쯤.

야만인들이 가져온 공성 병기들을 조립하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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