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4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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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이여! 우린 지난 전투에서 수많은 어린 형제들과 아들들을 잃어야 했다. 그게 우리의 잘못인가!”

[아닙니다!]

“저 로마인들이 잘못이다. 그들은 조상들의 땅을 뺏어가서 혼을 더럽힌 거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우리의 아이들마저 앗아갔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장로!”

“예, 주군···.”

“자네에게 내 검을 맡기겠네.”

라다가이수스는 자신의 검을 장로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내가 도망친다면 이 검으로 날 베게.”

“명을 따르겠습니다.”

장로는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병사들은 라다가이수스의 이름을 연호했다.

라다가이수스는 말에 올라서 병사들을 이끌었다.

“가자! 복수의 시간이다.!”

[로마놈들에게 죽음을!]

무키우스와 티투스도 몰려드는 야만족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쯧···. 아무래도 살기는 글렀군.”

“어쩌겠습니까, 이게 군인의 운명이지요.”

“나야 뭐, 쓸모없는 아들놈 하나뿐이라 걱정이 없지만···. 자네 부인은 어쩌려고 그러나.”

“강인한 여자입니다. 현명하기도 하고요. 어떻게든 잘 헤쳐나갈 겁니다. 오히려 그동안 해준 것도 없이 밖이나 쏘다니던 사람이 죽었으니 좋아할지도 모를 일이죠.”

티투스는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번들거리는 그의 이마에는 세월의 계곡이 깊어져 있었고, 새하얀 머리카락은 이제 변두리에나 남아있을 정도였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무키우스는 웃는 얼굴로 술병을 들어 쏟아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술에 취한 채로 병사들을 지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하하···. 그렇지요.”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고트, 반달, 수에비 연합군은 로마군의 거센 저항에도 무작정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많은 이들이 쓰러졌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야만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수많은 피를 흘리면서도 넘지 못했던 저지선은 너무나도 쉽게 돌파되었고, 언덕 위로 올라온 게르만 전사들과 로마군의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진형을 유지해라!”

“예비대 전부 투입해!”

로마군은 사력을 다해서 버텼지만, 몰려드는 밀물에 쓸려가 버리는 모래성처럼 천천히 무너졌다.

티투스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강건한 체력과 투지를 보이면서 야만인들과 싸웠지만, 개인이 수적 차이를 이겨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와 같이 싸우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고 최후에 그만이 남았다.

티투스는 집에 있을 아내와 고향 집을 떠올렸고, 이내 이름 모를 야만족 병사의 철퇴를 맞고서 쓰러졌다.

“로마놈이 쓰러졌다!”

그리고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의 갑옷을 빼앗고자, 혹은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야만인들에 의해 티투스는 난도질당했다.

무키우스는 제법 먼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남몰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장군, 피하시지요. 저희가 길을 뚫겠습니다.”

“됐다. 너희나 몸을 피해라, 늙은 나보다는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살아야지.”

“장군,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죽는 건, 농부가 밭을 가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야 자네들의 차례는 멀었으니 그만 물러가 보게.”

“장군님···.”

무키우스가 병사들을 돌려보내고 얼마쯤 지났을까, 군막을 들추면서 라다가이수스가 들어왔다.

무키우스는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 라다가이수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한 오십은 먹은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훨씬 젊어.”

[당신이 대장인가?]

“생각보다 예의도 못 배운 모양이고.”

[우리말은 할 줄 모르는 모양이군.]

라다가이수스는 목을 가다듬더니 이내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항복해라.”

“호오···. 그리스말이 제법이군.”

“목숨은 살려주겠다.”

“네까짓 놈이 내 목숨을?”

무키우스는 대놓고 라다가이수스를 비웃었고,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분노한 라다가이수스가 말했다.

“내 관대함을 모욕하지 마라!”

“관대함이라···. 이봐 애송이, 네놈이 로마인은 아니지만 가르침을 하나 내려줄 테니 똑똑히 들어라.”

술잔을 내려놓은 무키우스의 두 눈은 붉게 변했고, 입을 열 때마다 핏물이 한 움큼씩 튀어나왔다.

“내가 죽는 그 순간부터 네놈의 삶은 지옥을 향해 달려갈 거다. 그게 로마를 적대하는 자들의 말로다.”

“허···. 다른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거늘···. 장군이라는 자는 독을 삼키는군.”

“킥킥 클···. 장군의 용기는 병사의 용기와는 다른 법이지···.”

무키우스는 그 말과 함께 머리를 책상에 받으면서 숨이 끊어졌다.

“쯧···. 뭣들 하느냐 저놈의 목을 베어서 깃대에 매달아라. 우리가 이겼다.”

“주군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쓸데없는 곳에서 너무 많은 피가 흘렀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라다가이수스는 씁쓸한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라다가이수스는 피를 한 움큼 토하고 죽은 무키우스의 시체에 손을 대려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잠깐, 목을 베지 말고 로마놈들과 같이 들판에 던져버려.”

친위대는 적지에서 행군한다. - 5

“장군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영 아닙니다.”

“잠을 좀 설쳤더니 죽을 것 같군···.”

부대를 이끌고서 일리리쿰으로 향하는 길은 내게 무척이나 힘들고 고된 길이었다.

하늘은 핑핑 돌고 있었고, 땅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땅이 왜 흔들리는 거지?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면서 한 부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속도나 덩치를 보아하니 기병대가 아닐까 싶었다.

지평선 너머에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대의 등장에 데키무스가 긴장하면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투준비!”

데키무스의 목소리에 병사들이 빠르게 나를 중심으로 진형을 만들었다.

그동안에 배운 대로 착착 움직이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으나,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몸도 좋지 않으신데, 이곳은 제게 맡기시고 잠시 안에서 쉬시지요.”

“죽을병도 아닌데 호들갑 떨지 마.”

“그러시다면야.”

기병대는 우리와 가까워질수록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얼굴이 보일만 한 거리까지 와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말에서 내리더니 내 앞에 엎드렸다.

“장군!”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11군단이···.”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울먹이면서 뭐라고 하는듯했지만, 11군단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슨 일이 벌어진 지 대충 짐작이 갔다.

“시발, 그래서 몇 명 살려왔어.”

“예? 아직 말이 안 끝났는데···.”

“11군단 애들이 전부 죽었다는 그런 말 아니야?”

“죽는 건 못 봤습니다···.”

“그게 그거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무슨 상황이었는데.”

지휘관은 눈치만을 살피면서 대답하지 못했다.

이상함을 느끼고 있을 때, 데키무스가 호통을 쳤다.

“당장 말하지 못하겠나!”

“저는 11군단의 기병대장인 마요리아누스라고 합니다. 그···. 11군단은 달마티아(일리리쿰 지역의 속주, 지금의 보스니아 지방)에 도착해서···.”

마요리아누아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인데 머리가 어질거려서 잘 생각나질 않았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짧게.”

“보름 전쯤에 군단이 적에게 포위당할 때쯤 도망쳤습니다.”

마요리아누스는 눈을 질끈 감았고, 데키무스와 3군단의 군단장인 세르비우스가 길길이 날뛰었다.

“적을 앞에 두고 도망쳤냐는 건가? 그것도 전투가 막 시작할 때 말인가!”

“장군,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당장 목을 베야 합니다!”

“살려주십시오! 저는 그저 부하들을 구한다는 마음으로···.”

“으음···.”

머리가 아팠다.

이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목소리를 높여서 머리가 울렸다.

요 며칠간 잠을 설친 게 아직도 영향을 주고 있는 듯했다.

“장군, 이런 걸 고민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저런 놈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병사들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미칠 겁니다.”

“으음···.”

“장군!”

마음 같아서는 제발 입 좀 닥치라고 하고 싶었지만, 속도 울렁거리는 통에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제, 제가 도망친 것은 적군을 두려워한 것도 있지만, 부하들을 살리기 위함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놈!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이냐!”

“저, 저 혼자 처벌받는 것은 달게 받겠지만, 제 부하들은 제 명령을 따른 죄 밖에 없습니다.”

“이놈이 그래도!”

“그만!”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길길이 날뛰던 세르비우스가 내 눈치를 살피면서 입을 다물었고, 데키무스 또한 못마땅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잘 알아들었다. 그럼 판결을 내리지.”

모든 이들이 날 집중하고 있었다.

“전투 중에 겁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로마군에 겁쟁이는 필요 없다.”

“장군! 제발 살려주십시오!”

“너희들은 전투에서 너희의 불명예를 씻기 전까지 식사에 보리가 지급될 것이며, 군영 내에서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세르비우스가 조금 아쉽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으음···. 처벌이 조금 약한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처형하고 싶네만, 처형하고 시체를 치울 시간도 아깝네.”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다른 손으로 병사들을 가르치면서 말했다.

“끌고 가.”

“장군! 장군!!”

마요리아누스는 애달프게 나를 불렀지만, 더 이상의 자비는 없었다.

11군단이 위험했다.

예전에 머무르던 부대에 대한 애착은 없었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멀쩡한 군단 하나가 날아가게 생겼다.

“행군 속도를 높인다. 자는 시간도 줄여.”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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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리코는 라다가이수스를 메디올라눔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한 가지 소문을 퍼뜨렸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다음 수나 두게, 시간 끌려는 걸 모를 줄 알고?”

“아이 이 사람이! 한번 들어나 보게.”

“허, 그래 무슨 소식?”

“지난번에 황도를 발칵 뒤집어놓은 아칸 놈을 기억하나?”

“잊을 리가 있나, 그 새끼가 우리 집에서 밀가루를 세 포대나 뜯어갔어!”

“이번에 스틸리코 장군께서 그놈을 때려잡으려고 카르타고로 가셨다는군.”

“그게 정말인가?!”

“이크! 이 사람아 조용히 말해···.”

말을 하던 이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사람 참 조심성이 없어서···.”

“뭘 그렇게 조심하는가.”

“우리 사위가 몰래 알려준 것일세. 까딱 잘못하다가는 전부 큰일 난단 말이네!”

“자네 사위가 친위대 병사였던가?”

“그렇지.”

같이 바둑을 두던 시민이 감탄 성을 냈다.

“이야, 사위를 잘 뒀구먼.”

“친위대가 뭐 별건가. 바둑이나 마저 두세.”

“언제는 그렇게 자랑하더니만, 막상 칭찬해주려고 하니 부끄러워서 빼는 건가?”

“빼기는 누가 그랬다고!”

스틸리코가 수도를 비웠다는 소문은 정보에 민감한 상인들과 군부를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와 친분이 있던 이들이 그를 찾아갔지만, 스틸리코를 만날 수는 없었고,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그러니까, 스틸리코가 적어도 다섯 개 군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국경선을 넘은 이 시점에?”

“예···.”

라다가이수스 앞에 붙잡혀온 로마군 병사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다섯 개 군단은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야. 스틸리코라는 장군이 로마의 군사령관 아니었나? 그런데 수도를 비운다고.?”

“그것도 그렇군요.”

“어이, 네 말 확실한 거 맞아?”

로마 병사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인가?”

라다가이수스가 이후로도 수많은 로마 병사와 시민들을 포로로 잡고서 스틸리코의 행방을 물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더군다나 부대가 서쪽으로 향할수록 제각각이던 소문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칸을 토벌하러 시칠리아 인근에 함대를 집결시키시고···.”

“북아프리카 군단이 동원돼서 카르타고를 포위했다고 들었습니다. 밀가루값이 제법 뛸 것 같습니다.”

“듣기로는 카르타고에서 이미 공성전이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아들놈이 군단병으로 복무 중인데 얼마 전에 카르타고로 떠난다고 편지가 왔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말이 달라질 법했는데, 잡혀 온 로마인 대부분이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라다가이수스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찜찜한 기분에도 메디올라눔으로 진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우스가 이끄는 부대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출정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잡히기 전에 재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이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군.”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좀 무책임한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라다가이수스는 여전히 축 늘어져 있는 장로의 어깨를 보면서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쯧쯧···. 손자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뭘 그리 슬퍼하는가, 산 사람을 살아야지.”

“죄송합니다···.”

“다음에도 그런가면 크게 혼을 낼 것이네.”

“예, 주군.”

군막을 나서는 장로의 얼굴에는 분노와 원망이 가득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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