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4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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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집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달이 일곱 번쯤 지고 나서였다.

일주일 만에 출근한 황궁의 모습은 개판이었다.

꼮꼮꼮···.

“뭐야, 웬 닭들이···?”

“마리우스!”

황궁에는 닭들이 활개 치고 있었고, 복도에서는 고약한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기는 서기들과 신임 행정관들이 쓰러져 있었다.

“폐하, 일단은 제 뒤로 오시지요.”

조심스레 검에 손을 올리고서 꼬맹이를 불렀다.

꼬맹이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내 뒤에 붙어서 물었다.

“마리우스, 그동안 왜 안 나왔던 거야?”

“잠시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사람들은 왜 쓰러져 있는 겁니까.”

“다들 사흘 동안 밤낮없이 일하더니 쓰러졌어.”

“삼일 밤낮을 일했다고요···?”

꼬맹이를 돌아보니, 언제 잡았는지 하얀 닭 한 마리를 품에 안고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폐하, 설마···.”

“응?”

“아닙니다···.”

차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데키무스나 파비우스를 보지는 못하셨는지요?”

“파비우스는 누구야?”

“지난번에 제가 빈민가에서 영입한 사람이요.”

“아, 데키무스가 데려간 뒤로는 몰라.”

데키무스가 데려갔다고?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꼬맹이를 근처를 지나던 다른 친위대 병사들에게 맡기고는 황급히 병영으로 향하니, 수많은 병사가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대열이 흐트러졌다. 다시!”

“정신 똑바로 차려! 다 죽일 셈이야?!”

“그만.”

내 목소리에 병사들이 고개를 돌리더니 일제히 멈춰 섰다.

“장군, 오셨습니까?”

“어, 훈련 중인가?”

“어차피 곧 끝날 예정이었습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마저 하게, 잠시 파비우스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온 것이니.”

“예? 아, 편히 데려가시지요.”

파비우스를 데리고 병영을 나와서 잠시 황궁을 걸으면서 물었다.

“일은 할 만한가?”

“친위대나 일반 병사나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렇지,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한 법 아니겠나.”

“그렇습니다.”

“자네를 부른 건 다른 이유가 아니고, 일 하나를 맡기려고 부른걸세.”

“일···. 말입니까?”

“지난 가니우스의 반란으로 동방 친위대가 무너진 것 기억하나?”

“아, 예. 기억합니다.”

“자네에게 그 자리를 주겠네.”

파비우스는 크게 당황하며 물었다.

“아니, 저 같은 놈을 뭘 믿고 맡기시는 겁니까···?”

“아, 오해 말게. 이전과 같은 규모로 재건하라는 뜻이 아니야. 이름만 친위대지 하는 일은 에우트로피우스 경을 호위하면 되네.”

“예···? 그건 또 무슨···.”

“내가 떠나고 나서 장인어른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한데, 마침 자네가 제격이더군. 부대를 이끌어본 경험이나, 위기 속에서도 병사들을 살려낸 것 말일세.”

“제 뒷조사를 해보신 겁니까?”

“그럼? 친위대가 다른 사람의 추천으로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 건가?”

파비우스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슬그머니 어깨동무하면서 말을 꺼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어차피 나는 서부로 떠날 거고, 그럼 이곳에서 자네를 제지할 이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황제 폐하는···.”

“음? 당연히 그분을 모시는 것도 자네의 업무 중에 하나지, 단지 호위대상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났다 정도의 차이야.”

파비우스는 망설이고 있었다.

이런 좋은 제안을 왜 망설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찾은 쓸만한 이였기에 조곤조곤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싫다면, 돌아가게.”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친위대는 적지에서 행군한다. - 4

파비우스에게 동방 친위대를 맡긴 뒤로부터는 끝없는 업무의 연속이었다.

특별히 군영장을 두지 않았던 친위대와 근위 군단의 모든 식량과 피복류, 장구류 등등 기타 원정에 필요한 모든 물자의 이동이 내 최종재가를 해야 했다.

“끄어어어···. 죽을 것 같아···.”

행보관···. 존나게 크고 멋진 행보관이 필요했다.

나 대신 갈려 나갈 행보관!

그러기 위해서는 군대 자체를 내 입맛에 맞게 개조해야 했지만, 출정이 코앞이라 자칫 잘못했다가는 바뀌어버린 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들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래서 뭐···.

“장군, 금일 처리해야 할 문서들을 가져왔습니다.”

“거기 두고가···.”

“괜찮으십니까?”

말없이 손을 휘휘 저었다.

더 말할 기운도 없었다.

산처럼 쌓인 황금은 절로 기분을 좋게 만들었지만, 산처럼 쌓은 서류들은 몸을 축 늘어지게 했다.

종일 집무실에 틀어박혀서, 눈이 빠지라고 서류들을 검토하면서 틀린 부분을 찾아내고, 인장을 찍는 일의 반복이었다.

글만 적혀있는 문서들은 그래도 읽기는 수월해서 괜찮았지만, 숫자가 들어간 문서들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니 씨발 이건 또 뭐야!”

로마식 숫자를 머릿속에서 아라비아 숫자로 변환한 뒤에 계산을 끝마치고, 다시 로마식 숫자로 바꾸는 복잡한 과정이 시간을 배로 잡아먹고 있었다.

“숫자가 왜 하나같이 다 지랄이야!”

당장이라도 모든 숫자를 아라비아 숫자로 바꾸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도 모자랐기에 일단은 머리를 쥐어짜 내면서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 어머니의 말씀 중에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몸을 더 단련해야 해...!”

결론은 이상했지만 말이다.

이틀 내내 서류만 처리하고서, 눈붙일 시간도 없이 근위 군단과 친위대 개편작업에 들어갔다.

동부 친위대야 파비우스에게 맡긴다고는 했지만, 기본적인 틀 자체는 내가 잡아줘야 했다.

“혹시라도 다른 생각을 품으면 위험하니까.”

동부 친위대의 훈련방식부터 장비까지 전부 서부의 방식으로 뜯어고쳤다.

그리고 병사들의 선발방식도 군단병들에서 뽑아오는 것이 아닌, 시민들의 지원을 받는 형식으로 바꿨다.

다만,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고 15세에서 20세 사이에 본인이 소유하거나 부모가 소유한 재산이 일정 이하여야 했고, 복무기간은 최소 20년으로 잡았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기준에 들어맞는 이들은 빈민들이 대부분이었다.

훈련소에 모인 이들을 치료하고, 먹이는데 드는 돈이 더 많았지만, 돈이야 귀족들에게서 뜯어내면 될 일이었다.

“저 친구들이 싸움이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린놈들로 데려온 거잖아, 적당히 키우면 쓸만하겠지.”

“저런 게으른 족속들을 쓰시겠다니···. 장군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게으른 녀석들은 쳐내면 그만이야. 손을 뻗었는데 잡을 생각도 없는 녀석들한테 쓸 돈은 없어.”

“저들이 제대로 훈련이나 받겠습니까? 솔직히 헛돈 쓰는 게 아닐는지 걱정이 앞섭니다.”

“저렇게까지 해줬으면 충성심 하나는 보장받을 수 있지 않겠나? 나한테 필요한 건 잘 싸우는 병사보다 충성스러운 병사들이야.”

“뭐, 그러시다면야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동부 친위대의 개편을 끝으로 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모두 끝났다.

이제는 때려죽인다고 해도 움직이기 싫었다.

삼일 뒤에 있을 출정식 전까지 집에서 늘어지게 쉴 생각으로 집에 돌아왔지만, 에우독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안토니나는···?”

“황제 폐하께서 궁에 초청해서 잠시 궁으로 갔어요.”

역시 내 인생에 단 한 점의 도움이 안 되는 망할 꼬맹이였다.

에우독시아는 이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우독시아의 못된 손이 슬그머니 아래로 향했다.

오늘도 쉬기는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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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 생각보다 적의 저항이 거셉니다.”

“로마놈들이 백기라도 들고 도망갈 줄 알았나?”

“적의 사기가 높다는 뜻이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두들겨도 끄떡없는 게 말이 되나?”

라다가이수스는 지독한 로마군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여태까지 그가 만나왔던 그 어떤 적보다도 강인했고, 또 용맹했다.

그들은 세차게 이어지는 공세 속에서도 고지를 지켜냈고, 때때로 날카로운 반격을 통해서 일주일간 많은 병사를 잃었다.

“무슨 방법이 없겠나?”

“포위로 저들을 굶겨 죽이는 것 말고는 딱히 생각나지 않습니다.”

“안돼, 그건 너무 오래 걸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로군요.”

“후우···. 병사들의 사기는 좀 어때.”

“처참하지요. 이제는 공격에 나서는걸 두려워하는 이도 있습니다.”

“끄으응···.”

라다가이수스는 앓는 소리를 냈다.

강을 넘을 때만 해도 나름 괜찮았는데, 저 독한 로마놈들 때문에 일을 그르치게 생겼다.

“씁···. 어쩔 수 없지. 장로.”

“예, 부르셨습니까.”

“자네 손자가 올해로 몇 살이지?”

“예? 올해로 열셋쯤 될 겁니다만···. 갑자기 왜···?”

“자네에게 부탁이 하나 있네.”

라다가이수스의 입이 열리고 장로의 눈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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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로마군은 늦은 점심을 해결하면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연이은 전투들로 병사들이 지치기는 했으나, 병력손실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식량과 식수는 여유가 있나?”

“식량은 최대한 상하기 쉬운 것들부터 먹어치우고, 인근의 동물들을 사냥해서 식량을 아꼈습니다. 그리고 식수는 아직 여유롭긴 하나 땅을 파서 지하수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계속 수고해주게.”

“그나저나 병사들의 사기가 걱정입니다.”

“왜 그러는가?”

“일주일간 전투와 항상 적에게 포위당해있는 것 때문인지 병사들이 사소한 일로도 다투고는 합니다.”

무키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나, 최대한 좋게 타이르는 수밖에.”

“그럼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자네가 수고 좀···.”

무키우스는 군막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썹이 거칠게 휘었다.

“또 이건 무슨 소리인가?”

“확인해보겠습니다.”

티투스는 황급히 군막을 뛰어나갔고, 이내 모여서 웅성거리는 병사들에게 물었다.

“다들 무슨 일인가?”

“티투스 님, 적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 그럼 경종을 울리고 보고를 올렸어야지!”

“아니, 적이 오긴 하는데 그게···.”

“무슨 일이기에 그러나,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빨리 말해보게.”

“적을 이끌고 있는 이가 좀 어려 보입니다.”

“음···. 알겠네, 우선은 전부 전투를 준비하게.”

“예.”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티투스는 굳은 얼굴로 무키우스에 돌아갔다.

“왔는가? 무슨 일이었나?”

“적의 공세입니다.”

“별일 가지고 호들갑들이군.”

“선봉에 아이들을 동원한 모양입니다.”

무키우스는 혀를 찼다.

“쯧쯧···.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먼.”

“안 그래도 불안하던 병사들의 사기가 요동칠까 두렵습니다.”

전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야만족들의 진격은 로마군의 거센 진격에 틀어막혔고, 걸리적거리는 장애물들이 그들의 발을 붙잡았다.

그런 야만족들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다.

“베라트로, 저기 저 새끼 보여?”

“예, 잘 보입니다.”

백부장이 손가락으로 가르친 곳에는 다른이들보다 조금 작아 보이는 지휘관이 보였다.

전투는 처음인지 아군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저 새끼가 대장 같다. 처리해.”

“맡겨만 주시지요.”

부대 내에서 활쏘기 하나는 자신 있었던 베라트로는 곧 활을 재더니 그대로 쏘았다.

화살은 멋진 굴곡을 그리면서 지휘관의 목을 꿰뚫었고, 놈은 썩은 통나무가 넘어가듯이 넘어갔다.

“잘했어!”

이윽고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로마군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이 씨발···. 애새끼잖아···.”

“아니 무슨···.”

“저 새끼들도 단단히 쳐 돌았네.”

“아들놈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시체들 사이사이에 있는 앳돼 보이는 병사들이나 지휘관들의 모습에 로마 병사들은 오싹함과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고, 며칠이나 그런 일이 이어지자 군영 내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사라졌다.

무키우스와 티투스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11군단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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