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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강을 건넜다고?”
“예, 그렇습니다. 일리리쿰의 총독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동부에서는 별 이야기 없나?”
“마리우스 장군께서 병사를 준비하는 듯싶지만···. 아시다시피 동부가 요즈음 많이 힘들어서 대규모 파병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렇겠지, 마리우스가 땅에서 금을 파내지 않는 이상에 말이야.”
스틸리코는 침음성을 흘리면서 지도를 살폈다.
당장 도나우강을 건너서 일리리쿰 지방에 들어섰다고 한다면은 산 하나만 넘으면 바로 이탈리아 북부였다.
동부야 늦장 부려도 별 손해가 없었지만, 서부는 수도가 위협당하는 상황이었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병사는 어느 정도나 있지?”
“갈리아에서 훈련 중인 부대들이 있긴 합니다만,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잠깐 고민하던 스틸리코는 지도에 있는 강을 가르치면서 물었다.
“라인강. 그곳의 수비대를 빼 올 수는 없겠나?”
“장군, 그랬다가는 국경지대에 구멍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장 밀려오는 적들을 막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도 그건 좀···.”
“적들을 일리리쿰에서 막지 못하면 다음 전장은 이탈리아란 말이네, 이기던 지든 간에 정적들은 신나게 날 물어뜯을 걸세,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면 승리가 필요해.”
“장군, 마리우스 장군을 믿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스틸리코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마리우스가 당장 군대를 끌고 일리리쿰으로 향한다고 해도 족히 스무날은 걸릴 텐데, 군자금마저 모자라니 내년쯤이나 돼야 움직이겠지.”
“그래도 마리우스 장군 말고는 믿을만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흠···.”
스틸리코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내 정치 인생과 시민들의 목숨을 마리우스에게 맡겨보라는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지 뭐.”
“예?”
“혹시 모르니 수성준비를 해두게나. 제법 긴 싸움이 될듯하네.”
“수성전이라니요?!”
스틸리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적을 수도까지 끌어들일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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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다가이수스.
본래라면 이 남자가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수년이나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원 역사보다 빠르게, 더 큰 피해를 본 알라리크의 부재로 그 틈을 비집고 올라온 라다가이수스는 황량한 일리리쿰을 보며 혀를 찼다.
“여긴 뭐 이리 황량하지? 사람의 흔적은커녕 동물이 돌아다니는 흔적도 없어.”
“주군, 이곳은 사람들이 사는 곳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자리 잡고 살기에는 제법 괜찮습니다.”
“아니야, 고작 이런 곳에 살자고 강을 넘었겠는가? 주변을 살펴보게 부족민들이 모여 살기엔 너무 좁은 곳이야.”
“그러면 마음에 두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라다가이수스는 산 너머를 가르치면서 말했다.
“로마.”
“로, 로마요?”
“우린 로마로 간다.”
“주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라다가이수스는 당황하는 장로를 보더니, 이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하하, 걱정하지마! 로마는 지나가는 거지 우리 목적지가 아니거든.”
“예? 그럼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히스파니아(지금의 이베리아반도).”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따뜻한 남쪽이 살기 좋지요.”
“주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둘 사이로 병사가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동쪽 능선에 로마군이 나타났습니다···!”
“벌써?”
동쪽 능선을 살피던 라다가이수스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빠른데.”
“인근에 있던 부대가 움직인 것이겠지요.”
“여자와 아이들을 대열 안으로 불러모으고 싸움을 준비해.”
“그냥 피하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아니, 이탈리아로 들어가기 전에 연습 상대로는 제격이야.”
태양을 등지고 포진한 로마 11군단의 군단장 무키우스는 언덕 아래 들판에 바글바글하게 모여있는 야만인들을 보며 혀를 찼다.
“바퀴벌레처럼 바글바글하군.”
“적의 무장상태가 상당합니다.”
“힘든 싸움이 되겠군.”
“그래서 아드님도 멀리 보내신 게 아닙니까?”
티투스의 말에 무키우스가 흠칫 놀라면서 티투스를 돌아봤다.
“알고 있었나?”
“그렇게 대놓고 행동하시는데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허허허.”
“끙···. 부끄럽군.”
“아무리 못났어도 자식은 자식인 듯합니다.”
무키우스는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 녀석이 마리우스의 반만, 아니 발끝만큼이라도 닮았다면 좋았을 것을···.”
“아직도 후회하십니까?”
“그런 녀석인 줄 알았으면, 내 밑에서 차근차근 키웠겠지. 화딱지나니 그 이야기는 그만하게.”
“하하하, 그래도 마리우스가 인물은 인물 아니겠습니까?”
“뭐가 말인가?”
“저 같으면 친위 대장직에 오르자마자 우리 군단을 해체하려 들지 않았겠습니까? 사실상 자기를 버리고 간 것인데.”
무키우스나 티투스나 너 나 할 것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건 그렇지.”
“부하로서 그렇게 든든한 녀석이···.”
티투스의 말을 끊는 나팔소리가 일일이 꿈에 울려 퍼지면서, 고트족, 수에비족, 반달 등 여러 부족이 뒤섞인 라다가이수스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위대는 적지에서 행군한다. - 3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게르만 연합군은 천천히 11군단을 향해서 진군하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11군단의 지휘관 무키우스는 언덕아래에서 몰려드는 적을 보고는 군단 기병대에 명령을 하달했다.
“포위가 시작되기 전에 언덕을 내려가서 앞뒤에서 협공한다.”
11군단의 기병대장이었던 마요리아누스는 무키우스의 명령에 따라 언덕을 내려갔고, 적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마요리아누스는 압도적인 게르만족의 숫자에 겁을 집어먹었다.
“장군! 병사들이 준비를 마쳤습니다. 슬슬 공격명령을 내려주시지요.”
“너는 저들의 수가 보이지 않느냐? 저들에 비하면 우리는 한 줌의 모래야! 우리가 뭘 할 수 있다는 말이냐?”
“장군! 우리는 명령을 받았고 이행해야 하는 군입니다. 어째서 적을 앞에 두고 도망갈 궁리만을 하십니까!”
“싸움이 되어야 뭐라도 해볼 것이 아니냐! 이대로 공격한다고 한들 전황에 무슨 영향이 있겠느냐?. 난 이대로 말을 돌려서 황도로 향하겠다.”
“장군!”
“기병대를 이끄는 건 나야! 욕을 들어도 내가 듣고, 처벌을 받아도 내가 받는다! 여기서 싸우다 죽는 건 개죽음이야!”
마요리아누스는 거칠게 반발하는 부관의 뺨을 세게 후려치고서는 소리쳤다.
“자네가 그리 좋아하는 명령을 내리겠네, 당장 전장을 이탈해!”
“장군···. 아군이 전부 죽을 겁니다. 어째서 장군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야 이 미친 새끼야! 뒤지려고 싸우는 놈이 어디 있어! 죽으려면 너 혼자 죽으라고!”
“장군!”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로마 기병대를 발견한 반달 기병대가 맹렬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요리아누스가 반달 기병대를 피해 반대쪽으로 달려가자, 우물쭈물하던 기병들도 그 뒤를 따랐고, 잠시 망설이던 부관도 눈물을 보이면서 그 뒤를 따랐다.
“기병대가 도망가는군요.”
“별 기대도 없었네, 사실 도망가는 게 맞긴 하지.”
“그래도 명령 불복종 아닙니까?”
“이 상황에서? 허···. 자네는 나이를 먹어도 변함이 없구먼.”
“사람이 변하겠습니까? 제가 여태까지 본 사람 중에 바뀐 사람은 없습니다.”
티투스는 순간 마리우스를 떠올렸으나 고개를 저었다.
“이거 병사들에게 조금 미안한데.”
“다들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게 아닙니까.”
“몇십 년을 군에 몸담았지만, 병사들에게 죽으라고 명령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네, 이 정도면 미안해도 되겠지.”
“차라리 항복하시지요.”
“항복?”
무키우스는 코웃음을 쳤다.
“티투스, 30년 전에 갈리아에서 프랑크 놈들과 싸운 일 기억하나?”
“발렌티아누스 대제였지요?”
“그렇지. 찬 바람은 쌩쌩 불고, 병사들은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치고···.”
“그때 장군께서는 바지에 오줌도 지리시지 않으셨습니까?”
“자네는 부상병으로 빠지겠다고 손가락을 자르려고 하지 않았나?”
무키우스와 티투스는 눈을 마주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두 지휘관의 웃음소리에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도 지금만큼이나 힘들고, 고되고, 고통스러웠지만 굴복하지는 않았어.”
“그때 세베루스 장군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여기 있지도 못했을 게 아닙니까.”
“죽은 사람 이야기는 해서 무엇하나, 슬슬 싸움이나 준비하지.”
“하하하···. 루프스가 손주를 안겨주시는 건 보고 돌아가셔야지 않겠습니까.”
“흠···. 그 녀석을 닮은 녀석이 튀어나오면 안될 텐데 말이지···.”
둘의 잡담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야만인들은 악을 써가면서 언덕을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무키우스는 투구 끈을 정비하고서는 병사들 앞에 섰다.
“다들 많이 긴장한 모양이군.”
[아닙니다!]
“아니긴, 나도 긴장된다.”
무키우스의 말에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적들을 얼마나 죽일 수 있을지 긴장된다 이 말이야.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삭신이 쑤셔. 젊은 자네들을 어찌 이기겠나?”
[하하하하하.]
무키우스의 농담에 병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몇 명에서 시작된 웃음은 이내 군단 전체로 퍼졌고, 병사들이 해맑게 웃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무키우스는 검을 뽑아 들고서 태양을 가리켰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곁에 있는 동료와 튼튼한 팔다리를 믿고 싸워라! 우리가 로마를 버리지 않았듯이 로마도 우릴 버리지 않을 것이다!”
티투스가 검을 뽑아 들면서 힘차게 소리쳤다.
“ROMA INVICTA!”
[ROMA INVICTA!]
“전원 전투 위치로!”
무키우스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움직였다.
언덕을 반쯤 올라온 야만인들에게 화살 비가 쏟아졌고, 진지구축을 위해 준비해뒀던 돌과 나무가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아악! 내 다리!”
“앞으로! 어물쩍거리다가는 죽는다! 전진!”
“씨발!”
제법 빠르게 언덕을 올라오던 야만인 병사들은 어느 순간 진격이 멈춰 섰고, 로마군의 매서운 반격에 계속해서 쓰러지고 있었다.
“흠···. 생각보다 피가 많이 흐르는데.”
“주군, 병사들을 계속 보내시지요.”
“그래야지. 그런데 궁수들은 뭐하길래 아군이 옴짝달싹도 못하는 거야?”
“아마도 저 위치에서는 사격 각이 안 나오는 듯싶습니다. 거기다가 나무가 울창해서 적에게 별 피해를 못 주는 것도 있을 겁니다.”
“쯧쯧···. 좋은 위치를 빼앗겼군.”
“그래도 수적 차이가 압도적이니 금세 밀어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장로의 말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라다가이수스의 전사들은 결국 로마군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줄행랑을 치며 첫날의 전투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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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출정을 준비하던 내게 큰 문제가 닥쳤다.
그게 뭐냐고?
“절대 안 돼요.”
“아일라···.”
“결혼식 이후로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면서, 오랜만에 와서 한다는 말이 죽으러 간다는 거잖아요!”
“아니, 죽으러 가는 게 아니고···.”
참다가 결국 폭발해버린 에우독시아를 달랜다고 진땀을 빼고 있었다.
“당신이 죽으면, 저는 어떻게 살라고요! 안토니나는요? 가족 생각은 해보셨어요?”
울고 있는 에우독시아와 곁에서 눈치를 살피는 안토니나를 보고 있으니,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모두 다 먹고살려고 하는 일이었는데 바쁘게 움직인다고 가족을 등한시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안심이 되면서도 불안해졌다.
조심스레 에우독시아를 끌어안으니, 그녀 또한 손을 뻗어 나를 안는다.
안토니나도 조심스레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다 이해해. 내가 너무 개새끼였어.”
“아빠가 개였어···?”
안토니나를 품에 안고서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니, 에우독시아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뱀을 마주한 쥐처럼 그녀의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는 눈을 마주치자 몸이 굳어버렸다.
에우독시아는 담장을 넘는 구렁이처럼 자연스럽게 등을 쓸어올리면서 손을 머리로 향했고, 손가락으로 내 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가지 말라고는 안 할게요. 한 달···. 아니, 일주일만 같이 있어 주세요.”
“이, 일주일?”
“네, 일주일만 제 남편이자 안토니나의 아버지로 있어 주세요.”
판노니아에서 싸우던 시절처럼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고 해도, 지금의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미래의 결혼생활을 결정지을 분기점이었다···!
“일주일은 안 되겠는데.”
“아···.”
에우독시아가 크게 실망했다는 얼굴로 힘없이 손을 내렸다.
난 빈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에우독시아를 안아 들고서 말했다.
“못해도 보름은 돼야지. 그동안 출근도 안 할 건데···.”
“네? 자, 잠깐···.”
“아일라, 준비는 됐겠지?”
“자, 잠깐만요. 안토니나도 보는데···!”
“엄마,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역시 영특한 것이 내 딸다웠다.
“안토니나가 왜?”
에우독시아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후···. 이게 가장의 무게인가···?
정말 힘들군.
어차피 출병까지는 시간도 많이 남았겠다.
당분간은 얌전히 집에만 박혀있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