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 황제 폐하께서 오실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날 뭐로 보는 거야, 난 한번 한 말은 꼭 지킨다고.!”
“안토니나를 보러 오신 게 아니라요?”
“여기 음식이 별로인데.”
꼬맹이가 투정 부리는 척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요즈음에 환관들이랑 붙어 다니더니만 쓸데없는 걸 배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안토니나가 손수 준비해준 겁니다···. 맛이 없으신가요?”
“뒷맛은 굉장히 안정적이야···.”
음습한 꼬맹이 같으니라고···.
호노리우스를 뒤로한 채 참석해준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데키무스.”
“축하드립니다. 장군.”
“자네도 슬슬 결혼할 때 아닌가?”
“하하하···. 애만 셋입니다.”
“크흠···. 한창 귀여울 때겠군.”
“큰아이가 이번에 군에 입대합니다.”
그동안 생각보다 부하들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만회하려고 머리를 쥐어짜 내면서 내뱉었다.
“이름이 루키우스···. 였던가?”
“루시우스입니다.”
“이런!”
데키무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그런 것까지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군께서 저를 살려준 게 몇 번인데요.”
“그, 그런가?”
“장군께서 한 번씩 눈이 돌아갈 때마다 쩔쩔매긴 하지만, 그래도 대원들 모두 장군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칭찬이 과한 거 아닌가 데키무스? 듣기는 좋지만, 내 얼굴이 다 화끈해지는구먼.”
“장군께서 언제나 죽은 이들을 생각하시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장군 덕분에 살아난 이들을 돌아보시지요.”
“난 그런 적이 없···.”
“저는 장군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지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데키무스는 자기 할 말만 하고서는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식장을 벗어났다.
떠나가는 데키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올라가며, 피식 웃음이 터졌다.
“멋진 척하기는···.”
다른 친위대 병사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드디어 잔뜩 긴장하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이게 누구십니까? 이야-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하신 분들이 오시다니.”
“뭐요?!”
“아, 실수···. 제가 술이 좀 과했나 봅니다.”
귀족들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더 놀렸다가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제가 예의를 모르는 야만인이라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크흠···. 날이 날이니만큼 그러실 수도 있지요. 아무튼, 결혼 축하드리는 바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음식들은 입에 맞으시는지요?”
“솔직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얼굴 마주 보고 하하 호호할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무얼 말입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으니,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한 사람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편지! 도대체 어디서···.”
“드라우스!”
황급히 다른 이가 그의 입을 다물게 했지만, 이미 식장 내의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모이기 충분했다.
한창 안토니나의 관심을 끌려다가 실패한 호노리우스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평소였다면, 또 어떻게 지랄할지 한숨이 나올 상황이었지만, 그 대상이 내가 아니게 되니 이처럼 든든할 수가 있나!
“뭐야, 다들 무슨 일인데 소란이야.”
“폐, 폐하···.”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그저 다들 술에 취해서 큰 소리가 난 것이니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술?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사람들이 남의 결혼식장에서 술에 취해서 깽판을 부리고 있다고?”
“깽판이라니요···. 오해십니다. 그저···.”
“듣기 싫어! 너희 때문에 내가···. 아니, 마리우스가 곤란하잖아!”
호노리우스의 입이 열릴 때마다 주변에 있는 귀족들이 쩔쩔매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무슨 일이에요?”
“별일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갑작스러운 큰 소리를 듣고 에우독시아도 내게로 왔고,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에우트로피우스도 얼굴 가득 짜증을 달고 왔다.
“도대체 무슨 일 인가들!”
“에, 에우트로피우스님···.”
“남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온 손님이 이렇게 소란을 피워서 되겠는가? 아니면 내가 환관이라고 우리 가문을 비웃기라도 하는 건가?”
귀족들은 손을 내저으면서 뭐라 말하려 했지만, 에우트로피우스는 단호하게 손가락으로 밖을 가르치며 말했다.
“당장 나가게. 이 일은 기억해둘 것이네.”
“애들아. 손님들 나가신단다~”
내 목소리에 황궁의 노예들과 친위대가 몰려들어 한 명 한 명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이거 놔라! 이익···. 마리우스!”
“이런 예의란 건 쥐뿔만큼도 모를 야만인 같으니라고!”
교활한 에우트로피우스는 끌려나가는 귀족들을 매의 눈으로 살피면서 몇 명을 따로 정중하게 방으로 모시게 했다.
“마리우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사고 좀 그만치고 다니게.”
“아이고···. 저는 억울합니다. 제가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저들이 초대를 받아 와놓고서는 저리 방자하게 구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쯧쯧쯧···. 자네가 무슨 생각으로 저들을 초대했는지 이제야 알겠구먼, 그래도 적당히 뽑아서 쓸만한 사람들은 따로 빼두었네.”
“하하하···. 역시 장인어른이십니다.”
“다시 말하겠지만, 제발 사고 좀 그만치게, 아니 차라리 다른 곳에서 술을 먹고 패악질이나 부리게! 그편이 더 수습하기 편해!”
“제가 어디 그럴 사람입니까?”
에우트로피우스는 앓는 소리와 함께 이마를 짚으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성질 좀 죽이게.”
“급보입니다!”
그때 결혼식장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전령이 뛰어 들어왔고, 미끄러지듯이 내 앞에 바짝 엎드리면서 말했다.
“장군! 일리리쿰(지금의 보스니아, 알바니아 인근 지역)의 총독께서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일리리쿰 이라고? 또 게르만 녀석들이 강을 넘은 모양이로군.”
“예, 맞습니다.”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10만···. 10만으로 추정됩니다.”
왁자지껄하던 결혼식 하객들의 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친위대는 적지에서 행군한다. - 2
“신방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전쟁터로 끌려가게 생겼네.”
“마리우스 님 그래도 군사회의 중인데···.”
명색이 군사회의였지만, 이를 주최해야 할 군사령관은 콘스탄티노플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루피누스는 죽었고, 가니우스는 도망쳤으며, 티마시우스는 아시아에서 훈족과 싸우고 있었다.
그나마 친위대와 근위 군단을 가지고 있는 마리우스가 임시로 군 사령관직을 수행하면서 회의를 열었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이라고 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출병해야 합니다. 적이 10만이기는 해도 부족민들이 전부 넘어왔을 터. 순수하게 전투병력은 많아 봐야 삼만쯤 되겠지요.”
“삼만 명이 애들 장난입니까? 그들이 방향을 틀어서 황도를 노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장군! 황도의 방어가 우선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나가자는 이들과 콘스탄티노플부터 지켜야 한다는 이들로 나누어진 회의장에서는 장군들이 서로에게 온갖 험한 말을 하며 싸웠다.
이 모습을 조용히 지켜만 보던 마리우스가 탁자를 내려치면서 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만.”
회의장이 조용해지며 장교들은 조용히 마리우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적이 우리 국경을 넘어왔으니 이걸 가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출병하자니 황도가 불안하다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티마시우스 장군은 언제 돌아오지?”
“아, 그건 장군께서 보고서를 올리셨습니다.”
한 장교가 건네준 보고서를 대충 훑어봤다.
바른 필체만큼이나 내용도 상세했는데, 요약하자면 이번 훈족과의 전투에서 병사들이 많이 상했지만, 아시아의 도시들은 무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이 보고서가 언제쯤 온 건가?”
“이틀 전에 올라왔···.”
“그런데 왜 난 오늘 처음 보는 거지?”
다시금 장교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뭐하나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하···. 그래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일리리쿰으로 보낼 병사들은 준비되었나?”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부대는 장군 휘하의 근위군단과 일리리쿰의 11군단, 그리고 다키아(지금의 불가리아, 루마니아 쪽) 지방에 배치된 3군단이 있습니다.”
“3군단이 빠지면 다키아 쪽 국경에 부담이 생기지 않나?”
“근처에 5, 6군단이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럼 정해졌군. 2, 3근위군단과 3군단을 일리리쿰으로 보내.”
“장군께서 직접 가시는 겁니까?”
“여기서 나 말고 또 누가 가겠나?”
한숨이 절로 나오는 말이었지만, 장교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
출정이 결의되었어도 곧바로 출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키아에 있는 3군단과의 일정도 조율해야 했고, 훈련이 덜 끝난 근위 군단의 군단병들의 마지막 훈련도 끝내야 했다.
그뿐인가?
병사들을 움직이려면 식량이 필요했으니, 군량의 확보도 중요한 문제였다.
“장군, 군자금이···.”
“아니 씨발 뭐 멀쩡한 게 하나도 없어!”
알라리크의 그리스 약탈과 가니우스의 황궁 약탈로 허약해진 재정으로는 대규모 출정에 쓰일 군량을 마련할 돈도 끌어올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빼앗은 루피누스의 재산에 손을 댈 수도 없는 것이, 에우독시아와의 결혼으로 심기가 불편해진 스틸리코를 달래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다.
“장군, 군량이 없으면 병사들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나도 알아···.”
머리를 쥐어짤 시간이었다.
지금은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국가재정은 말라붙었고, 이를 당장 확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장 세금을 올리거나 특별세금을 걷어서 이민족을 막는다고 해도, 시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게 뻔했다.
당장 많은 자금을 운용하면서도 뒷말이 나오지 않을 곳이 필요했다.
“그런 곳이···. 있네?”
“예?”
“데키무스, 당장 친위대 병사들 소집해.”
“갑자기 말입니까?”
“수금시간이다.”
******
늦은 밤.
으리으리한 저택의 정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색 옷을 입은 이들로, 횃불 아래에서도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누구세요···?”
“친위대에서 나왔다. 이 저택의 주인은 안에 있는가?”
“주인 나리라면은 지금 주무시고 계실 것인데···.”
“당장 깨워.”
“친위대 나리들이라고 해서 이렇게 남의 집에서 행···. 커 헉.”
“깨우라면 깨울 것이지, 노예 주제에 혀가 길어.”
“이게 무슨 소란들인가!”
정문에서의 소란으로 잠이 깼는지, 저택의 주인으로 보이는 늙은이가 친위대에게 호통을 쳤다.
“아무리 권세가 드높다는 마리우스 장군이라지만, 무슨 이유로 다른 이들을 핍박하는가!”
“혹시, 드라쿠스님 맞으십니까?”
“그래, 내가 드라쿠스다. 내 마리우스 장군에게 직접 따져야···.”
“드라쿠스, 하루라도 여자가 없으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음. 거리의 여인들을 납치해서 강간하는 일이 비일비재.”
드라쿠스라고 불린 귀족은 친위대 병사의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오는 자신의 과거 행적들을 듣고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그런 근거도 없는 낭설을···!”
“마리우스 장군께서 이런 말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친위대는 목을 가다듬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국가의 재정상태가 어려워서 기부금을 받고 있으니 성의껏 마음을 담아서 보태라.”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투구에 달린 철 마스크 때문에 어둠 속에서 하얀 눈만이 반짝이는 친위대 병사의 말소리는 악마가 귓가에 속삭이는 말처럼 드라쿠스의 목을 조여오는 듯했다.
“어, 얼마나 필요한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훗날 ‘콘스탄티노플 약탈’이라고 불릴 이 사건으로 마리우스는 단번에 일리리쿰으로 출병할 수 있는 군자금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동안 보이지 않는 힘 싸움을 벌이던 콘스탄티노플의 귀족들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 버렸지만, 힘 싸움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면서 귀족들을 눌러버렸다.
“와···.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금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황금의 땅 엘도라도가 따로 없구먼.”
“엘도라도? 거긴 또 어딥니까.”
“있어, 저기 서쪽 바다 건너에 있는 황금의 도시 말이야.”
“에이, 거짓말 좀 그만하십시오. 서쪽은 낭떠러지인데 무슨···.”
“자네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모르나?”
“지구는 또 뭡니까. 땅은 둥근 원반형 아닙니까?”
“그래, 자네 말이 맞는 듯하군.”
쓸데없는 농담보다는 황금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막상 이렇게 모아두기는 했지만,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것도 모든 귀족을 털어먹은 게 아니라 한 개 구역의 귀족들만 털어서 나온 것이니, 새삼 로마의 빈부격차를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었다.
“금화를 제외하고는 전부 녹여서 금괴로 다시 만들어.”
“굳이 그래야 합니까?”
“다 생각이 있으니까 시키는 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