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13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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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의 어느 이름 없는 들판 위로 여러 마리의 말들이 내달리고 있었다.

마치 벌레떼가 움직이듯이 개인이 모여 한 덩어리로 움직이던 이들은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는 이들을 향해 힘껏 몸을 던졌다.

“아!”

[끝났군.]

두 지휘관의 말 대로였다.

중앙에 과도하게 밀집되어 있던 로마군은 단단했지만, 그만큼 포위당하기 쉬웠다.

이를 좌우익이 잘 받쳐줘야 했지만, 그들은 이미 우르겐의 기병대에 유린당해 무너진 지 오래였다.

“장군! 병사들이 포위당했습니다.”

“나도 보고 있다.”

“저들을 구해야 할 게 아닙니까!”

“예비대까지 전부 투입했는데 무슨 수로.”

“하다못해 퇴각 나팔이라도···.”

가니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가는 대열이 완전히 무너져서 몰살이야. 지금은 최대한 대열을 지키면서 포위망에 구멍을 뚫어야 해.”

“말이 쉽지 그걸 어떻게···.”

“지금 현장 지휘관이 누구지?”

“제 기억으로는···. 프라비아일 겁니다.”

“그 친구면 괜찮지. 우리는 이만 물러난다.”

“병사들을 버려두고, 말입니까?”

“그래, 붙잡혀서 민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가니우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전장을 벗어났다.

반면에 남은 로마군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훈족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장군! 사방이 적입니다!”

“나도 알고 있어! 도대체 가니우스 경께서는 무얼 하시는 건가!”

“그, 그것이···.”

“?”

프라비타는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말에 분노했다.

그가 가니우스의 휘하에서 복무한 지 몇 년이 지났건만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이, 미련 없이 버려졌다.

“장군···. 이제 어떻게 하지요?”

“병사들을 재정비해, 어그러진 진형을 최대한 바로 맞추고 정면을 뚫고 간다.”

프라비타는 자신의 분노를 조용히 삭였다.

지금 자신이 분노에 먹혀버리면, 휘하의 장병들이 모조리 몰살당할 게 뻔히 보였기에 그랬다.

프라비타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을 재정비하고, 훈족의 빈약한 모루를 향해 매서운 공세를 퍼부었다.

말 그대로 매서운 공세였다.

이전에는 체력을 아끼면서 방진 싸움을 이어가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서 오로지 살기 위해 적을 깨부수고 들어갔다.

안 그래도 불안하던 훈족의 보병 진은 일 점에 몰린 로마군의 공세를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왕이시여! 이곳은 위험합니다. 물러나셔야 합니다!]

[가지 않겠다. 아직 병사들이 도망가지 못했다.]

[아···.]

전열이 무너졌음에도 울딘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에서 내려 노예의 등위에 앉아서 전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민타스. 내 목숨을 너에게 맡기겠다. 할 수 있겠나?]

울딘에 이름이 불린 전사는 울딘의 앞으로 나아가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죽기 전까지 적은 왕의 존안을 볼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믿겠다.]

전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의 뒤에 중무장한 병사들이 모여들어 울딘을 둘러싸면서 방패로 벽을 만들었다.

전열을 깨부순 로마군은 막혔던 둑이 터져 나오듯이 훈족의 진에 균열을 더욱 넓혔다.

[장군! 피해가 너무 큽니다.]

[우리의 왕께서 명하셨고, 우리는 그걸 지키기만 하면 된다.]

[이건 미친 짓입니다. 아군을 전부 죽일 생각입니까?!]

[때가 되면 명령이 내려질 거다. 왕을 의심하지 말라.]

“포위망을 뚫었습니다!”

“이제 다시 병사들을 불러모아, 흥분한 녀석들이 혼자 동떨어지지 않게.”

“이대로 적진을 치는 게 아니었습니까?”

“자네 미친 건가? 이대로 도망가야지.”

“이렇게나 유리한데도 말입니까?”

“최고 지휘관이 도망간 순간부터 진 거나 마찬가지야. 우리도 목숨만 챙겨서 도망가면 돼.”

프라비타는 최대한 챙길 수 있는 병사들만 챙겨서 천천히 전장을 이탈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로마군이 온갖 이유로 죽거나 낙오되었지만, 결론적으로 프라비타는 삼천의 병력을 살려서 도망갈 수 있었다.

이 전투로 울딘과 가니우스 모두 큰 피해를 보았지만, 울딘은 사로잡은 로마군 포로들로 손해를 어느 정도 복구해냈고, 가니우스는 그동안 끌어모았던 병사들뿐 아니라 자신의 기반마저 무너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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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라고?”

“제 딸입니다.”

“자네 혹시 뭐 잘못 먹었나?”

에우트로피우스의 심기가 심히 좋지 못했다.

에우독시아가 안토니나에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아일라는 뭐라고 하던가?”

“괜찮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귀여운 딸이 생겨서 좋다고 하더군요.”

“쯧···. 당사자들이 그렇다니 내 더는 말하지 않겠지만···. 저런 근본도 모를 아이를 입양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서 한 행동인가?”

에우트로피우스의 말에 이해가 안 됐다.

무슨 이유가 있었나?

“그 표정을 보니 또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른 모양이군. 아이고 머리야···.”

“별다른 일이야 있겠습니까.”

“다른 이들이 자네를 뭐라고 보겠나! 안 그래도 출신도 모를 이민족이 권력을 잡은 데다가 환관의 딸과 결혼하는데 뒷골목에서 주워온 양녀가 있다고? 허, 참으로 재밌군.”

“원래 뒤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지 않습니까.”

“나라님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의 평판이 떨어진단 말일세! 평판!”

“저는 신경 안 씁니다.”

“그게 자네 혼자서만 신경 안 쓴다고 끝날 일인가? 주변의 모든 이들이 자네와 가족 모두를 손가락질할걸세.”

“아, 그건 괜찮습니다.”

“괜찮아?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요 며칠간 편지를 좀 썼거든요.”

아주 질릴 때까지 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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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낮잠을 자던 이가 몸을 일으키며 나른함을 즐기고 있었다.

그의 비대한 몸뚱어리는 말을 잘 듣지 않았지만, 그래도 천천히 몸을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나으리.”

“들어오게.”

남자의 말에 늙은이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와 편지를 한 장 건넸다.

“황궁에서 온 편지입니다. 나리께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나한테? 황궁에서 편지가 오다니 별일이군···.”

남자는 편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편지를 밀봉한 양초에 찍힌 문양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흠···. 마리우스로군 볼 것도 없다. 태워라.”

“나으리 그래도 황궁에서 온 것인데···.”

“기본도 모르는 야만인이 쓴 글을 내가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단 말이더냐?”

“그, 그것이···.”

“왜? 무슨 일이 또 있느냐?”

“이 편지를 전해준 친위대 병사들이 편지에 대한 답을 받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남자의 얼굴은 이내 끓는 주전자처럼 달아오르더니 코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올 듯이 씩씩거렸다.

“보자 보자 하니 그 끝을 모르고 날뛰는구나! 오냐 좋다. 그까짓 편지가 뭐라고!”

남자는 화를 내면서 편지를 거칠게 뜯어서 내용을 확인했다.

글을 읽은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를 터뜨리던 남자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이, 이게 무슨···.”

편지에는 그동안 루피누스에게 받아왔던 뇌물들의 명세와 그가 저질렀던 수많은 위법사례에 대한 것이 적혀있었고, 마지막 줄에는 며칠 뒤에 있을 그의 결혼식에 초대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화로에 던져버렸겠지만, 이글을 보낸 것이 마리우스라는 게 그를 두렵게 했다.

마치 그의 귓가에 마리우스가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알지? 처신 잘하라고.]

친위대는 적지에서 행군한다. - 1

사람 일이라는 건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나이 스물여섯에 이역만리, 아니 수천 년 전 고대 로마제국에서 가정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네 생각.”

“다른 여자 생각하셨나 보네요?”

보통은 감동한다거나 쑥스러워하는 게 정상 아닌가···?

왜 저런 대답이 나오는지 모르겠네.

절대로 찔리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건 아니다.

진짜로.

“그럴 리가 있나.”

“후후···. 괜찮아요. 다만···.”

에우독시아는 내 오른손을 붙잡아서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얼굴에 비비면서 말했다.

“오늘만큼은 저만 생각하셔야죠.”

“크흠···.”

그녀의 미소는 한 여름 잘 달궈진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내 마음을 녹였다.

얼굴이 절로 붉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상의도 없이 아이를 입양한 건 섭섭하기는 했어요.”

“그건···.”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 그냥 제 기분이 그렇다는 거예요.”

감정이 실리지 않은 나긋나긋한 말이었지만, 듣자마자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오싹함에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부터는 저랑 상의하고 해주세요.”

“물론이지요. 부인.”

“가실까요?”

에우독시아의 손을 잡고서 천천히 걸어가니, 기다리고 있던 친위대 병사들이 문을 열어주면서 우릴 환영했다.

“친위대장 마리우스 경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별궁 내에 마련된 정원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을 통해 들어오는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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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결혼식에 대한 소문은 서부까지 흘러들어와 스틸리코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당연하게도 이 소식을 들은 스틸리코는 대로했고 말이다..

“마리우스 이 미친 종자를 보았나! 남의 딸을 홀려놓고 뭐?! 결혼식!”

이 소식을 전해온 전령은 스틸리코의 분노에 벌벌 떨면서도 본분을 잊지 않겠다는 듯이 편지 한 통을 건넸다.

“이건 뭔가.”

“마, 마리우스 장군께서 보내셨습니다···.”

스틸리코가 편지를 뜯어보려 하니 전령이 그를 제지하면서 편지를 하나 더 꺼냈다.

“아, 장군! 그건 장군의 것이 아닙니다. 이게 장군에게 온 편지입니다.”

“그럼 이건 뭔가?”

“그···. 테르만티아 양에게 정기적으로 보내는 편지라고···.”

“이건 무슨···.”

“저,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집무실에 홀로 남은 스틸리코는 말없이 편지봉투를 뜯어 내용을 살폈다.

찬찬히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스틸리코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허허···. 마리우스 이런 로마에 둘도 없는 멍청이 같으니라고···.”

스틸리코가 받아든 편지지에는 루피누스의 재산목록이 빼곡하게 적혀있었고, 마지막 줄에는 마리우스가 쓴 장문의 변명문이 있었다.

[친애하는 스틸리코 장군님께 ··· 이번에 루피누스에게서 빼앗은 재산목록을 함께 첨부합니다. 부디 로마의 발전을 위해 써주십시오 ··· 제가 동부에서 결혼을 진행한 것은 장군을 기만하려는 것도 아니고, 테르만티아 양을 가지고 놀려고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저 에우트로피우스와의 ··· 모쪼록 웃는 얼굴로 뵈었으면 합니다.]

“미친 새끼.”

스틸리코가 내리는 가장 정확한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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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리크가 몰락한 도나우강 너머에서는 그의 뒤를 잇고자 하는 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고트, 반달, 수에비등 가릴 것 없이 대부분 부족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주변의 작은 부족들을 합쳐가면서 덩치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도나우강 인근을 통일한 이가 있었다.

“주군, 전부 이동준비를 끝냈습니다.”

“수고 많았다.”

늘 그렇듯이 한 무리의 게르만족들이 강을 넘어올 준비를 했다.

다만, 이들은 다른 게르만 무리와는 다르게 대규모였고, 또 그동안의 전투로 다져진 베테랑들이었으며, 약탈이 아닌 정착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척박한 판노니아를 벗어나, 풍요로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가려 했다.

로마로 말이다.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게르만족의 움직임은 규모가 규모인지라 금세 인근의 로마군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장군, 급보입니다.”

“또 야만인들이 강을 넘은 건가?”

“그렇긴 합니다만, 이번에는 그 규모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습니다.”

“많다?”

“이를 본 병사의 말에 따르면 족히 10만은 넘어간다고 했습니다.”

“10만?!”

“그것도 그들이 가진 말과 수레 등으로 어림짐작 한 것인지라 더 많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10만···? 10만이라고···?”

일리리쿰에 주둔 중인 11군단의 군단장 무키우스는 적의 압도적인 숫자에 할 말을 잃었다.

이건 군단장의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총독께서는 무얼 하시는가?”

“총독께서는···. 11군단에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지연 작전을 펴라고 명하셨습니다.”

“뭐?! 그 새끼가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건가?”

“주변에서 대응 가능한 부대는 아군뿐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지원이 올 때까지만 버텨달라고···.”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하는 거잖아! 적은 10만이라고! 순수하게 전투병력만 따지면 아무리 적어도 이만 명은 훌쩍 넘어갈 게 분명한데, 고작 오천으로 뭘 어찌하라는 거야 씨발!”

티투스는 말이 없었다.

그런 티투스를 보면서 무키우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말을 이어갔다.

“오천이라고, 오천! 오만이 아니라 오천! 지연 작전이고 나발이고 당장 모습을 보이기만 해도 쓸려나간단 말이야!”

한참 화를 내던 무키우스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뱉으면서 말했다.

“티투스. 자네가 조금 고생해주겠나?”

“명령만 내리십시오.”

“1대대에 있는 그 멍청이 대신 자네가 대대를 끌고 나가서 적의 정확한 규모와 상황을 살펴주게.”

“교전은 회피해야겠군요.”

“그래, 병사들을 허튼 곳에서 낭비하지 말게.”

“군단장님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티투스가 군막을 빠져나가고 무키우스는 한층 복잡해진 얼굴로 지도만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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