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129/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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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뒷골목을 통해서 도시 외곽을 빠져나오니 소녀가 내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음···. 그러게 어디로 가지.”

일단 거기에 아이 혼자 두기에는 위험해 보여서 데리고 오기는 했는데 마땅히 맡겨둘 만한 곳이 없었다.

당장 빈민들이 굶어 죽는 건 신의 뜻이라고 하는 곳인데, 보육원이 있을 리가 있겠나.

차라리 노예 상인에게 아이를 맡기는 게 인간적이라고 칭송받는 시대였다.

적어도 아이가 굶주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없어요.”

“이름이 ‘없어’야?”

“아니, 이름이 없어요.”

“아···.”

부모가 채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전에 죽은 모양이었다.

“그럼 뭐 내가 하나 지어줄까?”

“왜요?”

“왜라니···? 사람들은 저마다 이름이 있는데 너만 없으면 이상하잖아.”

“그런가요?”

“음···. 에밀리아 어때?”

“촌스러워요.”

아무래도 내게 이름 짓는 재주는 없는 듯했다.

소녀는 진짜로 별로였는지 정색까지 했다.

“그렇구나···. 그럼 뭐 천천히 생각하면 되겠지.”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마리우스. 가이우스 마리우스야. 그리고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아저씨는 좀···.”

“그런데 이제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글쎄다.”

조금 고민되었다.

다른 사람한테 맡기자니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 버리고 가자니, 내 마음속 양심이 발목을 잡았다.

“으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잠시 고민해봤지만, 늘 그렇듯이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골치를 썩일 바에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꼬마야, 아저씨 따라갈래?”

“엄마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어요.”

“으음···. 그것도 맞는 말이구나.”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지만, 그렇기에 소녀가 더 마음에 들었다.

호노리우스와는 다르게 말도 잘 들었고, 똘똘한 데다가 귀엽기까지 했다.

아니, 꼬맹이에게 비교하기엔 소녀에게 미안해지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날 따라오면 매일 배부르게 먹고, 따뜻한 집에서 자고 좋은 옷도 입을 수 있지.”

“으음···. 그런데 저는 아저씨를 오늘 처음 만났는걸요. 아저씨가 나쁜 노예상인 이면 어떻게 해요?”

“노, 노예상인?”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흠흠···. 아저씨는 저기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이 갑옷 보면 모르겠니?”

내심 소녀가 알아봐 주길 바랐지만, 유심히 살펴보던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래? 이거 당혹스럽네.”

“그래도 아저씨는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소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니까, 따라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훌륭한 선택이다.”

소녀의 거칠고 엉겨 붙은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면서 황궁으로 향했다.

정문에 서 있던 친위대 병사들이 멀리서 걸어오던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줬다.

“대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자네들이 고생이 많아.”

“앞에서 서 있기만 하면 되는데요 뭘···.”

“별일 없고?”

“폐하께서 장군을 찾는다고 두 번이나 도망치셔서 찾느라 애쓴 것 말고는 없었습니다.”

“쯧쯧···. 언제쯤 철이 드시려나.”

“어···. 음···.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 우리끼리 응?”

“그런데 이 아이는 누굽니까?”

시선을 조금 내려니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처음 보는 친위대 병사들의 험악한 겉모습에 긴장했는지 몸을 떨고 있었다.

“내 딸.”

“...?”

내 말을 들은 병사들의 얼굴에는 수없이 많은 갈고리가 생성되고 있었다.

내 얼굴과 소녀를 번갈아 보며 다시 물었다.

“딸이요? 장군께 숨겨둔 가족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건 아니고, 오늘 조금 일이 있어서 내가 데려다가 양녀로 입적하려고.”

“좋은 일 하시는군요.”

“내일 아침 일찍 내 망토랑 브로치를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을 거야. 내 이름을 대면 안내해줘.”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을 지나쳐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풍경에 정신이 팔려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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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들에게 소녀를 맡겨두고서는 방으로 돌아와 방 한구석에 쌓여있는 서류뭉치를 만지작거렸다.

대부분이 한번 만나자거나 청탁을 하는 쓸모없는 편지들이었고, 가끔 자신에게 투자해달라는 애원이 담긴 편지들도 있었다.

“이게 뭐야.”

그렇게 찬찬히 편지들을 둘러 보는 중에 루피누스의 인장이 찍힌 문서가 하나 튀어나왔다.

겉면에는 루피누스의 인장 외에는 별다른 게 없어서 별 생각 없이 안의 내용을 열어보니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대부분이 유력가문의 귀족이나 상인, 원로원의 의원들이었다.

“뭐지···? 뭐 이런 걸 만들어놨어.”

문서를 찬찬히 살펴보니 이들의 이름 옆에는 숫자가 적혀있었는데, 로마식 숫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내가 보기에도 그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 수 있었다.

“허허···. 이 새끼들 봐라?”

이건 루피누스의 장부였다.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는지 그 대가로 무엇을 받아냈는지에 대한 게 적혀있었다.

루피누스의 성격상 누가 배신할지 몰라서 적어놓은 듯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죽어버렸고, 문서는 내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런 위험하면서도 중요한 물건이 내 손에 들어왔음에도 이것을 마땅히 쓸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곧 동부를 떠날 텐데 동부의 귀족들과 척을 져서 좋아질 게 뭐가 있겠는가?

차라리 돌아와서 쓴다면 몰라도.

그렇다고 에우트로피우스에 넘기기도 그런 것이 그의 영향력이 동부에서 너무 커져 버리면, 나중에 동부로 돌아왔을 때. 역으로 날 잡아먹으려 들 수도 있었다.

“이걸 어떻게 쓴다···.”

잠시 생각을 했다.

이 장부에 적힌 주인공들은 자신이 이런 곳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서 좋아질 게 뭐가 있을까···?

친분.

친분과 호의를 쌓을 수 있었다.

“편지가 필요하겠어. 아주 많이.”

로마를 떠돌 행운의 편지가 말이다···.

흑갈색은 헤이즐넛 - 5

며칠 동안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정확히는 방에 틀어박혀서 종일 편지만 주야장천 써 내려갔다.

평소 같았으면 서기들을 불러서 대필을 맡겼겠지만, 지금 궁내에 있는 서기들이 전부 황제의 집무실로 불려가서 로마제국을 굴리는 톱니바퀴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종일 글만 쓰면 안 심심해요?”

“내 걱정 해주는 거야?”

“아뇨, 제가 심심해서요.”

“...나가서 놀렴.”

“아는 사람이 없는걸요.”

“나도 그래.”

“그런데 편지는 뭘 그렇게 많이 쓰시는 거예요.”

“이곳저곳에 필요한게 있어서 말이야.”

“저는 필요한게없어요.”

“안토니나, 굳이 내 눈치볼 필요없어. 조금 어색하겠지만 금새 익숙해 질거다.”

안토니나, 얼마 전에 데려온 소녀의 새 이름으로 나름대로 여러 책을 뒤져가면서 만든 이름이었지만, 정작 안토니나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조용히 방안에서 책을 보거나 창밖으로 바깥 풍경을 감상하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궁안을 구경하는 것 뿐이었다.

“편지 쓰는 게 업무인가요?”

“업무의 일부라고 할 수 있지.”

“아빠는 글을 잘쓰시나봐요.”

“남들처럼은 쓰지.”

안토니나는 책상옆에 두 손을 올리곤느 까치발을 들고서 힐끔 편지의 내용을 훔쳐봤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지만, 안토니나는 뚫어져라 편지지 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 이 내용은 국가 기밀입니다.”

“국가 기밀이 뭐에요?”

“보면 안된다는 거지.”

“저는 봐도 모르는걸요.”

“그래?”

안토니나를 안아들고서 내 무릎에 앉히니, 내 손에 들고있던 깃펜을 빼앗아 들고서는 내가 쓴 글자를 따라적었다.

“보세요! 저도 글을 썼어요.”

“오... 제법인데?”

안토니나가 썼다는 글은 그림에 가까웠지만 따로 말하지는 않았다.

“안토니나 심심하니?”

“으음... 아뇨!”

“심심하면 밖에서 산책이라도 할까?”

“산책이요?!”

기지개를 켜면서 굳은 몸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안토니나가 조심스레 내 뒤에 따라붙었다.

방을 벗어나 별궁에 딸린 정원을 걸었다.

지금이 봄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수많은 꽃이 피어있었다.

“환관들이 고생이 많았겠는데.”

“아빠! 이거 보세요.”

내 나이 스물여섯에 아빠 소리를 듣게 될 줄 몰랐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며칠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던 안토니나는 다시 밖으로 나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좀 야윈 게 안쓰럽긴 했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꽃을 함부로 꺾으면 환관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분들이 화낼 거야.”

“화내신다고요?!”

안토니나는 황급히 손으로 땅을 파내더니 손에 들고 있던 꽃을 다시 묻었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내 입가에는 미소가 드리워졌고, 안토니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너무 걱정하지마. 환관 아저···. 흠. 아무튼, 환관들이 혼내진 않을 거야.”

“정말요?”

“그럼.”

안토니나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피곤했던 일이 기억의 저편으로 날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항상 내가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이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마리우스!!”

단단히 화가 난듯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지금 업무를 보고 있어야 할 꼬맹이가 잔뜩 화가 났는지 쿵쾅거리면서 뛰어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폐하. 실로 오랜만에 뵙는군요.”

“너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때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가고! 또···.”

“그러시군요. 그래서 일은 다 처리하셨습니까?”

“아니, 나도 도망 왔어.”

“......”

당당한 호노리우스의 태도에 할 말을 잊었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업무가 남아있는데 도망을 치시면···.”

“마리우스가 도망가서 일이 많은 걸 어떻게 해.”

“도망가다니요. 제 삶을 찾는 여행길에 올랐다고 해주시지요.”

“그럼 나도 그거 할래.”

머리가 핑 도는 느낌에 이마에 손을 댔다.

그 모습에 안토니나가 화들짝 놀라면서 말했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 괜찮아.”

안토니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뒤를 돌아보니 호노리우스가 굳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누구야?”

“제 딸입니다.”

호노리우스는 위아래로 날 훑어보고는 말했다.

“안 닮았는데?”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애먼 곳에서 어이없게 죽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제사상에 향 피워줄 사람은 있어야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알기 쉽게 설명해.”

“입양했다는 거죠.”

“그래?”

호노리우스는 흥미가 생겼는지 안토니나를 유심히 살펴봤다.

그런 꼬맹이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안토니나는 내 뒤로 숨어버렸고, 말이다.

“이름이 뭐야?”

“이름은···.”

“마리우스한테 물어본 게 아니야.”

꼬맹이의 눈은 안토니나를 향해 있었다.

안토니나를 바라보는 꼬맹이의 눈빛이 묘한 것이 보는 내가 다 기분이 나빠질 정도였다.

“아, 안토니나에요.”

안토니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호노리우스는 만족했다는 듯한 미소로 답했다.

“좋은 이름이네. 혹시 닭 좋아해?”

“닭이요···? 좋아하긴 하죠.”

“그래? 나도 그런데!”

둘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묘하게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호노리우스가 안토니나에 관심을 보였다는 게 더 놀라웠다.

주변에 아무리 여자들이 득실거려도 눈길 한번 안 주던 녀석이 도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

안토니나도 자기 또래의 아이를 만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제법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분명 겉보기에는 좋은 모습인데···. 왜 기분이 나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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