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128/187)

흑갈색은 헤이즐넛

서로마의 수도 메디올라눔에서 일어난 아칸의 반란은 스틸리코에 진압되었다.

주동자들은 대부분 붙잡혔지만, 핵심인물인 아칸은 쥐도새도 모르게 포위망을 뚫고서 도주했다.

“늙은 놈이 생각보다 잽싸군.”

“도대체 어떻게 도망간 건지가 의문입니다.”

“됐네, 놓친 건 놓친 거지.”

“추격대를 편성할까요?”

“대충 어디로 도망갔을지는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스틸리코는 이번 반란에 가담한 인물들의 명단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흠···. 제법 많군.”

“거르고 걸러낸 게 이 정도입니다.”

“이보게 가우덴티우스. 참 신기하지 않은가?”

“뭐가 말입니까?”

스틸리코는 팔랑거리는 서류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서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가우덴티우스의 앞에서 서류를 흔들었다.

“이 많은 사람이 모여서 나 하나를 잡으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수도군단장이 돌아선 것은 좀 위험했습니다.”

“그래, 그건 나도 예상 밖이었지. 마리우스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래도 진압하셨겠지요. 그게 장군이시잖습니까.”

“이 정도 피해로 끝낸 게 다행이지.”

이번 반란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군부였는데, 스틸리코가 공들여 기른 장교 진들이 아칸의 반란으로 전부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부분은 스틸리코파로 분류되어 죽거나, 메디올라눔의 혼란 속에서 죽었다.

살아남은 이들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아서 병사는 있으나 이를 지휘할 장교들이 모자랐다.

그렇다고 백인 대장들을 장교로 승진시켰다가는 병사들을 통제할 부사관이 부족해졌다.

“흠···. 친위대가 빨리 복귀해줬으면 하는데.”

“듣자 하니 동부에서도 제법 큰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큰일?”

스틸리코가 관심을 보이자, 가우덴티우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냥 흘러가는 이야기로 한 말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스틸리코의 모습에 허둥지둥거리며 대답했다.

“듣자 하니 가니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황궁을 불태우면서 약탈했다고 합니다.”

“뭐?! 아니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그래서? 루피누스는?”

“어···. 루피누스는 황도에서 피살당했다고 합니다.”

“그래? 그건 불행 중 다행이군.”

“그런데···.”

“그런 데라니? 또 뭔가 있는 건가?”

“루피누스를 죽인 게 마리우스라고 하더군요.”

집무실 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가우덴티우스는 아무 말 없이 책상을 바라보고 있는 스틸리코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 했다.

“장군, 저는 기병대를 점검하러 이만···.”

“마리우스가 그랬다고? 그럼 가니우스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지?”

“그, 그건···.”

“가우덴티우스 알고 있는걸 다 말해보게. 도대체 동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스틸리코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덤덤한 얼굴이었지만, 가우덴티우스는 전쟁터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렇군. 마리우스가 둘 다 처리했다는 거로군.”

“쉽게 설명하자면 그렇지요.”

“후···. 시키지도 않은 짓을···.”

스틸리코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가니우스가 황궁을 약탈하고 불태웠다는 것도 충격이었는데, 아끼는 부하가 자기 일에 훼방을 놓고 시원하게 자신의 계획을 깨버린 것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어떻게 하긴. 동방을 마리우스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적당한 인물에게 맡기고 올라오라고 해야지.”

“마리우스가 고른 적당한 인물이라···. 상당히 기대되는군요.”

가우덴티우스의 말에 스틸리코가 그를 노려봤고, 가우덴티우스는 스틸리코의 눈을 피하며 바쁜 척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어이쿠. 이런 마리우스가 주문한 등자를 확인할 시간이네. 장군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가니우스의 군대와 훈족의 왕 울딘의 군대가 서로를 마주 보면서 들판에 섰다.

가니우스의 부대는 대부분이 보병대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대부분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상태였다.

반면, 울딘의 군대는 기병과 보병이 1 : 2 비율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기병들의 대부분이 가볍게 무장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모루가 되어줄 울딘의 보병대가 튼튼히 무장한 것도 아닌 것이, 가끔 사슬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병사 대부분이 두툼한 천갑옷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적의 보병이 빈약하군.”

“이거,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습니다. 야만인들이 훈족을 그리 무서워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군요.”

“자네도 조금 전까지 두려워하지 않았는가.”

“그거야, 뭐···. 들은 게 워낙 무시무시하다 보니···.”

“그런가? 자, 쓸데없는 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병사들 간격 좁히고, 단숨에 적의 방진을 뚫고 들어간다.”

가니우스의 명령에 따라 로마군은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보다 더 간격을 좁힌 채로 방진을 짰다.

부대들은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고, 좌우익에 포진된 병사들이 더 많이 노출되었다.

[우르겐, 적이 방진을 두텁게 만들고 있다.]

[왕이시여 대신 적의 변두리가 얄팍해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잘 알겠지? 믿겠다.]

[예, 로마인들은 전하의 분노를 가슴 깊이 새기게 될 것입니다.]

우르겐은 말에 올라 기병들을 이끌었다.

훈족의 기병들은 우르겐의 뒤를 따라서 한 몸처럼 움직이며 로마군의 방진을 괴롭혔다.

로마군에게 가까이 다가가 활과 창을 던져댔고, 로마군이 반격할 때쯤에는 이미 저 멀리 말을 타고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저, 저 얄미운 놈들 같으니!”

“어쩔 수 없어, 좌우익에 있는 병사들의 희생이 커지겠지만 감내해야 하네. 병사들에게 진군속도를 올리라고 해.”

“벌써부터 말입니까? 아직 적군과 거리가 제법 됩니다.”

“다가가기도 전에 문제가 생기겠어. 빨리 속도 높이라고 해!”

가니우스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여러 전투를 거치면서 단련된 노련한 전사이자 장군이었지만, 마리우스라는 풋내기에게 당한 패배는 제법 가슴 깊이 상처를 남겼다.

그동안 고트족을 털어먹으면서 조금 나아진 줄 알았지만, 훈족과 맞닥뜨려 제대로 된 전투가 시작되니 덮어져 있던 천이 벗겨지면서, 다시금 상처가 쑤셔오며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적군이 속도를 높이는구나. 적장이 조급한 모양이야, 병사들이 모두 볼 수 있게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려라 이제부터 누가 더 오래 버티냐의 싸움이다.]

울딘을 상징하는 늑대가 그려진 깃발이 높이 올라가자 울딘의 병사들은 왕의 이름을 연호했다.

우르겐이 이끄는 기병들 또한 드높이 올라온 깃발을 보더니 더욱 집요하게 로마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젠장! 방패 들어! 방패들라고!”

“악!”

“울프릭이 맞았다! 의무병!”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이 있듯이, 계속되는 기병들의 견제 속에서 병사들의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갑옷은 상체 대부분을 가려줬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에 재수 없게 날아온 눈먼 화살이나 창이 꽂히는 이가 나오면서 방진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중앙의 방진들은 두툼하게 뭉친 덕분에 속도는 느렸지만, 별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좌우익에 있는 부대들에서는 계속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다.

몇몇 부대는 방진이 크게 흐트러져 훈족 기병들의 난입을 허용하기까지 했다.

“끼요오오옷!”

“우리의 대왕 울딘을 위하여!”

“울딘을 위하여!”

훈족의 기병대가 활을 꽂아 넣고, 창을 양손에 잡고서 대열이 무너진 방진에 파고들자 순식간에 병사들이 무너져 내렸다.

“장군! 좌우익이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예비대를 보내시는 것이···.”

“기다려라. 어차피 다 예상한 일이었다. 적의 수괴만 잡으면 우리가 이기는 거야.”

“장군, 아무리 그렇다지만 자칫 잘못했다가는 고립된 중군이 포위당할 겁니다.”

“그걸 막고자 준비한 게 예비대 아닌가? 부관은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병사들이나 잘 다독이게.”

“장군···!”

가니우스의 초조함은 점점 심해져 갔다.

그의 눈에도 좌우익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지만, 애써 괜찮을 것이라며 자신을 위로하면서 병사들을 채근할 뿐이었다.

“헥헥···. 도대체 언제까지 뛰어야 되는 겁니까.”

“말···. 하지 마라···. 헥헥···. 더 빨리 지친다···.”

“으아···. 뒤지겠네! 진짜···.”

적을 불과 50m쯤 앞둔 지점에서 병사들의 숨은 거칠어져 있었다.

땀은 비 오듯이 흐르고 있었고, 가장 체력이 좋다는 병사의 투구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흐르면서 시야마저 가릴 지경이었다.

반면에 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훈족의 병사들은 제자리에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던지라 조금 긴장한 것을 빼면 멀쩡했다.

[나팔을 불어라, 우르겐을 불러들여라.]

들판에 훈족의 뿔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로마군의 방진은 제법 지치긴 했지만, 훈족과 로마군 사이의 무장상태부터 큰 차이가 있었기에 방진 간의 싸움은 제법 치열했다.

서로 방패를 맞대고서 검과 창을 열심히 따르고, 휘두르고 있었다.

[왕이시여, 아군이 밀리고 있습니다. 이곳은 위험하니 자리를 뒤로 물리시지요.]

[부하들이 싸우고 있다. 쓸데없는 말로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

울딘은 부하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부하의 말대로 훈족의 보병진은 중앙에 과도하게 몰린 로마군의 힘에 밀리면서 뒤로 계속 밀리고 있었다.

“좋아, 그렇지!”

“장군, 예비대를 투입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병사들이 너무 지친 것 같습니다. 잠시라도 쉴 시간을 주시지요.”

“그래, 그렇게 하게.”

가니우스는 조금 전의 초조함은 어디로 가고 한결 여유로워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가니우스와 그의 부관도 잠시 잊고 있었던 게 있었으니···.

[대열을 재정비하고 말을 갈아타라. 본대가 위험하다.]

우르겐의 기병대가 로마군의 좌우익을 박살 내고 다시 이동할 준비를 했다.

******

흔히 현대 한국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듣고는 했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고작 결혼까지고 호들갑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정작 결혼이라는 게 코앞까지 다가오니 그 말이 체감되었다.

“마리우스. 결혼한다면서?”

“예, 폐하.”

“오···. 축하해!”

“폐하께 축하받는 날이 오다니 참으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는군요.”

“그런데 결혼식에 누가 오는 거야? 여기 아는 사람 있어?”

꼬맹이의 말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로마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말 그대로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래도 인생에 있어서 한 번 있는 결혼식인데 초대할 사람도 없다는 게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가족도 친구도 없는 슬픈 인생이었군요···.”

“어···. 음···. 힘내 마리우스! 나는 갈 거야!”

“폐하의 어떠한 말도 제게 위로를 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그럼 이번 기회에 친구를 만들어 보는 게 어때.”

꼬맹이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하긴, 내가 어디가 모자라서 친구가 없었겠는가?

전부 악독한 스틸리코와 고트족 새끼들이 내 발목을 잡아대는 통에 친구 사귈 시간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고말고.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말 나온 김에 결혼식 전까지 좀 쉬겠습니다.”

“으, 응? 일 안 하고?!”

“이제 슬슬 폐하께서 실무를 겪으실 때도 되었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깃털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꼬맹이가 애처롭게 나를 보면서 말했다.

“마리우스! 누구 맘대로 쉰다는 거야!”

“폐하,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이 아니겠습니까. 기대하십시오. 제 하객석을 가득 채워 보이겠습니다.”

꼬맹이가 잔뜩 화난 목소리로 앵앵거리는 게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하면서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밖에는 며칠 동안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서기들이 몸에서 사람 썩는 냄새를 풍기면서 내게 인사를 건네오고 있었다.

흑갈색은 헤이즐넛 - 4

황도의 거리로 뛰쳐나왔지만, 막상 어디부터 갈지가 막막했다.

“막상 나와봤는데···. 갈 곳이 없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둘러보면서 내 신세를 한탄했다.

그동안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고, 이 사람 저 사람들과 만나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내 적이거나 로마의 적이었을 뿐···. 정작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친하다고 할만한 사람들도 데키무스나 폴로같이 같이 근무하면서 친해진 이들뿐이었으니 말이다.

“인생에 낙이 없구나.”

가게 앞에 놓인 나무상자에 주저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누군가 내 망토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이제 막 일곱 살쯤은 된듯한 처음 보는 소녀가 내 망토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꼬마야.”

“아저씨는 군인이죠?”

“그렇지, 무슨 일 있니 꼬마야?”

“엄마가 숨을 안쉬세요. 도와주세요.”

“뭐?!”

소녀를 따라 황급히 골목길로 들어갔다.

골목 안으로 들어갈수록 퀴퀴하고 고약한 냄새와 함께 처참한 모습을 한 움막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대충 나무판자와 가죽, 헝겊 등으로 얼기설기 지은 집들 중 하나가 소녀의 집이었다.

“황도에 이런 곳이 있었다고?”

콘스탄티노플의 잘 정돈된 거리와 여유가 넘치는 시민들의 미소, 온정 넘치는 시민들.

어느 것 하나 이곳에는 없었다.

길은 질척거리며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과 절망만이 가득했고, 거리 곳곳에서는 다른 이들의 것을 빼앗으려는 이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들이 넘쳐났다.

“여기에요.”

소녀의 집 또한 그랬다.

흙을 얼기설기 쌓아 올려만 든 벽과 그 위를 덮은 나무 지붕에서는 썩은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문이라고 덜렁 달린 거적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전쟁터에서도 맡아본 적 없는 진한 시체 썩는 내가 코를 날카롭게 찔러왔다.

“아니, 이게 무슨···.”

침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짚더미 위의 여자는 이미 죽은 지 몇 달은 족히 지난 듯이 보였다.

혹시나 해 손을 대봤지만, 피부는 젤리처럼 흐물흐물한 것이 절대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쯧···.”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소녀에게 자세를 낮춰 시선을 맞췄다.

“엄마가 언제부터 이랬는지 알수 있을까?”

소녀는 조그마한 손가락을 펴고 접더니 조심스레 대답했다.

“서른밤정도 지났어요.”

“30일이라...”

최소한 30일은 시체와 같은곳에서 지냈다는 말이었다.

소녀는 제법 오랫동안 굶주렸는지 팔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말랐고, 기운이 없어보였다.

“꼬마야. 혹시 친척이나 다른 가족들은 없니?”

“없어요.”

“하긴···.”

이 소녀가 주변에 도움을 받았다면 이런꼴로 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우선은 시체를 처리하는 게 중요했다.

당장 이곳에 역병이 안돈게 기적일 정도였다.

“어이!”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서 손에 반짝이는 은화를 쥐여주면서 말했다.

“집안에 시체가 있으니 집 옆에 적당히 구덩이를 파서 묻어주게.”

“아이고···. 당연히 해야지요. 나으리.”

반짝거리는 은화를 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어 금세 시체를 파묻을 수 있었다.

장례식을 치를 겨를도 없이 황급히 무덤 속에 묻히는 어머니를 소녀는 말없이 내 망토 속에 숨어서 보고 있었다.

“수고했네.”

“별말씀을요. 헤헤···. 그런데···.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신지요?”

“없네만.”

“아, 그러시군요···.”

주변에 모인 이들은 일을 끝마쳤음에도 돌아가지 않고 점점 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생각이 단순한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희 앞에 누가 서 있는지 알고 이러는 거냐?”

“댁이 뉘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옷을 보아하니 높으신 분이겠지요.”

“너희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구지?”

“그건 왜 묻습니까?”

“말해봐.”

“그야 당연히 얼마 전에 황도를 떠들썩하게 한 마리우스 장군 아니겠습니까.”

어, 이게 아닌데.

빈민들의 입에서 나온 건 내 예상과는 다르게 내 이름이었다.

나름 멋진 말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크흠···. 그렇지···. 마리우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마리우스 장군께서 루피누스를 쳐 죽였다는 말에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맞아요! 마리우스 장군께서 귀족들한테 한 방 먹였다는 말에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그만···.”

“그뿐입니까? 듣자 하니 야만인들이 장군의 이름만을 듣고 벌벌 떤다고 하던데요?”

대놓고 눈앞에서 칭찬을 들으려 하니 절로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보아하니 제법 귀한 집의 도련님 같은데 서로 피를 보지 말고 돈주머니만 주고 가십시오.”

“크흠···. 그래···.”

검으로 향하던 손이 품속에 있던 돈주머니를 향했고, 그대로 꺼내 빈민들에게 건네주었다.

“제법 체격이 다부진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흘러오게 된 건가.”

대표로 돈주머니를 건네받은 건장한 남자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일리리쿰에서 근무하던 보조병이었습니다. 전투 중에 크게 다치는 바람에 전역했지요. 다친 곳을 치료하느라 모아둔 돈을 다 써버린 데다가, 저를 받아줄 만한 일터도 없더군요.”

“그래서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거로군.”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누구는 사기를 당했고, 누구는 귀족들에게 땅을 빼앗기거나 야만인들에게 빼앗겼지요. 이곳에 모인 이들은 다른 집에 노예로도 들어갈 수 없는 이들뿐입니다.”

“그렇구먼···. 알겠네! 이만 가보지.”

이제 슬슬 자리를 뜨기 위해서 소녀를 안아 들고서 걸음을 옮기니 빈민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터줬다.

그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니, 뒤에서 조금 전의 그 남자가 나를 불러세웠다.

“잠시만요!”

“뭔가?”

“돈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

남자는 돈주머니에서 금화 다섯 닢을 꺼내더니 나머지를 내게 돌려주었다.

잘 이해가 안 됐다. 이걸 왜 돌려는 거지?

“왜 돌려주는 거야? 너희들 쓰라고 내가 넘겨준 거야 너희 거라고.”

“이건 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돈을 받은 것도 이곳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기 위해서지 욕심이 나서 그런 건 아닙니다.”

“흐음···. 그래?”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친구였다.

“자네 지금 하는 일이 있나?”

“공방에서 일을 좀 거들고는 합니다.”

“가족은?”

“남들과 같죠, 부인과 자식···. 병든 부모님이 계십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너 내일부터 공방으로 가지 말고 내가 말하는 곳으로 찾아와.”

“예? 뭐···. 그러지요. 어디로 가면 됩니까?”

“내일 아침 일찍 황궁으로 찾아와서 병사들에게 이걸 보여주게.”

나는 앞섬에 달린 브로치를 떼서 검은 망토와 함께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마리우스를 찾아왔다고 하면 될 거야.”

남자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그 모습이 제법 재밌었다.

이게 그 힘숨찐이라는 건가?

왜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짜릿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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