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갈색은 헤이즐넛
드넓은 평원에 말과 사람이 뒤엉켜 수많은 이들이 죽어있었다.
인근의 까마귀들이 모여들어 정신없이 시체를 파먹는 현장 속에서 로마군은 환호하고 있었다.
“장군! 드디어 저 지긋지긋한 새끼들이 물러났습니다!”
“정말 지긋지긋했어, 두 번 하고 싶지는 않군.”
티마시우스가 이끄는 부대는 소아시아를 불태우는 백 훈족을 쫓아 몇 달을 허비하고서야 적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움을 벌였고, 간신히 적을 몰아낼 수 있었다.
“루피누스 그 새끼가 제때 지원군만 보내줬으면···. 쯧···.”
“장군, 군대 대부분이 서쪽에 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루피누스 새끼가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었으면, 진즉에 부대를 돌려받고서 지원을 보냈겠지. 아니면···.”
티마시우스는 노예가 떠온 물로 손을 씻었다.
찰랑거리는 물에 비친 그의 얼굴 여기저기에는 오랜 세월을 전쟁터에서 보내면서 쌓아온 세월의 흔적과 상흔이 진했다.
그는 전대 황제인 발렌스 시절부터 군에 복무했고, 명실상부한 동로마 군부의 일인자였다.
“황궁에 보낼 보고서나 써야겠어.”
“병사들은 어찌할까요?”
“오늘은 푹 쉬게 해. 부대에 남아있는 음식이 있으면 오늘은 넉넉하게 배급하고, 술도 남아있으면 돌려.”
“알겠습니다.”
“대신 오늘 불침번은 빡빡하게 짜놔, 야만인들이 야습을 걸어오면 귀찮아져.”
“예, 장군.”
티마시우스는 꼼꼼하게 전달사항을 부관에게 전달하고서는 장교용 군막으로 돌아와 갑옷을 벗어놓고 자리에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포도주나 홀짝이다가 잠들고 싶었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후우···. 지긋지긋한 야만인들 같으니.”
******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군사들을 보내서 원로원의 입을 다물게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영원히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할 것이 아니라면, 적당히 아군으로 회유할 필요도 있었다.
그런데 이 의원이라는 사람들이 고집 하나는 더럽게 세서 지난번에 군대를 보낸 일로 나와는 말도 섞으려 하지 않았다.
속도 더럽게 좁은 사람들 같으니.
어차피 대충 정리가 끝난다면 떠날 생각인지라 화도 안 났다.
다만, 내가 떠나고 나서 이곳을 맡길만한 사람이 필요했는데,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오셨습니까.”
“아니, 갑자기 존대하십니까?”
“마리우스님께서 오셨는데 어찌 말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루피누스건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새끼가 하도 열받게하더군요.”
“하하하···. 여전히 입이 걸걸하시군요.”
“지금 시궁창에 내던져진 기분이라 그런것이니 이해해주시죠.”
“누가 또 장군을 귀찮게 했을까요···?”
“그냥 예전처럼 하십시오, 우리가 남도 아니고 원···.”
생긴 건 노련한 정치인처럼 생긴 에우트로피우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냘픈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거슬리면서 불편했다.
그런데 그런 이에게 존대까지 받으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이래서 환관들이랑은 친해지기가 힘들단 말이야.
“뭐, 그렇게 말하니 편히 하겠네.”
“진작 그러셨어야지요.”
“아버지 계세요?”
“지금은 손님이 계시니 나중···. 이런.”
문을 두드리던 에우독시아는 에우트로피우스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열어젖히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레 나와 눈이 마주친 에우독시아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눈웃음을 지었다.
“마리우스 님 언제 오셨어요?”
“예? 아, 예 뭐···. 잠시 의논할 일이 있어서···.”
“아~ 그러셨구나.”
에우독시아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더니 가져온 책을 읽었다.
그녀의 당혹스러운 행동에 에우트로피우스를 바라보니, 그 또한 굉장히 당황한듯한 모습이었다.
“아일라, 무슨 일이라도 있니?”
“그럴 리가요. 그냥 아버지와 같이 책을 읽고 싶어서요.”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지금은 손님이···.”
“괜찮아요. 그렇죠. 마리우스?”
“예, 그러시지요.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는데요?”
에우트로피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한가득하였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 돈이 필요한가?”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하지만 당장은 필요 없습니다.”
“돈이 필요 없다면 사람이 필요한 모양이로군.”
“지난번의 말을 이뤄드리려고 왔습니다.”
“지난번이라···?”
에우트로피우스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난번에 약속한 것이라고는 스틸리코 장군에게 내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 말고는 없지 않았는가.”
“루피누스의 뒤를 잇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그랬지만···. 자네 설마···?”
에우트로피우스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자네 혹시 미친 건가? 왜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려 하는 건가!”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임시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돌아가야지요.”
“아니 이곳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무책임하게 떠나겠다는 말이 아닌가!”
에우트로피우스의 말에 살짝 울컥했다.
내가 여기를 이 모 양 이 꼴로 만들었다고?
나도 휘말려 들었을 뿐인데···.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에우독시아가 조용히 내 손에 손을 얹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맞닿으니 기분이 상했던 게 조금은 나아졌다.
“말은 바로 하셔야지요. 이곳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제가 아니라 가니우스와 루피누스의 욕심 아니었습니까?”
“끙···. 그건···. 그렇지···. 실언이었네,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요. 사실 콘스탄티노플의 귀족이라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떠나겠다는 건가? 고작 귀족들의 등쌀이 두려워서?”
오늘따라 에우트로피우스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칼처럼 내게 날아왔다.
“두렵다니요? 제가요? 제가 바람 한번 불면 전통이 깊은 유력가문의 귀족이건 원로원의 의원이건 들판에 까마귀밥으로 던질 수 있는데 두렵다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마리우스, 진정해요.”
자리에서 일어나 에우트로피우스에 쏘아붙이니, 에우독시아가 내 소매를 붙잡으며 나를 말렸다.
“쯧···. 제가 떠나는 건 그들 탓이 아닙니다. 저나 황제 폐하나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나라를 운영하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뿐입니다.”
“결국에는 내게 전부 떠넘기고 도망가겠다는 게 아닌가.”
“영영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때가 되면 돌아올 것입니다.”
“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그것까지는 말해드릴 수가 없군요. 당장 지금 말해드릴 수 있는 건···. 에우트로피우스 님께서 저를 대신해서 동방을 맡아달라는 겁니다.”
에우트로피우스의 이마에 한줄기의 계곡이 깊이 새겨졌다.
“지금 내게 자네의 집사 일이나 하라는 건가?”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예 그렇습니다.”
“지금 나를 뭐로 보고 그런 제안을 가져온 건가?”
“제가 떠난 뒤에 황도에서 제 자리를 차지하려고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겠지요. 저는 그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을 경께 드리려는 겁니다.”
“내가 고작 잔챙이들에 밀려날 듯싶은가?”
에우트로피우스의 눈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깨진 유리 파편처럼 날카로웠다.
“밀려나건 말건, 그건 제 사정이 아닙니다. 저는 에우트로피우스님을 선택한 거고 제안을 하러 왔을 뿐입니다.”
“제안. 제안이라···.”
에우트로피우스는 잠시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마리우스. 자네가 한가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서, 하나 알려주겠네.”
“경청하겠습니다.”
“권력이란 건 가족과도 나누지 않는 법일세. 그런데 자네는 그런 걸 대뜸 내게 주겠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게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란 걸세. 직설적으로 말해보지, 내가 자네를 제치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에우트로피우스는 나긋나긋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분노가 절로 묻어나오고 있었다.
“글쎄요, 제가 순순히 밀려날 것 같으십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지. 정치에서 절대적이라는 건 없어, 당장 내일 자네의 목이 광장에 내걸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군요. 대답 감사합니다.”
“잠깐, 내 말은 끝나지 않았네.”
대충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에우트로피우스가 나를 불러세웠다.
“자네는 떠나있는 동안에 동부를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하고, 나는 든든한 조력자가 필요하지. 맞나?”
“그거야···. 그렇지요.”
“그래, 자네는 올해 나이가 몇인가.”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스물여섯입니다.”
“젊군. 굉장히 젊어. 그런데도 홀몸이라니 안타까운 일이야. 안 그렇나?”
“잠깐만요.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자네와 내 딸과 결혼한다면, 나도 자네의 의견을 들어주겠네. 어떤가?”
에우트로피우스에 목줄을 채워놓으러 왔다가 역으로 목줄이 채워지게 생겼다.
“아니, 말이 어떻게 그렇게 흘러갑니까! 그리고 여기 당사자가 있는데 어찌···.”
“저는 괜찮아요.”
“그렇다는군.”
다급한 마음에 에우독시아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상관없다니요. 상관있습니다! 우리가 만난 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고작 몇 주 만나서···.”
“고작 몇 주라니요. 벌써 몇 주나 지난 거죠.”
에우독시아는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팔로 감싸면서 물었다.
“그리고 그 몇 주면 충분한 거 아닌가요?”
정신 차려라 상훈아,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권력을 잡겠다고 자기 양아버지 등에 칼도 꽂았어!
하지만, 그렇게 정신을 다잡아 봤지만, 이미 내 안의 반동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 정도면 등에 칼 꽂혀도 괜찮은 거 아닌가?’
‘우리 업계에서는 포상입니다.’
‘ㄹㅇ ㅋㅋ’
생각해보면 어차피 에우독시아가 권력에 미쳐서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는 건 미래의 일이었다.
고로 지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환관의 가문과 맺어지는 건 정치적으로 조금 흠이 될 수 있었지만, 괜찮다.
나도 다른 이들에게는 야만인인데 뭘!
“그렇군요. 제가 살던 곳과는 풍습이 달라서 조금 오해했습니다.”
“그래요? 그것참 흥미롭네요···.”
“크흠···.”
아차.
뒤에 에우트로피우스가 있다는 걸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니 못마땅한 얼굴을 한 에우트로피우스가 나를 보고 있었다.
“사이가 좋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이기는 하다만, 조금 자제해줬으면 하는군.”
“그런데 경께서는 제 어느 부분을 믿고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허···. 자네는 가끔 보면 정말이지 자신을 낮게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낮게 본다니요?”
“생각해보게, 지금 자네는 동부에서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상황일세. 말 그대로 자네가 루피누스의 자리를 뺏은 거란 말일세.”
에우트로피우스는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이어갔다.
“스틸리코? 그 사람은 서부에서나 영향력이 있지, 동부로 오면 조금 높은 장군정도야.”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생각보다 더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것과 별 생각 없이 떠난다고 했던 게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었는지 말이다.
이렇게 보니 나는 대뜸 에우트로피우스를 찾아와서 내가 똥을 쌌으니 물 좀 대신 내려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한 게 아닌가?
화를 낼 만했다.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허···. 하긴 자네가 이걸 전부 계산에 두고 행동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었겠지. 아니 악마려나?”
“아버지! 사람한테 악마라니요. 말이 좀 심하시네요.”
“...허허, 아일라 너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여기저기 떠돌던 너를 주워다 기른지···.”
“네 그동안 감사했어요.”
에우트로피우스는 금세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꽤 상처받은 모양인데.
“그래···. 여기까지만 하겠네···. 그만 돌아가 봐도 좋네. 결혼식 관련 건은 내가 맡아서 처리할 테니···.”
“예, 그럼···. 음···. 힘내시지요.”
“그래, 돌아가 보게.”
힘없이 의자에 앉는 에우트로피우스의 어깨가 유난히 처져있었다.
******
다키아로 도망친 가니우스는 실패를 곱씹으며 고트부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인근의 고트족을 끌어모으려 했다.
하지만, 대부분 고트족은 로마의 통치에 만족하고 있었고, 오히려 이전보다 안정적인 상황에 만족하는지라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할 수 없이 가니우스는 국경을 넘어 다른 게르만족의 영역까지 흘러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의 부족들을 무력으로 통합하면서 점점 세력을 불리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동쪽으로 행군하던 가니우스의 군단과 부족들은 그들 인생에서 최악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자, 장군 들판이 온통···!”
“으음···. 저들은 누구인가? 반달인가?”
“바, 반달 인들이 이곳까지 돌아다니지는 않을 겁니다. 저, 저들은···.”
[우르겐. 로마놈들이 왜 이곳까지 온 것이지?]
[왕이시여, 저도 잘 모르겠지만 명령하신다면 몇 명 잡아 오겠습니다.]
훈족의 왕 울딘은 잠깐 고민했다.
다른 대족장 들과 싸움에서 병력이 제법 줄어든지라 마침 병력 수급이 필요한 시점이기는 했으나, 로마인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얻는 것보다 잃을게 많아질 수 있었기에 울딘은 신중하게 적을 가늠했다.
[우르겐, 저자가 대장 같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왕이시여.]
[일단은 한번 쪼개서 흐트러트린 다음에 사로잡는 게 좋겠군.]
[탁월한 판단이십니다.]
[좋아.]
울딘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나옴과 동시에 귀를 찢어놓는 듯한 나팔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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