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126/187)

흑갈색은 헤이즐넛

스틸리코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오는 군단병들을 향해서 홀로 말을 몰았다.

둘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아칸의 심장이 위험하리만치 빠르게 뛰었고, 둘이 만나기 바로 직전에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이 흥분했다.

‘됐다! 드디어 스틸리코가 몰락하는구나! 스틸리코···. 이제 네 녀석의 그 오만함도 오늘로써 끝이구나!’

수도 군단의 군단장 아울루스가 스틸리코의 앞에서자, 스틸리코는 들고 있던 말채찍을 그에게 휘두르면서 그를 꾸짖었다.

“내가 그동안 너를 중히 여겼거늘···. 어째서 나를 배신한 것이냐!”

“아악!”

스틸리코는 아울루스의 대답도 듣지 않겠다는 듯 쉴 틈 없이 아울루스를 후려쳤다.

말채찍이 내리칠 때마다 살벌한 소리와 함께 아울루스의 피부가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면서 피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져 숨이 멎었다.

스틸리코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면서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에게 묻겠다. 너희는 누구의 편인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병사들과 장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군단병들은 어찌할 줄 몰라했고, 그중에 한 장교가 스틸리코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장군, 어째서 군단장님을···.”

“그는 반역자다. 이제부터 군단의 지휘권은 내가 돌려받겠다. 불만 있나?”

어느샌가 다가온 가우덴티우스의 기병대는 말없이 스틸리코의 뒤에 섰고, 그 모습을 본 군단병들 또한 스틸리코의 편에 돌아섰다.

어찌 되었건 그들 또한 전부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처지였고, 지휘관도 죽은 이 마당에 군 최고 사령관의 말을 어길만한 깡을 가진 이는 군단 내에 없었다.

“아, 아울루스 장군이!”

“저, 저 미친놈이···!”

아칸은 몹시 당황했다.

분명 스틸리코는 아울루스의 배신을 몰라야 했다.

알고 있었다면, 그가 동방으로 떠날 때 그를 해임하거나 처리했어야 했다.

그런데 무슨 방법인지는 몰라도 스틸리코가 아울루스의 배신을 눈치챘고, 말채찍을 휘둘러 불과 몇 분 만에 그를 때려죽였다.

참혹한 현장에서 수도 군단은 스틸리코의 편으로 돌아섰고, 성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성문···. 성문을 닫아!”

“안됩니다! 이미 스틸리코의 기병대가!”

가우덴티우스와 그의 기병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와 시내를 내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스틸리코가 이끄는 수도 군단도 메디올라눔에 입성했다.

시내 곳곳에서 순찰대와 수도 군단, 그리고 가우덴티우스가 이끄는 기병대 간의 간헐적인 교전이 벌어지며 검은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성벽 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칸이 한탄했다.

“처음부터 잘못된 건가? 아니, 스틸리코의 손안에서 놀아났던 건가?”

“아칸님 피하셔야 합니다. 적이 너무 많습니다!”

아칸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면서 생각했다.

계획은 분명히 완벽했다.

수도 순찰대의 지휘관 자리에 헤라클리우스를 꽂아 넣었고, 스틸리코가 애지중지 키운 수도 군단의 군단장 아울루스를 회유했다.

메디올라눔 인근의 모든 무력집단을 손에 넣은 셈이었다.

중간에 마리우스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인물이 친위대에 배정받긴 했지만, 그 또한 돈으로 간단하게 매수했다.

물론, 의심쩍은 부분이 몇몇 있었지만. 그래도 믿을만한 자였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는가?

순찰대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고, 수도 군단은 군단장을 죽이면서까지 스틸리코에 충성했으며, 마지막으로 친위대의 대부분은 동부로 떠났고, 나머지는 내게 반하여 들고 일어났다.

수도의 군대를 전부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건만, 정작 알짜는 스틸리코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자신이 들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였군. 군대···. 정작 내게는 내 명령을 따를 군대가 없었어.”

“아칸님! 어서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헤라클리우스 님이 순찰대를 이끌고 막아서고 계시지만,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말대로였다.

황도 곳곳에 넓게 퍼져있던 수도 군단의 군단병들은 성문으로 몰려들거나, 거리에 있는 순찰대를 습격했다.

메디올라눔의 시민들도 이에 합세하여, 그동안 자신들을 억압했던 압제자들에게 맞서 싸우는 통에 도시 곳곳이 난리 통이었다.

헤라클리우스가 열심히 막고는 있었지만, 말 그대로 시간벌기밖에 되지 않았다.

“허···. 그래 이번엔 내가 졌군. 스틸리코.”

아칸은 성벽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스틸리코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살리아로 간다.”

“마살리아 말입니까?”

“거기서 배를 타고 카르타고로 간다.”

“헤라클리우스 장군에게도 그리 전하겠습니다.”

“아니, 헤라클리우스는 남부를 거쳐서 시칠리아로 가라고 전해.”

“예?!”

부관이 멍청하게 되묻자, 아칸이 화를 냈다.

“일일이 답할 시간이 없으니 그렇게 전해!”

아칸이 화내는 것을 처음 본 부관은 얼떨떨한 마음에 황급히 성벽을 내려갔다.

아칸은 거리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보면서 슬픈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은 안녕이구먼. 이 도시도, 폐하도.”

******

강제로 내 휘하에 편입한 병사들을 데리고 수도에 들어섰다.

황궁에서 치솟던 불길은 어느 정도 잠잠해진 상태였고, 거리의 소란이 가라앉자 집에 숨어있던 시민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몰려나와 있었다.

시민들은 거리를 따라 행군하는 군단병들을 두려움에 찬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 뒤를 따르는 검은 옷의 친위대를 보며 자기들끼리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 개선식 때 봤던 서부의 군대 아닌가?”

“맞는 것 같은데.”

“서부 사람들이 왜 여기까지 왔담?”

“자네는 그 소식도 못 들었는가?”

“무슨 소식?”

“글쎄, 서부의 황제가 앓아누워서 친위대가 남아있다는 소식 말일세.”

“그, 그럼 저들이 친위대란 말인가?”

“그렇지! 듣자 하니 서부의 친위대는 악마의 가죽을 뒤집어쓴다던데?”

“정말인가? 어디서 들었는데?”

“요 앞에 여관에서 죽치고 있는 음유시인 양반이 그러더군.”

“비키시오!”

한참 자기들끼리 떠들던 시민은 병사의 호통에 깜짝 놀라며 길가에서 비켜섰다.

황궁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우리를 구경하는 시민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황궁의 정문에 다다르니 호노리우스와 데키무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골골대던 호노리우스는 제법 늠름한 모습이었는데, 하도 징징거려서 맞춰준 갑옷을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제법 듬직하기까지 했다.

“전원 정지!”

[정지!]

병사들을 멈춰 세우고는 말을 몰고서 꼬맹이에게 다가갔다.

꼬맹이 앞에 말이 멈춰서고, 천천히 말에서 내리는데, 순간 다릿심이 풀렸다.

격한 전투와 말타기가 이어지다 보니 다리에서 완전히 힘이 빠져버린 것이었다.

“어어···?”

땅을 딛고 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는 내 몸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면서 얼떨결에 호노리우스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어버렸다.

갑자기 무릎을 꿇는 내 모습에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면서 내게 관심이 집중됐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나를 보고 있으니 절로 식은땀이 흐르면서 긴장됐다.

“폐, 폐하···. 신 마리우스 역적 가니우스를 물리치고 국정을 혼란케 한 루피누스를 참살했습니다.”

대충 눈치를 살피면서 고개를 조아리면서 슬그머니 뒤를 살피니, 내가 데리고 왔던 병사들도 나를 따라서 무릎을 꿇으면서 꼬맹이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아주 훌륭해! 마리우스! 역시 마리우스가 최고야!”

“감사합니다. 폐하···.”

“너희들이 형님을 괴롭힌 나쁜 놈들이야?”

꼬맹이는 겁도 없이 병사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한 명, 한 명 투구를 가볍게 후려쳤다.

“형님을 괴롭히다니 나쁜 녀석들이야!”

호노리우스의 행동에 병사들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

한참을 바쁘게 병사들을 후려치던 호노리우스는 이내 퉁퉁 부어오른 손을 후후 불며 외쳤다.

“너희들이 잘못한 건 너희들 탓이 아니야! 전부 루···. 루···.”

“루피누스입니다. 폐하.”

“그래! 루피누스! 그 사람 잘못이야. 그러니까 너희는 잘못이 없어.”

호노리우스는 끙끙거리며 자신보다 몇 배는 큰 덩치를 가진 이름 모를 병사를 일으켜 세우고는 손수 흙먼지를 털어주었다.

꼬맹이의 갑옷에 흙먼지가 엉겨 붙고 손이 더러워졌지만, 꼬맹이는 개의치 않았다.

황제의 모습에 너 나 할 것 없이 환호하면서 황제의 자비를 칭송했다.

******

그 뒤로 며칠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날 이후로 콘스탄티노플에서 호노리우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꼬맹이에게 사면받은 병사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현재는 새롭게 편성한 근위 군단에 편성되어 황궁 재건에 투입되었고 말이다.

“마리우스, 이거 꼭 해야 해?”

“폐하, 제가 특별히 밑줄 친 부분만 읽어보시고 처리하시면 됩니다.”

“힝···. 그냥 마리우스가 하면 안 돼?”

“허허···. 제가 하면은 월권입니다.”

“월권은 또 뭔데, 씨이···. 나 얼마 전까지 아팠다고!”

“저도 폐하를 돌보느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가니우스의 쿠데타로 황궁은 불타올랐고, 수많은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며칠 동안 제국의 수많은 군인과 기술자들이 달라붙어 황궁을 재건하고 있었던지라 호노리우스와 나는 별궁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아르카디우스가 할 일이었지만, 아르카디우스는 모든 권한을 동생에게 위임하고서는 방에 틀어박혀 버렸다.

“으아아아악!!! 싫어!!!”

일이 그렇게 되니, 호노리우스는 팔자에도 없던 서류작업을 하고 있었다.

서부에서는 심마쿠스와 스틸리코가 황제의 업무를 대신했지만, 이곳에서는 꼬맹이와 나 단둘이서 모든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 이런 일과는 연이 없었던 나와 현대였으면 초등학교나 다녔을 꼬맹이가 일을 처리해봤자 얼마나 빠르겠는가?

거기에 가니우스의 황궁 습격 당시에 희생당한 관료들이 많아 이곳저곳에서 구멍이 뻥뻥 뚫린 상태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마리우스 무슨 방법 없어?”

“폐하, 제가 그런 걸 알았다면 진즉에 놀러 갔겠지요···. 포기하면 편하십니다.”

“아아니이···!! 마리우스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 아니야!”

호노리우스는 책상에 엎어져서 떼를 쓰고 있었다.

나도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갈려 나가는지라 슬슬 한계가 오긴 했다.

“그렇다면 사람을 더 뽑으시는 건 어떠신지요.”

“더 뽑아? 어떻게? 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냥 간단하게 몇 가지만 물어보고 뽑으시죠.”

“그래도 돼?”

“투덜거리는 사람들은 제가 혼내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원로원의 반발로 일은 시작하기도 전에 문제에 부딪혔다.

며칠 동안 가만히 건수를 기다리던 의원들은 제대로 건수를 잡았다고 판단한 것인지 나를 맹비난했다.

“역시 근본도 모를 야만인이 권력을 붙잡고서 황제를 쥐고 흔드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이게 어디 보통의 일입니까? 무려 황제폐하의 손발이 되어줄 관료를 뽑는일입니다!”

“저 검은 눈동자의 야만인을 보십시오, 꼭 악마의 씨를 받아 태어난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서부의 황제라고는 하지만, 동부에서 너무 설치는게 아닌지...”

하루종일 마리우스와 호노리우스를 비난하던 원로원에 대한 소식은 내 귀에 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고, 내 해결책은 간단했다.

“원로원 애들이 불만 있다고? 그래서 그들은 몇 개의 군단을 가지고 있지?”

그동안 아칸이나 스틸리코에게 배운 대로 원로원 경호라는 명목으로 군대를 들이밀자, 참새들처럼 시끄럽게 떠들던 의원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시끄럽게 떠는 사람들도 없어지니 그제야 마음 편히 움직일 수 있었다.

새로운 관료를 선출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알라리크의 약탈과 내전으로 제국의 금고는 텅 비어있던지라 돈이 없었다.

그래서 루피누스의 집을 털었다.

죽은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의 가족들이 반발했지만 그래봤자 역적의 재산을 압류한다는데 그들이 목소리를 높여봤자 듣는이는 없었다.

“와, 도대체 얼마를 해 처먹은 거야···?”

루피누스의 집은 그야말로 보물섬과 같았다.

그의 집에서만 말 두 마리가 이끄는 수레가 수백 대가 꼬박 사흘 동안 바쁘게 움직여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루피누스의 집을 뒤지던 중에 내 흥미를 끄는 한 문서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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