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125/187)

실례합니다만, 지금 불타고 계십니다.

서로마의 수도 메디올라눔의 공기는 싸늘했다.

봄도 다 지나가고 이제 여름이 찾아오는 거리에는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나, 바쁘게 움직이는 노동자나 상인 대신. 병사들이 단단히 무장한 채 돌아다니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병사들은 시민이 셋 이상 모이지 못하게 했고, 자신들이 정한 시간 외에는 거리에서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다.

규칙을 어기는 이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병사들은 무자비하게 시민을 탄압했다.

오늘도 거리에서는 한 명의 남성이 몰매를 맞고 있었다.

“아악!”

“이 새끼가! 우리가 우스워? 우습냐고!”

“이런 새끼는 몽둥이가 약이지!”

“아악- 살려주십시오. 나리들···.”

빵 하나였다.

굶주린 자식들을 위해서, 통행금지령이 떨어진 거리를 걷던 아버지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빵을 품에 안고 죽었다.

스틸리코에 이어 호노리우스까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아칸이 군을 동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심마쿠스와 암브로시우스가 수도에 남은 친위대와 소수의 노예로 이에 대항했지만, 결국에는 패배했다.

심마쿠스는 폴로의 도움으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지만, 암브로시우스는 교인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 하여 메디올라눔에 남아 포로가 되었다.

그렇게 단숨에 수도를 장악한 아칸은 수도에 남은 친 스틸리코파의 인물들을 붙잡아 처리했지만, 중요한 인물들은 이미 도망친지 오래였고, 남은이들이라고는 잔챙이들 뿐이었다.

수도에 있던 스틸리코의 가족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고, 많은 이들이 테르만티아의 미모를 탐내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아칸은 단호하게 말했다.

“스틸리코와 나의 원한은 당사자의 선에서 끝나야지, 그 가족들에게 해를 끼쳐서 내 명예를 욕보이려는 건가!”

아칸의 교통정리 끝에 스틸리코의 가족들은 아칸의 저택에서 나름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

수도를 점령한 아칸은 스틸리코와 호노리우스의 귀환을 기다리면서 느긋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칸님. 잠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무슨 일인가?”

“스틸리코 장군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스틸리코가?!”

한창 낮잠을 자던 아칸은 스틸리코가 도착했다는 말에 잠이 쏙 달아났다.

“당장 안내해주게.”

“예, 어르신.”

아칸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성벽으로 향했다.

성벽에서는 먼저 도착해있던 헤라클리우스가 아칸에 먼저 인사를 했다.

“어르신 오셨습니까?”

“그래, 헤라클리우스 스틸리코가 왔다던데···. 어디 있는가? 병사는 얼마나 데려왔어?”

“저기 보시다시피 저게 다입니다.”

아칸이 고개를 내밀어 성벽 밑을 내려다보니 고작해야 수백이 될까 말까 한 병사들과 스틸리코가 성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스틸리코와 눈이 마주친 아칸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스틸리코 장군!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에 보니 자네 얼굴도 반갑군그래!”

“하하하. 이를 말입니까? 저도 몹시 반갑군요!”

“그래, 우리가 조금 지쳤으니 문을 열어주지 않겠나?”

스틸리코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반응에 아칸은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걸 어쩌지요? 기계가 고장 나서 성문을 여닫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가? 그럼 기다려야 하는 건가?”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곧 병사를 보낼테니...”

“그래? 그럼 기다리지.”

아칸은 미소를 지으면서 헤라클리우스에게 말했다.

“수도군단을 움직이게, 가서 스틸리코를 잡아오라고 해.”

“으음... 수도군단을 움직이는게 맞을까요? 아무래도 스틸리코가 직접 기르고 키운 부대인데...”

“군단장인 아울루스가 나를 지지하고 있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나! 빨리 명령을 내리게.”

“차라리 수비대를 보내는 것이...”

“어허, 수비대는 지금 암브로시우스와 그 일당을 감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면 안돼.”

헤라클리우스는 더 이상 아칸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조용히 성벽을 내려갔다.

성밖의 스틸리코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면서, 문을 열고 나오는 군단병들을 보고 있었다.

******

“오랜만이군. 마리우스.”

“오랜만은 지랄.”

“흠···. 잠시 못 본사에 입이 더 거칠어진 모양이야 쯧쯧···.”

“지랄 말고 내 병사들은 왜 데리고 있는지 설명해봐, 아니지 설명이 아니야.”

루피누스의 얼굴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처음에는 그의 변명을 듣고자 온것이었지만, 생각해보니 변명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창.”

“예?!”

“창, 빨리.”

“마리우스 뭐 하는 건가? 말을 하다가 말고···.”

“창.”

잔뜩 긴장한 병사가 건네준 창을 받아들고 오른손으로 감싸 쥐었다.

단단하고 곧은 나뭇결이 느껴지는 것이 상당히 상등품이라는 게 절로 느껴지는 창이었다.

“루피누스.”

“자네 지금 뭐하는...”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말 위에서 루피누스를 겨눴다.

“저, 저저···!”

“루피누스 경을 지켜라!”

루피누스와 그 부하들이 당황하면서 움직였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조준은 끝나있었고, 창은 내 손에서 벗어나 정해진 길을 따라서 루피누스에게로 향했다.

판노니아 이후로는 해본 적이 없었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허공을 가르면서 날아간 창은 다급하게 움직이는 방패들 틈을 가르고 날아가, 루피누스의 몸에 정통으로 맞았다.

병사들의 틈에 둘러쌓여있다고, 가볍게 무장하고 있던 루피누스는 그대로 창에 꿰뚫려 말에서 떨어졌다.

“크헉-”

“루피누스 님!”

“저놈 잡아!”

루피누스의 부하로 보이는 군단장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병사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는지, 연극을 구경하기라도 하는 듯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서 역적을 잡아들일 것이니, 역적이 아닌 자는 그 자리에 앉아있어!”

“저놈의 말을 듣지 마! 저놈이야말로 황제 폐하를···. 커 헉-”

목소리를 내던 군단장이 날아온 창에 맞아서 쓰러지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에 앉았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백인대장이나 장교들도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편 가르기가 끝나니, 루피누스와 그의 추종자들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대, 대단하십니다···.”

“대단하긴, 그냥 잔재주야.”

제법 손목을 혹사했는지 손목이 조금 시큼했지만, 그래도 전에 없이 상쾌한 기분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루피누스를 향해 천천히 말을 몰고 가니,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열었다.

“루피누스, 그러기에 사람을 잘 봐가면서 다리를 뻗어야지. 내가 그렇게 만만히 보였어?”

“커헉···. 네, 네가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는 거냐···. 이 야만인아···.”

“야만인이라···. 내 눈에는 여기 있는 새끼들이 더 미개하고 야만적인데 어쩌지.”

“너, 너는 로마의 미래를 죽이는 거야···. 알아?!”

“너 같은 놈이 로마의 미래라···.”

루피누스의 몸에 꽂힌 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갓 잡힌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던 루피누스는 창을 부여잡자마자 동태처럼 얼어붙었다.

“로마 인빅타다. 이새끼야.”

그대로 창을 한번 비틀어 뽑아내니, 상처에서 피가 튀어 오르면서 루피누스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뜬 채로 죽었다.

“카악-퉤.”

고개를 돌려 루피누스의 추종자들을 돌아봤다.

다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몸을 벌벌 떨면서 시선을 피하기 바빴는데, 그런 이들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 너희들이 남아있네?”

“살려주십시오!”

“제가 어리석어···.”

“집에 늙으신 노모가···.”

“가족들이 저만을 바라보면서···.”

“어렸을 적부터 가난하여···.”

온갖 핑계들이 쏟아져 나왔다.

곁에 있던 친위대 병사들도 나를 말렸다.

“장군, 이들의 처우는 황제폐하께 넘기시지요... 루피누스를 죽인것만 해도 월권입니다.”

“맞습니다. 다른건 몰라도 우선 데키무스 님의 안위를 파악하는 게···.”

“아, 데키무스.”

그제야 잊고 있던 이가 떠올랐다.

주변을 둘러보고는 아직도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어이. 데키무스는 어디 있어.”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너희가 붙잡고 있다던 기병들 어디 있냐고.”

“아! 그들이라면 루피누스 님의 제안을 거절하더니,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습니다.”

“도망쳐?”

아무래도 또 길이 엇갈린 것 같았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답답했다.

현대에서는 일상에서는 휴대전화, 하다못해 공중전화로 빠르게 연락할 수 있었고, 군대에서는 무전기 하나면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런 탓인지 로마에 떨어진 뒤로는 아군과 소통하는 게 조금 서툴렀다.

“또 길이 엇갈린 모양이군.”

“어···. 음···. 장군? 그러면 저 병사들은 누가 다 통제합니까···?”

고개를 돌려 들판에 빼곡하게 모여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예전에 뉴스에서 광화문 광장에 빽빽하게 모여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본 사람들에 못지않은 숫자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뭐, 뭐가 이렇게 많아.”

“장군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까.”

“내가? 내가 뭘?”

화가 가라앉으니,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을 내려다보니 어디서 묻은 것인지 모르는 주인 모를 피가 여기저기 찐득하게 눌어붙어 있었고, 찢어진 손아귀는 따끔했다.

“크흠···. 조금 흥분한 모양이야.”

발치에는 고통에 찬 얼굴로 눈을 부릅뜬 채 죽어있는 루피누스가 보였다.

“아니, 많이 흥분했군···.”

“저 병사들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저희는 고작해야 스물입니다.”

“일단, 군단장을···.”

친위대 병사가 말없이 손가락으로 싸늘하게 식어있는 군단장의 시체를 가르쳤다.

“......”

너무 대책 없이 일을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화가 나서 들이박기는 했는데,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해두질 않았다.

가니우스와도 싸우고, 루피누스를 손수 죽였다.

이 모든 게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정적이 많은 스틸리코의 심복으로 여겨져서 조금 골치 아픈 상황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내 손으로 권력자 둘을 찍어내 버렸다.

“허허···. 진짜 좆됐네.”

“예?!”

나는 좆됐다.

여러 번 진지하게 고민해봤지만, 다방면으로 좆된 상황이었다.

가니우스는 놓쳤고, 여기는 나와는 별 연관이 없는 동부였다.

동네 강아지도 자기 동네에서는 반쯤 먹고 들어간다는데, 굴러들어온 돌이 깊게 박힌 바위를 때려부쉈는데 누가 좋아할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동부에서 내 이미지는 스틸리코 다음가는 비호감으로 낙인찍히지 않을까?

이런 때일수록 어머니가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해줬던 잔소리가 떠올랐다.

‘상훈아, 너는 제발 뭘 하려고 할 때 세 번 이상 생각하고 해라.’

‘이놈의 자슥! 제발 사고 좀 그만 쳐라!’

‘아이고···. 이 웬수야!!!’

아, 어머니···.

역시 군대 가서 철든다는 건 옛말인 것 같습니다.

“장군···?”

이렇게 있을때가 아니었다.

일단 뭐가 됐든 간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느릿느릿하게 있다가는 목이 날아갈게 뻔했다.

“일단은 너희들이 고생 좀 해줘야겠다. 병사들을 잘 모아서 황궁으로 보내서 불을 끄게 해.”

“예, 장군.”

“가는 길에 데키무스와 만나면 일단 황제 폐하의 신병을 확보하라고 전하고.”

내게 있는거라고는 친위대라는 한줌의 병사들과 루피누스가 남겨둔 지휘권이 모호한 군단병들 뿐이었다.

다급하게 끌어모은 어리숙한 신병들 투성이었지만, 그랬기에 루피누스에 대한 충성심이 약했다.

살려면 이거라도 단단히 쥐고 있어야 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유명한 카이사르도 군대를 꼭 쥐고서 폼페이우스를 박살낸 다음에 로마 권력의 중심에 올랐다.

물론, 나는 카이사르의 발끝에도 못 미칠 사람이었지만, 내 상대라고 할 사람들도 폼페이우스나 브루투스에 비하면 웃음만 나올 사람들이 아닌가?

그때에 비하면 나는 상황이 더 좋은 편이었다.

두명의 황제도 내 손에 있었고, 내 뒤를 받쳐주는 부대도 빵빵했다.

충분히 해볼 만했다.

******

한편, 반란군과 친위대가 맞붙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를 바로잡고, 사람들을 진정시켜야 할 아르카디우스는 별궁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다.

동방 친위대의 병사들이 몇 번이나 황제를 설득했지만, 황제는 고집을 썼다.

“바, 밖은 위험해!”

“폐하, 이 혼란을 수습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모습을 드러내신다면 저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눈 먼 화살에 맞기라도 하면···? 으아···. 싫어, 난 그냥 여기 있을래···.”

“폐하···.”

안 그래도 심약하고 어리숙한 황제였다.

어린 시절부터 테오도시우스의 지도를 받으면서 자라온 황제였지만, 선제가 승하하고 나서는 여러 사람에게 휘둘리면서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뭐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

그때, 몇 주 동안이나 끙끙 앓고 있던 호노리우스가 깨어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제야 좀 개운하네···. 근데 마리우스는 또 어디 갔어?”

“어, 지금···. 수도에서 반란이···.”

“반란? 무슨 반란?”

호노리우스의 순수한 물음에 동방 친위대 병사는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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