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124/187)

실례합니다만, 지금 불타고 계십니다.

마리우스의 신호를 받은 기병대는 빠르게 서문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예상 밖의 인물을 마주치게 되었다.

“정지!”

서문 앞에 모여있던 수많은 병사의 모습에 데키무스가 황급히 부대를 멈춰 세웠다.

“이게···. 이게 다 뭐야···?”

“마리우스의 병사들인가.”

“루피누스···. 님.”

병사들 사이에서 태연하게 말을 타고 나오는 루피누스를 보면서 데키무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시간이 급했기에 데키무스는 대충 경례를 올리면서 말했다.

“마리우스 장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길을 비켜주시지요.”

“길? 지나가게, 누가 막기라도 했나? 나 원 참~”

“병사들이 길을 막아서고 있지 않습니까?”

데키무스는 손가락으로 제대로 방진조차 못 갖추는 병사들을 가르치면서 말했지만, 루피누스는 귀를 파며 못 들은 척했다.

“뭐, 나도 통제해보려고는 했는데···. 징집병들이라 말을 잘 안 듣더군.”

“그게 무슨···.”

“그래서 말인데···. 자네들이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나?”

“저희는 한시가 급합니다! 도움은 나중에라도 가능하니 길을···.”

“허허···. 이 친구들이 아직 이해를 못 한 모양인데···.”

루피누스의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키득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루피누스가 말했다.

“내 명령 없이는 자네들은 여길 벗어날 수 없어. 알겠나?”

데키무스는 어느샌가 자신들의 주변을 둘러싸는 병사들의 모습에 분노했다.

“우리는 같은 편이란 말입니다! 이 정신병자야!”

“워워···. 정치에 같은 편이 어딨나, 마리우스나 나나 서로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협조했던 거지. 안 그렇나?”

“아니, 그게 무슨···.”

“흠···. 그래도 대장이라는 녀석은 머리란 거가 좀 굴러가는 녀석이었는데 그 휘하의 녀석들은 머리가 굳은 모양이야.”

데키무스는 당황했다.

루피누스는 황궁에서 봤던 의심이 가득하고 겁에 질린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찌질하면서도 쓸데없이 사람을 열 받게 만들고 있었다.

“마리우스 장군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러면 나야 좋지. 그런데 그 녀석이 살아있을까? 가니우스가 제법 열 받았을 텐데?”

“루피누스 님···. 아니, 당신은 잘 모르시겠죠.”

“응? 뭐가 말인가?”

“마리우스 장군께서는 한번 눈이 뒤집히면, 굉장히 무섭습니다.”

데키무스의 말에 루피누스가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허···. 그래, 그것참 무섭군.”

“장담하겠습니다. 오늘 경께서는 죽을 겁니다.”

“그래, 그런 거로 해두지. 끌고 가!”

루피누스의 명령에 병사들이 움직이기는 했지만, 흉흉한 기색을 풍기는 기병대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뭣들 하는가! 빨리 저 녀석들을 끌고 가!”

병사들은 루피누스의 독촉에 어찌할 줄 몰라했고, 시간이 점점 흐르고 있었다.

******

“씨발! 기병대, 내 기병대 어디 갔어!”

“장군, 데키무스 님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럼 당장 사람을 보내던가 해야 할 것 아냐!”

“이, 일단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지금쯤이면 기병들이 걸어오더라도 진즉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기병대는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씨발!”

훈련 중에 무전기를 잡고서 쌍욕을 박던 대대장님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데키무스 이 새끼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몰라도 신호를 봤다면 진작 도착해서 가니우스의 병사들을 정리했어야 했다.

적들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제때 등장해서 시원하게 가니우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면, 진작에 끝났을 싸움이었다.

싸움이 점점 길어지면서 대열이 흐트러지고 있었고, 전투는 난전으로 바뀌고 있었다.

잘 훈련받고 단단히 무장한 친위대라지만, 그건 적들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리한 건 이쪽이었다.

“장군!”

“데키무스는?”

“그, 그것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데키무스 그 새끼 어디 갔어!”

“루피누스 경이 기병대가 필요하시다면서 징집해 가셨다고···.”

“뭐?! 이런 개새끼가!!!”

당장 검을 뽑아 들고 달려가려 하는 걸 부관이 몸을 던져가면서 뜯어말렸다.

“장군, 참으시지요! 당장 전투가 급합니다!”

“으아!!! 루피누스 개새끼야!!!”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서 허공에 대고 소리쳤지만, 분이 다 풀리지 않았다.

대놓고 나를 곤란하게 하겠다는 루피누스의 행동에 답답해서 속이 터지려고 했다.

나는 싸움터로 몰아넣고, 자기는 뒤로 쏙 빠져서 떡이나 주워 먹으려는 개 같은 새끼.

아무리 에우트로피우스의 부탁이더라도 그 새끼를 살려두는 게 아니었다.

바로 등에 칼을 꽂는 개새끼.

“장군···.”

“후···. 시발···. 끝나고 그 새끼부터 죽인다.”

“싸움이 급합니다. 퇴각명령을 내릴까요?”

“아니, 이대로 물러나면 몰살이야.”

“그럼 어떻게 합니까?”

“어쩌긴. 제일 확실한 걸 해야지.”

투구에 있는 마스크를 내렸다.

시야가 좁아지면서 달아올랐던 몸이 싸늘하게 식으면서 심장의 두근거림이 잦아들었다.

“예비대 남은 거 전부 투입해. 중앙을 돌파해서 적을 둘로 나눈 뒤에 처리한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안되면 뒤지는 거 말고 뭐 있나.”

그대로 적의 방진을 들이받아 버렸다.

별생각은 없었다.

그냥, 여러 번의 전투를 거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감이 알려주고 있었다.

“마리우스 님이다!”

“장군께서 오셨다!”

당연하게도 친위대 병사들은 내 모습을 보면서 내 주위로 모여들어서 다시금 진형을 재정비했다.

다들 긴 싸움에 지쳤을 텐데도 한 몸처럼 움직이면서 순식간에 대형을 정비했다.

******

“결국, 마리우스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구나.”

“처리할까요?”

“사로잡기는···. 힘들겠지.”

“굳이 사로잡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쯧···. 스틸리코 장군께 제법 미움받겠군.”

“어찌할까요?”

가니우스는 말없이 손날을 세워서 자신의 목을 가볍게 한번 그었다.

“알겠습니다.”

가니우스의 부관은 남은 예비대를 동원해서 중앙에 전부 때려 박으면서 친위대의 돌진을 막아섰다.

“이번만 막으면 우리가 이긴다.! 팔다리라도 붙잡고 늘어지란 말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병사들이 너무 지쳤다.

황궁에서 벌어진 전투와 약탈, 거기에 이어지는 격한 전투로 병사들은 완전히 퍼져버렸다.

느슨해진 방진으로 쌩쌩한 친위대와 마리우스가 들이박자 볼링핀이 넘어가듯이 무너지고 있었다.

가니우스의 예비대가 길을 막아서고 있었지만, 이미 눈이 반쯤 돌아간 마리우스를 막기는 힘들어 보였다.

“루피누스 개새끼야!!!”

“장군! 뭣들 하는 건가! 장군을 모셔라!”

체력적인 한계에 직면한 가니우스의 병사들은 달려드는 마리우스의 모습에 공포를 느꼈다.

흔히 신부님들이 말하던 인간의 피를 뒤집어쓴 악마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듯이 검은 망토와 갑옷에 붉은 피가 스며들어 있었다.

안 그래도 지친 탓에 제대로 된 판단도 못 내리는 병사들에게 공포는 전염병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오, 오지마!”

“시발! 이건 미친 짓이야!”

“물러서지 마라! 자리를 지켜!”

하나둘씩 제 목숨을 건사하려 도망치는 병사들을 붙잡아두려 백인대장들과 장교들이 애를 썼지만, 지친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눈에 띄는 복장과 행동 탓에 친위대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다.

병사들이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에 가니우스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쯧쯧···. 수적 우위를 제대로 살리지도 못했군.”

한쪽 눈에 큰 상처를 입어 피투성이가 된 부관이 가니우스에 달려와 소리쳤다.

“장군! 중앙이 깨졌습니다. 자리를 피하시지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루피누스만 처리했으면 금방 끝났을 것을 마리우스가 망치는군.”

“장군!”

“예비대를 뒤에 남기고, 병사들을 최대한 수습해서 황도의 동문으로 빠져나간다. 통제가 안 되는 병사들은 버려.”

“예! 장군.”

가니우스의 병사들이 질서를 지키면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물론 질서를 지키고 있는 것은 그나마 오랜 세월 가니우스를 따랐던 고트족 출신 병사들이었고, 다른 병사들은 통제는커녕 무기를 던지고 항복하거나 무작정 도망치기 바빴다.

******

“가니우스! 저 새끼 도망가잖아!”

“장군! 진정하시지요.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더 전투는 무리입니다!”

“이거 놔! 안 놔?!”

“장군! 뭣들 하나! 장군을 붙잡아!”

그나마 쌩쌩하던 병사들이 내게 달라붙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걸 뜯어말렸다.

수십 명이 달라붙으니 마리우스가 그대로 넘어졌고, 발버둥 치면서 소리쳤다.

“캑캑- 숨, 숨이···!”

“인제 그만! 비켜 어서!”

병사들이 비켜서니 답답했던 숨통이 다시 편해지면서, 머리에 가득 차올랐던 피가 다시 몸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면서 흥분이 가라앉았다.

자리에 주저앉아 병사들을 둘러보니, 한결같이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포로로 잡힌 가니우스의 병사들은 아예 무기고 갑옷이고 전부 내팽개치고 바닥에 쓰러져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후···. 부관.”

“예, 장군.”

“가니우스는 이제 못 따라잡겠지?”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따라잡아도 전투는 힘들 겁니다.”

“시발, 그럼 그렇지. 되는 일이 하나가 없네.”

강철 마스크를 들어 올리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전투의 열기를 씻어줬다.

황궁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고, 수많은 로마의 아들딸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채로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지만, 나는 또 한 번 이겼다.

하지만, 다른 때처럼 날아갈 듯이 기쁘다거나 흥분된다기보다는 축 늘어졌다.

그래, 난 하나의 해파리가 됐다.

“장군, 불을 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버려 둬, 지친 병사들로 뭘 하겠다고.”

“시민들이라도 동원해야 하는 게···.”

“병사들이 황궁을 약탈했는데, 시민들이라고 가만있겠나? 정 걱정되면은 탈 만한 것들은 치워서 피해를 최소화해.”

“...알겠습니다.”

타오르는 황궁을 바라보고 있으니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축 늘어진 채로 웃어 재끼고 있으니 자신도 조금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웃기 시작하니 주변에 있던 병사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루피누스···. 그 개새끼···. 머리를 굴릴 거면 제대로 굴렸어야지 안 그렇나?”

“예 그렇습니다!”

갑작스레 내 질문을 받은 병사가 당황하지 않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게 날 흡족하게 했다.

“그럼 어째야겠어?”

“어···. 잘 못 들었습니다?”

“어쩌기는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

“예?”

“개새끼.”

루피누스를 생각하니 다시 온몸에 활력이 돌아오면서 분노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에 오르니, 부관이 허겁지겁 달려와 나를 말렸다.

“장군, 또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루피누스한테 간다.”

“장군···.”

“자네는 여기 남아서 병사들을 다독이면서 불이라도 꺼.”

부관은 날 말리려고 했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게 침착해 보이는 내 모습에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고서는 경례를 올렸다.

“병사는 얼마나 붙여드릴까요?”

“쌩쌩한 놈들로 서른. 아니, 스무 명만 붙여.”

“스무 명이면 장군께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 새끼한테? 위험해?”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장군께 문제가 생겨도 친위대는 언제나 장군편입입니다.”

“그래, 황제 폐하도 잘 보살펴드리고.”

병사들을 이끌고 서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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