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123/187)

실례합니다만, 지금 불타고 계십니다.

황궁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에는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몇몇 거리에서는 병사들 간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민은 집에 틀어박혀서 부디 이 일의 여파가 자신에게 미치지 않기를 신에게 기도했다.

“아직도 루피누스를 못 찾았다는 게 말이 되나?”

“친위대의 저항이 너무 거셉니다. 거기다가 일부 시민들도 아군의 진입로를 막아서고 있습니다.”

“녀석이 황궁 안에 있는 건 확실한가?”

“예, 초기에 빠르게 황궁을 포위한 덕분에 황궁 밖으로 빠져나간 이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됐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간에 루피누스를 찾아내서 내 앞에 끌고 와, 아니지 그냥 죽이고 시체만 가져와.”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가봐.”

가니우스는 말없이 불타오르는 황궁을 바라봤다.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오르면서 안 그래도 칙칙했던 하늘을 뒤덮었다.

황궁이 불타고 있음에도 그것을 끄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병사는 각 백인대별로 흩어져서 황궁을 약탈하고 있었고, 남은 병사들조차 타오르는 황궁을 방관할 뿐이었다.

“잘 타는군.”

“장군!”

타오르는 황궁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긴 가니우스를 애타게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보고드립니다! 지금 정문 쪽으로 검은 옷을 입은 병사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검은 옷···?”

가니우스는 잠시 머릿속을 뒤졌다.

그리고 그들이 누군지 금세 떠올리고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마리우스!”

“지금 그 병사들이 아군을 밀어내면서 정문을 장악했습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마리우스!!”

******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로마군끼리 서로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 말이다.

당장 밀려오는 이민족들을 막기에도 급급한데 이런 쓸모없는 정치놀음에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정리 끝났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다. 데키무스 넌 병사들을 조금 데리고 가서 기병대를 준비시켜.”

“준비만 시키면 되겠습니까?”

“그래, 때가 되면 내가 부를 테니까 군영만 잘 지키고 있어.”

“알겠습니다.”

데키무스가 병사들을 이끌고서 황도의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루피누스는 조금 전까지 떨던 모습은 어디 가고,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당당하게 내게 말했다.

“입만 살아있는 줄 알았는데···. 실력도 제법이야.”

“쓸데없이 주절거리지 말고 가시죠.”

“크흠···. 다 좋은데 그 입이 문제로군.”

“예, 제 마음이 변하기 전에 빨리 가십쇼.”

“루피누스 경, 저는 이제부터 마리우스와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부디 건사하시길.”

“에우트로피우스. 자네의 충성은 잊지 않겠네. 잠시만 견뎌주게! 난 금방 돌아올 테니!”

루피누스는 있어 보이는 척은 다 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동방 친위대와 함께 떠났다.

“이게 잘하는 일일까요.”

“날 믿게. 가니우스나 루피누스나 다들 부족한 점이 많아, 이번 기회에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두 세력 간에 힘을 충분히 빼놓을 기회야.”

“쯧···. 이민족들이 쳐들어오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티마시우스가 남아 있지 않은가. 그가 데리고 있는 부대만 해도 다시 군을 재건하기엔 충분하네.”

“경험과 전통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그럼 나도 이만 가봐야겠군.”

에우트로피우스가 말에 올랐다.

“병사들을 붙여드리겠습니다.”

“그거 고맙군.”

“마르크스! 휘하 백인대를 이끌고 에우트로피우스님을 모셔라.”

백인대장은 경례를 하며 물러났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에우트로피우스에 말했다.

“아마 오늘 저녁이나 내일 이른 아침이 고비일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잘 버티시지요.”

“하하하···. 내 걱정일랑 말게. 그보다 자네가 걱정이군. 가니우스가 눈이 뒤집혔을 텐데.”

“제 걱정은 마시지요. 그래도 같이 싸운 전우인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에우트로피우스를 보내고서야 깨달았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걸···.

******

“마리우스!!”

“오셨습니까.”

가니우스는 잔뜩 열 받은 얼굴이었다.

툭 하고 건드리면 붉게 타오르는 얼굴에서 증기가 뿜어나올 것 같은 수준이었다.

“내 대의에 따르지 않겠다면 조용히 숨어있으라고 하지 않았나!”

“자기를 따르면 아군이고, 따르지 않으면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너무 구시대적인 것 아닙니까?”

“쓸데없이 혓바닥을 놀려서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하는군! 좋아 자네와 같이 싸웠던 전우로서 유언 정도는 들어주지.”

유언? 변명이 아니라?

생각보다 가니우스가 굉장히 열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내 인생에서 생각대로 진행된 게 뭐 얼마나 있었던가···. 안되면 되게 하라던 대대장님의 말을 가슴속에 품고서 여기까지 올라왔다.

“저를 죽이시겠다는 이런 말씀입니까?”

“못할 거야 없지!”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보십시오. 기대되는군요. 루피누스 님께서 군단을 몰고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뭐?! 루피누스가 도망갔다고!”

아, 또 말실수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것도 모르고 무작정 군대를 끌고 온 건가? 장수의 감인지 아니면 눈이 뒤집혀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소름 돋는 판단력이었다.

이대로 정문이 뚫리면 어부지리고 나발이고 모두 물거품이 돼버린다.

“왜? 그렇게나 찾아 헤맸는데 안 보이는 거 보면 모르겠나? 이미 황도를 벗어나는 중일걸?”

“마리우스 나는 스틸리코 장군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는 중일세.”

아니 저 미친 새끼가 저걸 입 밖으로 내버렸다.

지금 듣는 사람이 몇 명인데 생각 없이 말을 뱉고 있었다.

그만큼 절박한 것인지 아니면 분노가 끓어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발언은 가뜩이나 불안 불안한 동부와 서부의 관계를 결딴낼 수도 있는 말이었다.

“연극 대본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는 믿지 않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지 그래?”

“믿는 건 자네의 판단이지···. 스틸리코 장군께서 제법 슬퍼하시겠군. 쓸만한 부하이자 예비 사위를 잃었으니 말이야.”

시발.

이제 스틸리코의 정적들이 좋다고 이 건을 가지고 물어뜯을 게 분명했다.

나름대로 머리를 쥐어짜 가면서 열심히 해본다고 해봤는데, 저 새끼가 일을 다 망쳐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사태를 수습하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전원 전투준비.”

“전원 전투준비!”

투구를 뒤집어썼다.

처음엔 판노니아, 그다음은 그리스, 이제는 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같은 로마군이랑 싸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로마로 떨어지기 전, 그러니까 아직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등록금을 댄다고 외국 여행은 꿈도 못 꿨었다.

그런데 이제는 원치 않음에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싸우러 다니는 고달픈 인생이 돼버렸다.

“사각방진.”

“사각 방진! 창병은 전열로! 궁수들은 후열로!”

내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움직였다.

진형을 빠르게 바꾸고 있음에도 중간에 부딪히거나 뒤엉키는 일 없이 딱딱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게 반복 훈련의 힘이었다.

가니우스의 부대로 슬슬 전투를 준비하려는 듯이 병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 또한 여러 전장에서 실전을 거친 정예병들이었지만, 친위대에 비하면 진형을 갖추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백인대장들과 장교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면서 병사들을 윽박지르는 통에 병사들이 뒤엉키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적들이 제법 긴장한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황궁을 약탈한다고 힘이 빠진 모양입니다.”

“그래? 그럼 노래로 흥을 돋우어줘야지 뭐가 좋겠나?”

“하하하···. 지난번의 그 노래 어떻습니까? 지금 상황과 딱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거? 아, 그거 좋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곁에 있던 부관이 손짓으로 기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수가 깃발을 흔들자, 대기 중이던 나팔수들의 연주가 시작됐다.

그 소리에 맞춰 병사들이 손에 쥔 무기로 땅이나 방패를 두들기면서 박자를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고통도- 뼈를 깎는 아픔도- ]

황궁에 군가가 울려 퍼졌다.

친위대의 노랫소리에 가이나스의 병사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더 크게!”

[우-리가 밀려나면 모두가 쓰러져-]

가니우스의 병사들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게 이곳에서도 잘 보였다.

역시, 최전선에서도 고트족이 이 지랄을 해대면 병사들이 하나같이 똥 씹은 얼굴이 되곤 했다.

그걸 병사들에게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적군이 두 손 들고 항복할 때까지- 최후의 5분이다! 끝까지 싸워라-]

적을 앞에 두고서 부르는 군가는 제법 비장한 느낌이었다.

병사들 또한 제법 사기가 올라간 상태였고, 반면에 가니우스의 병사들은 제법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모두 정신 차리고 진형을 정비해라!”

“노래 하나에 이렇게 술렁거리는 게 이해가 되질 않는군.”

“장군, 적들의 모습이 제법 위협적이었잖습니까, 그 탓에 병사들이 잠시 동요한 것입니다.”

“흠···. 하긴, 누가 병사들에게 저런 칙칙한 색깔의 갑옷을 입히겠나. 쓸데없이 우중충해.”

“그래도···. 생각보다 단순해서 멋진 것 같습니다.”

“멋지다고? 저게?”

가니우스는 부관의 말에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병사들이나 잘 다독거리게, 단숨에 박살 내고 루피누스를 쫓으려면 시간이 촉박해.”

가니우스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 전에 친위대가 보여준 모습은 그동안 수없이 만나왔던 반달족이나 고트족과 같은 게르만 전사들의 모습과 같았다.

다만, 그들과 차이가 있는 건···.

저들은 그들과는 달리 잘 훈련되고 한 몸처럼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

“장군, 적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가니우스의 부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던지라 단번에 달려올 법도 했지만, 가니우스는 안정을 택한 듯싶었다.

“힘 싸움으로 가자 이거지? 숫자로 밀어붙이겠다는 거군.”

손을 들어서 부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궁수들을 준비시키고, 기병대에 신호를 보내서 황궁 서문을 통해서 놈들 뒤통수를 후려치라고 전해.”

“예? 어부지리를 노리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정면에서 한판 붙자는데 뒤로 물러나면 내 꼴이 뭐가 되겠어.”

“으음···. 그것도 그렇지만···.”

“걱정하지 말아, 어차피 머리만 쳐내면 밑에 녀석들은 와르르 무너지게 돼 있어. 가니우스와 휘하에 고트족 병사들만 쳐내면 돼.”

부관은 영 못 미덥다는 얼굴이었지만, 일단 명령이었기에 따랐다.

적들이 점점 가까워지니 방진이 전체적으로 술렁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고요한 바닷물에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듯이 방진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합을 한 번도 맞춰본 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게 로마군의 평균인지는 몰라도 점점 움직일수록 방진의 간격이 미묘하게 틀어지고 있었다.

“사격개시.”

“쏴라!”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화살이 가니우스의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당연하게도 병사들은 배웠던 대로 별도의 명령 없이도 방패를 들어 올리면서 귀갑 진을 펼쳤고, 그렇게 진형이 바뀌는 와중에 틈이 생겼다.

이제 병사들을 밀어 넣을 때였다.

“돌격 나팔!”

“약진 앞으로!”

나팔소리와 함께 내 병사들이 달려나갔다.

방진이 조금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열을 잘 맞추고 있었고, 화살을 막느라 정신없는 적군의 대열에 그대로 난입했다.

가니우스의 병사들은 황급히 대열을 정비하려 했지만, 이미 단단히 무장한 친위대가 난입한 지 오래였다.

“이런!”

가니우스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적 병사들은 무질서하게 달려든 것 같으면서도 순식간에 대형을 복구했지만, 아군은 전방의 방진이 무너지면서 뒤의 대열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예비대를 투입해! 병사들을 뒤로 물려서 대형을 재정비하고 다시 공격한다.”

“퇴각 나팔!”

가니우스의 진형에서 긴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친위대의 돌격 나팔소리와 뒤엉키면서 병사들에게 혼선을 만들었다.

“뭐야? 왜 물러나?”

“너야말로 왜 앞으로 오는 건데? 퇴각 나팔이잖아!”

“무슨 소리야 지금 돌격 나팔인데!”

이게 다 같은 로마군끼리 너무 좁은 곳에서 싸움을 벌인 탓이었다.

가니우스는 그렇게 무능한 장수가 아니었고, 나도 딱히 유능한 장수는 아니었지만, 병사들의 훈련 도와 무장, 그리고 전투 전의 기선제압으로 승패가 갈렸다.

이제 남은 건 기병대의 난입으로 전장을 정리하는 것이었는데···.

“왜 안 오지?”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병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