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합니다만, 지금 불타고 계십니다.
마리우스가 떠나고 홀로 남은 가니우스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술잔에 담기는 것은 욕망과 후회였다.
그도 처음에는 그저 들판에 무수한 야만인 중 하나였다.
로마로 온 이유도 그저 부족민들이 더는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 하나였다.
제법 많은 부족민을 끌고 온 덕에 군에 입대할 수 있었고, 운 좋게 선제의 휘하에서 복무하면서 공도 세웠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언제나 똑같았다.
우둔한 자신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멸시와 조롱.
“장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게 자신의 욕망으로 일어난 일이고 로마의 무수한 반역자 중 하나로 이름 남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후대의 평가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죽고 난 다음의 일은 발할라의 전사들과 술잔을 기울이게 될 뿐.
투구를 뒤집어쓰고 병사들 앞에 섰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형제들이여! 간악한 역적 루피누스를 몰아내고 황제 폐하를 받들어 모시자!”
[가니우스! 가니우스! 가니우스!]
그는 배우지 못해서 다른 이들의 가슴을 울리거나 끓어오르게 만드는 연설 따위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저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할 때 해야 할 행동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ROMA INVICTA!”
가니우스가 선창하자.
[ROMA INVICTA!]
병사들이 따라 했다.
지나가는 시민들도 영문도 모른 채로 동조했고 말이다···.
******
황궁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로마 최후의 날에서나 볼법한 풍경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어이가 없었다.
시종들과 환관들이 제 목숨을 부지하려고 뛰어다니고 있었고, 이 와중에 한몫 단단히 잡아보려는 병사들이 황궁을 약탈하고 있었다.
동방 친위대가 병사들을 막아서고는 있었지만, 그 숫자가 턱없이 적어 오히려 밀려나고 있었다.
“넌 뭐야!”
“하···. 하하···. 시발.”
주변의 동료들을 믿는 것인지, 평소라면 감히 말도 못 걸 병사가 겁도 없이 창부터 들이미는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장군쯤 되시는 모양인데···. 쓸데없이 엮이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후···. 자네들은 장군을 만나면 경례하라는 것부터 안 배웠나?”
내 말에 병사들은 고개를 돌려 서로를 보더니, 이내 배꼽이 빠질 듯이 웃어댔다.
안 그래도 개판이 돼버린 황궁의 모습에 열이 뻗쳐오르는데 나를 비웃는 병사들까지 내 신경을 긁어댔다.
“으하하하, 이 양반 좀 재밌네 하하하.”
“거 다치기 전에 그냥 가쇼.”
“괜히 명예니 자존심이니 찾다가 이름 없는 묘시생···.”
조금 고민했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그냥 참지 않기로 했다.
그대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집으로부터 이어진 길 끝에 이름 모를 병사의 목이 있었고, 살을 가르는 무딘 감각과 함께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어어···?”
“이 시발!”
당황한 병사들이 황급히 창을 내질렀지만, 방심한 탓인지 아니면 경험이 적은 탓인지는 몰라도 행동이 굉장히 어설펐다.
얼굴을 노리고 내지른 창은 가볍게 고개를 꺾는 것으로 회피했고, 오른팔을 노리면서 휘둘러진 검은 역으로 검을 휘둘러서 흘려냈다.
그리고는 자세가 무너진 이들에게 검을 휘둘러서 끝냈다.
“쯧···. 피 묻었네.”
대충 소매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당장 씻거나 할 시간이 없었기에 그대로 황궁 내부로 뛰어 들어갔다.
“꺄아아악-!”
“아이고 어르신···. 살려만 주십시오.”
“저,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곳곳에서는 병사들의 유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들 본분을 망각한 것인지, 아니면 가슴속 깊숙이 숨겨두고 있던 야만성을 드러낸 것인지는 몰라도 황궁 곳곳에서 살인과 약탈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군!”
“데키무스? 황제 폐하는 어떻게 하고 온 거야!”
황궁 안으로 들어서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데키무스가 친위대 스무 명 정도를 끌고 마중 나와 있었다.
“폐하께서는 안전하십니다. 지금 친위대가 주변을 물샐틈없이 단단히 지키고 있으니 염려 놓으시지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에우트로피우스나 루피누스는 어디 있나?”
“예?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황궁이 이런 꼴이 돼버려서 장군을 찾고 있었습니다.”
“끙···. 그렇단 말이지···. 일단 자네는 돌아가서 병사들을 지휘해.”
“예? 같이 돌아가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아니, 나는 에우트로피우스를 찾으러 간다.”
“그 환관 나부랭이는 찾아서 뭘 하시려고요? 설마 장군께서 최근 만나신다는 그 여인···.”
“쓸데없는 소리하지만 데키무스.”
데키무스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일일이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여기서 흩어지자, 너는 돌아가서 별궁으로 들어오려는 무장한 병사들은 전부 무장해제 시키거나 처리해.”
“다른 이들은 어찌할까요?”
“그건 네 판단하에 괜찮다 싶을 정도까지만 받아줘.”
“명 받았습니다.”
“그래, 오늘은 조금 긴 하루가 되겠어.”
데키무스가 데려온 병사 중에 열 명을 뽑아서 황궁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점점 오전에 가까워질수록 비명과 앓는 소리, 그리고 싸우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저거 뭐야?”
“너희들은 뭐 하는···.”
길을 막아서는 병사들을 뚫고 어전으로 향해 나아갔다.
오전에 가까워질수록 곳곳에서 친위대의 시신과 항전 중인 동방 친위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그들과 힘을 합쳐, 길을 열어 어전을 뚫고 들어가니, 옥좌 뒤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는 아르카디우스가 보였다.
“폐하!”
“사, 살려주세요···.”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접니다 마리우스.”
“마, 마리우스? 그게 누구야···.”
아르카디우스는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주변에는 병사들의 시체가 수북이 쌓여있었는데 정작 이들을 상대한 이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폐하, 제가 왔으니 안심하시지요. 곧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으응···? 이, 이제 괜찮은 거야?”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겁에 질린 아르카디우스를 뒤로하면서 동방 친위대에게 손짓하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르카디우스를 데려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우스 님.”
“같은 일 하는 사람끼리 돕고 살아야지요···. 그나저나 루피누스 님은 어디 계신 겁니까?”
“하···. 저희도 황궁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로는 별다른 명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친위대장이라는 새끼가 황제를 버리고 사라지니 원···.”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는 좀 더 안쪽을 찾아볼 테니, 황제 폐하를 별궁으로 모시세요.”
“예, 지금은 폐하나 저희나 많이 지친 탓에 조금 쉬었다가 움직이겠습니다.”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무운을 빌겠습니다.”
******
“시발! 시발! 시발!”
“루피누스 경 지금은 해결책을 논해야 할 때입니다.”
“시발! 해결책? 그런 게 있겠나? 밖에는 가니우스 그 새끼가 끌고 온 병사들이 득실거리는데 우릴 도와줄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
루피누스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사방에서 자신을 찾고자 눈이 벌게진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던 탓에 황제의 방 안에 마련된 비밀방에 숨어서 에우트로피우스와 해결책을 논하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이라고는 친위대 몇 명과 에우트로피우스, 그리고 그가 데려온 노예들 몇 명뿐이었다.
“루피누스 경, 우리를 도와줄 부대라면 하나 남아있지 않습니까?”
“뭐?! 그런 게 남아있다고?”
에우트로피우스의 말에 잠깐 생각하던 루피누스가 말했다.
“서부의 친위대를 말하는 건가?”
“그들이 움직이겠습니까? 저들과 합류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겠지요.”
“시발, 그럼 내게 남은 부대가 뭐가 있는가!”
“이민족들을 대비한다고 모아두신 징집병들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지금 황도 외곽에서 훈련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들을 투입하시지요.”
“아···. 그들이 남아있었지!”
까맣게 죽어있던 루피누스의 얼굴에 점점 활력이 돌아왔다.
“그래, 그 친구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여서 역도들과 싸우게 하고, 그 틈에 황제 폐하를 모시고···.”
한창 계획을 세우던 루피누스는 한가지 문제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병사들은 누가 부르러 가지···?”
방안의 그 누구도 그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다들 입을 다문 채로 루피누스를 볼 뿐이었다.
보다 못한 에우트로피우스가 헛기침하면서 말했다.
“흠흠···. 우리가 갈 수 없다면, 다른 이를 보내시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황궁에서 우리를 도와줄 이가 남아있다는 건가?”
“저를 도와줄 사람이 있긴 합니다.”
“그게 누구인가?”
루피누스가 흥분하면서 에우트로피우스를 보채는 순간, 문짝이 날아가면서 흑복을 입은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동방 친위대가 황급히 검을 뽑아 들었지만, 새까만 병사들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해버렸고, 이내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여기 계셨군요.”
“마리우스!”
******
에우트로피우스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반면에 루피누스는 그의 뒤에서 눈을 굴리고 있었다.
“여긴 위험하니 별궁으로 가시지요.”
“지금 그럴 때가 아닐세. 폐하께서는 어찌 되었는지 아는가?”
“두 분 모두 제가 잘 모시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불행 중에 다행이구먼.”
“이봐! 마리우스라고 했던가? 당장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게! 포상은 섭섭지 않게 하겠네.”
대뜸 끼어드는 루피누스의 모습에 이마와 눈썹이 요동쳤다.
마음 같아서는 내 손으로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굳이 죽을 사람인데 내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저는 에우트로피우스님을 구하러 온 겁니다. 댁은 알아서 하시지요.”
“무, 뭐?! 자네는 지금 누구 앞에서 그런 말을···.”
“동방의 섭정이자 친위대장 루피누스. 지금의 일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밖에서 당신 하나를 죽이겠다고 돌아다니는 병사가 몇인지 아십니까?”
“많겠지.”
“예, 더럽게 많습니다. 그런데 이걸 수습하고 병사들을 지휘해서 몰아내야 할 사람이 이렇게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게 말이 됩니까!”
쓸데없이 목소리가 높아져 버렸다.
하도 답답해서 한마디 내지르니 루피누스가 부끄러웠는지 역으로 화를 냈다.
“내게도 다 생각이 있네! 자네만 제국을 위해 일하는 줄 아는가!”
“그 생각이라는 게 뭡니까? 저 녀석들한테 잘나신 모습을 보여주시면 좋다고 칼부터 쑤실 텐데요?”
“... 황도 외곽에 내 부대가 있네. 얼추 세 개 군단 정도 되는 병력이지.”
“허···. 결국 황도 내에서 내전이라도 거하게 치르시겠다는 겁니까? 그냥 저 녀석들에게 가서 제국을 위해서 죽어주시지요.”
내 말에 루피누스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길길이 날뛰었다.
“듣자 하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시발 좀 참고 들으시지요. 듣기 싫은 말을 하나도 안 들으니까 이렇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끙···.”
루피누스가 더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이곳도 더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저를 따라오시면 자택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딸은 무사한가?”
“예, 오기 전에 한번 들렀을 때는 멀쩡했습니다. 병사들이 황궁을 몰려들어서 황도는 조용합니다.”
“그렇군···. 집에 들렀단 말이지···.”
에우트로피우스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길이 막히기 전에 서두르시지요.”
“잠깐. 루피누스 님도 데려가 줄 수 있겠나?”
“저 양반은 왜 데려갑니까?”
솔직하게 에우트로피우스를 데려가는 것도 당장 이 이후의 일을 수습할만한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루피누스까지 데려간다면, 밖으로 나간 루피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황도에서 싸움을 벌일 게 뻔했다.
거기다가 지금 가니우스가 데리고 있는 병사들은 동로마의 주력군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들과 싸운다는 것은 제 살 깎아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이번 한 번만 따라주게 부탁하네.”
에우트로피우스가 조용히 내게 말했다.
잠깐 머리를 굴리면서 저울질했다.
루피누스가 무사히 황궁을 빠져나가서 군대를 끌고 오는 것과 가니우스에 잡혀서 죽는 것.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끌렸지만, 에우트로피우스는 무슨 생각인지 전자를 권하고 있었다.
“마리우스 부탁이네. 루피누스 경을 밖으로 빼 네 주게 자네라면 할 수 있지 않은가?”
“설명 해주십시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에우트로피우스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 가니우스의 손에 루피누스가 죽으면, 현 정국이 어찌 되겠나? 가니우스가 모든 걸 휘두르게 될걸세. 반대로 루피누스와 가니우스가 황도에서 한판 붙는다면은 누가 이기든 간에 정치적으로는 큰 오점이 남는 거야.”
“황도의 사람들이 크게 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병사들도 많이 죽을 겁니다.”
“자네의 친위대가 있지 않은가? 저 둘이 격돌했을 때 자네가 친위대를 이끌고서 그 두 명만 처리하게.”
질색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 영감탱이가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