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합니다만, 지금 불타고 계십니다.
군의 인수인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스틸리코 휘하의 동부군은 전부 가니우스의 휘하로 배속되었다.
갑작스럽게 대군을 손에 쥐게 된 가니우스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내 몸을 사리면서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하기 시작했다.
스틸리코는 모든 인수인계를 끝마치고 고작 이천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초라한 부대를 이끌고서 콘스탄티노플을 떠나야만 했다.
“마리우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폐하를 지켜주게.”
“예,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폐하께 손 하나라도 까딱이는 녀석은 그대로 손가락을 잘라서 입에 물려놓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이 되는군.”
“그나저나···. 스틸리코 장군께서 쫓기듯이 떠나시다니···. 동부의 녀석들이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아닐세. 그 친구들도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일 거야, 난 다 이해한다네.”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스틸리코의 표정은 심히 좋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해도 되겠나?”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듣자 하나 에우트로피우스의 딸과 자주 만난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테르만티아에 편지는 자주 하나?”
“아, 아니 그걸 어째서 장군이···.”
“쯧···. 내 다른 말은 하지 않겠네, 딸을 울린다면 자네는 그날로 내 손에 죽네.”
스틸리코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했다.
눈빛 하나로 사람 두셋은 거뜬히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데 오금이 절로 저렸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폐하의 환후가 괜찮아지면 지체 말고 돌아오게.”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기력을 되찾으신다면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스틸리코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원해서 남는 게 아니겠지만, 자네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네! 마리우스. 자네가 없었더라면 호노리우스가 어떤 꼴을 당했을지 상상도 못 하겠군.”
“아칸이 아니었으면 폐하께서 이곳까지 올 일도 없었지요.”
“그건 그렇지.”
“혹시라도 돌아가서 아칸을 만나신다면 말 좀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하. 날 부려먹겠다는 건가?”
“싫으시면 말고요.”
“말해봐, 그 정도 부탁쯤은 들어주지.”
“폐하께서 네 재산의 절반을 내기에 거셨다고 전해주십시오.”
내 말에 스틸리코가 웃으면서 물었다.
“하하하! 내기? 무슨 놈의 내기 말인가.”
“별건 아닙니다.”
“그래? 그럼 이것만 묻지. 지난번에 내가 조사하라고 시킨 것 기억나나?”
“아칸이 일을 벌이고 있는지 조사하라고 하신 것 말입니까?”
스틸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호위병들에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라고 명령한 뒤에 스틸리코에게 말했다.
“아칸이 수도에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미 수도군단과 경비대가 아칸에 포섭되었고, 몇몇 의원들 또한 포섭된 것 같았습니다.”
“수도군단도?!”
스틸리코는 굉장히 충격을 받은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내가 그들을 얼마나 아꼈는데···. 이럴 수가 있나···.”
“지금 수도에서 뭔가 일을 벌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겠지···. 심마쿠스에서 오는 편지들에는 별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아칸이라면 내가 없는 틈을 노리겠지···.”
스틸리코는 수도군단이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는지 그의 말에서 허탈함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충격과 절망은 잠시뿐.
다시 정신을 차린 스틸리코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좋은 정보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등에 칼이 꽂힐 뻔했어.”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 더? 하긴···. 수도군단도 등을 돌렸는데 뭐가 놀랍겠나 말해보게.”
“제가 동방으로 떠나오기 전에 아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카르타고에서 준비가 끝났다고 하더군요.”
“기억하지.”
스틸리코는 그 말과 함께 말에 올랐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한가지 잊고 있었군. 루피누스가 알라리크와 내통하고 있었네. 이걸 받게나.”
스틸리코가 던진 편지를 받아드니 봉투에 루피누스의 인장이 박혀있었다.
“나는 쓸 수 있는 상황이 안됐지만, 자네에게는 제법 도움이 될 거야.”
그러고는 말없이 대열의 선두에 선 스틸리코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의 병사들도 발맞춰서 뒤를 따라갔다.
떠나가는 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손을 흔드는 것뿐이었다.
뭐···. 알아서들 잘하겠지.
******
스틸리코가 동부를 떠나갈 무렵.
다키아의 이름 모를 산맥에 숨어든 알라리크와 그 잔당들은 패배감에 젖어있었다.
“살아남은 건 몇이나 되나?”
“주군의 눈앞에 있는 게 다일 겁니다. 다른 이들은 소식이 전부 끊어졌습니다.”
“비디메르는? 베르틸로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이냐···. 내 아둔함이 너희를 죽였구나···. 베르틸로! 비디메르!”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많은 부하를 잃는 경험은 젊은 지도자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짐이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모닥불 옆에 나란히 모여 술잔을 높이 들었던 친우들의 생사도 알 수 없었다.
거기에 자신을 믿고 따라왔던 수많은 부족민도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고작 수십의 병사들과 끝없는 절망감뿐이었다.
“주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들 무사히 빠져나왔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다른 쪽에서 싸우던 부대들은 무사히 빠져나왔을 것입니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애써 그를 위로했지만, 알라리크의 슬픔을 덜어줄 수는 없었다.
“그대들을 볼 낯이 없네···. 나 때문에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나중에 되찾아오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이 맞습니다. 형님. 저 로마놈들이 죽이기야 했겠습니까? 분명 팔아먹으려고 모아뒀을 것입니다.”
병사들과 동생의 위로에 기운을 얻던 알라리크에게 거지꼴을 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주군!”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이가 대뜸 알라리크의 앞에 엎드려서 소리 내 울었고, 당황한 알라리크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자네는 누구···. 비디메르?!”
“주군···. 죄송합니다. 저의 어리석음으로 또 병사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비디메르! 다리는 어쩌다가···.”
“일전에 저와 겨루었던 로마놈과의 결착을 내고자 무리하게 싸운 탓에 그만···.”
비디메르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엉망이었다.
비디메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큰 소리로 울었고,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게 어찌 자네의 잘못이겠나···. 자네의 조언을 듣지 않은 내 잘못도 있어! 일어나게 어찌 전사가 바닥에 웅크려서 눈물을 보이겠나!”
알라리크는 억지로 비디메르를 일으켜 세웠고, 피고름으로 엉망이 된 붕대를 손수 걸어주며 말했다.
“자네가 돌아왔으니 됐네. 이제 더는 슬퍼할 시간이 없어.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고 가족들과 친구들을 구해야 하네 할 수 있겠나 비디메르?”
비디메르도 그제야 눈물을 그치면서 힘차게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주군께서 그때 절 거두어 주지 않으셨다면 이름 없는 들판에서 죽었을 삶이었습니다.”
“그래, 그 정도면 됐어.”
알라리크는 그 길로 패잔병들을 수습하면서 다시 세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다키아와 시티야 지방을 오가며 인근의 부족들을 집어삼키면서 덩치를 불려 나갔고, 397년 다시금 동부의 국경을 넘게 되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었다.
******
스틸리코가 떠난 동부는 루피누스의 세상이었다.
거리낄게 없어진 그는 이전보다 더 탐욕적이고, 고압적으로 변해서 주변 이들에게 아낌없이 베풀던 것에도 인색해졌다.
이 모든 게 스틸리코가 떠난 지 불과 몇 주가 되지 않아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호노리우스와 나는 루피누스의 견제로 황궁 구석에 유폐되다시피 처박혔다.
호노리우스의 몸이 조금이라도 괜찮아졌으면 당장 동부를 떠났겠지만, 축제의 마지막 날 먹은 것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것이 문제였는지는 몰라도 호노리우스는 여전히 골골거렸다.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있는 의원들이 전부 달라붙어서 치료에 매진했지만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쯧···. 그러니까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니까.”
오늘도 한숨을 내쉬면서 물수건을 쥐어짰다.
어떻게 된 게 서부의 황제이자 동부 황제의 동생이 골골대고 있는데 의원이라고 하는 작자들은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만 얼굴을 비췄다.
그뿐인가? 다른 시종들이나 환관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에우독시아나 에우트로피우스가 가끔 들러서 필요한 물건을 전해주는 게 아니었다면, 당장 친위대를 이끌고 황궁을 점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장군.”
“무슨 일이야.”
“가니우스 장군께서 사람을 보내서 한번 뵙자고 했습니다.”
“가니우스 장군이?”
그러고 보니 스틸리코가 떠나고, 가니우스와는 연락 한번 주고받지 않았었다.
“흠···. 만나자고 했더라···.”
그동안 연락 없던 지인이 연락하는 경우는 돈을 빌려달라는 것과 이상한 다단계를 권유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고대와 현대는 긴 시간차이가 있으니 이런 것으로 속단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내 경험으로는 그랬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가니우스를 찾아갔다.
그런 내게 가니우스가 내뱉은 첫마디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틀 뒤에 루피누스를 처리할 생각이네.”
그대로 마시던 포도주를 허공에 내뿜었다.
“혹시 미치셨습니까?”
“멀쩡하네.”
“그동안 연락 없던 사람이 갑자기 불러내서 한다는 말이 이틀 뒤에 루피누스를 죽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난 자네에게 부탁하는 게 아니야 통보하는 거지.”
“허···. 루피누스를 왜 처리하시겠다는 겁니까?”
“스틸리코 장군의 명령이었네.”
“장군께서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현명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더니, 역시 스틸리코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스틸리코는 토끼가 아니라 사자라고 해야 맞는 건가?
“자네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네.”
“예? 제가요?”
“궁에 틀어박혀서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숨어있던가, 그게 싫다면 나와 함께 루피누스를 처리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가니우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와 적대하거나.”
“알아서 하시죠.”
그대로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켜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사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들을 밀쳐내고서는 그대로 말에 올라서 에우트로피우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어머! 마리우스 님 무슨 일로···.”
“주인어른 계십니까?”
“아버지라면 조금 전에 황궁으로 가셨는데···. 왜 그러세요?”
“조금 전이요?”
길이 엇갈린 모양이었다.
“에우독시아 양은 제가 떠나면 저택 문을 걸어 잠그시고, 다른 이들을 들이지 마세요. 제가 병사들을 보내겠습니다.”
“예? 알겠어요.”
황급히 저택을 나와서 다시 말에 올라 황궁으로 향했다.
호노리우스의 친정으로 하나둘씩 일이 꼬여버린 상황에서 에우트로피우스까지 죽어버리고 가니우스가 권력을 잡는다면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원래 역사에서는 부대를 보러온 루피누스를 죽인 일이, 이제는 황궁을 습격하는 일로 커진 만큼 그 여파에 휩쓸려 에우트로피우스가 죽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에우트로피우스가 죽는다면, 혼란한 동방의 정국을 수습할 사람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다 같은 개새끼라도 그중에서 목줄이 채워진 우리 개새끼라는 것이다.
“씨발.”
힘껏 말을 몰아서 도착한 황궁에는 이미 동방친위대와 가니우스의 병사들이 교전 중이었고, 황궁 이곳저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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