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120/187)

테베르강의 기적.

거리는 한산했다.

축제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거리에는 돌아다니는 시민보다 물건을 팔거나 재주를 뽐내는 상인들과 광대, 음유시인들이 더 많이 보였다.

에우독시아는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이곳저곳 나를 끌고 다니면서도 언제나 입가에 미소를 유지했다.

“마리우스 님! 이거 보세요.”

“마리우스 님! 저 광대 넘어지는 것 좀 보세요. 히히히.”

“마리우스 님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나도 모르게 그녀가 건네는 길거리 음식들을 받아먹고 있었고, 그녀가 웃고 있으면 같이 웃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호노리우스를 돌보거나 아칸, 스틸리코 같은 이들과는 달랐다.

눈치를 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저 그녀와 눈을 마주치면서 서로 감정을 교류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러니 즐거울 수밖에 더 있나.

“마리우스 님! 연극을 하나 봐요!”

“보고 가시겠습니까? 제법 재밌어 보이는군요.”

“음···. 좋아요!”

연극 내용은 별거 없었다.

늘 그렇듯이 그리스식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고, 주인공은 칼에 맞아 쓰러지면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현대의 온갖 미디어 매체에 절인 내 뇌는 이 연극이 재미없다고 했지만, 뜨겁게 타오르는 내 심장은 불세출의 명작이라고 평가했다.

이유?

간단하다.

에우독시아를 울고 웃게 하면서 그녀의 감정을 지배하게 하는 이 연극이야말로 그리스 고전의 정수가 아니겠는가.

“흠···.”

“왜 그러세요? 연극이 마음에 안 드셨나요?”

에우독시아가 붉게 부어오른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두 눈에 맺힌 눈물이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로워 보였다.

“연극은 좋았습니다. 그저 폐하가 조금 걱정돼서···.”

여인의 눈물은 사나이들의 마음에 꽂히는 비수라는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더니···.

나도 모르게 말을 둘러대고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번의 전투에서 나를 살려줬던 미묘한 감각이 당장 여기서 벗어나라고 내게 조언하고 있었다.

“슬슬 돌아가시죠.”

“벌써요?”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녀는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이제는 이게 연기인지, 아니면 진심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연기라면 속이야 좀 쓰리겠지만, 이불 몇 번 걷어차는 거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진심이라면?

그게 더 골치가 아팠다.

머지않은 미래에 동로마의 황후가 될 여인과 맺어지면,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웅장한 삼중성벽은?

테오도시우스 법전은?

그렇게 한참을 고민 중이었는데 돌연 내 볼을 찌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에우독시아가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생각이요.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조금 고민했습니다.”

“무슨 일이려나~”

“이제부터 집까지 모셔다드릴 텐데, 어떻게 할지를 고민해 봤습니다.”

“그래서 결과는요?”

나는 말 없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수줍게 내 손을 붙잡는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내게 몸을 기대왔다.

******

“...라고 합니다.”

“그래? 그다음은?”

“마리우스는 황궁으로 돌아갔고, 에우독시아도 집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수고했네, 이만 가보게나.”

첩자가 조용히 방을 나섰다.

“에우트로피우스가 접촉했더라···. 벌써 냄새를 맡은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스틸리코는 에우트로피우스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서류를 둘러보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자에 빠져서 헬렐레하기는 쯧쯧···.”

******

즐거웠던 축제가 끝나고, 동방의 황궁에서는 연일 격한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외부로의 위협도 끝났고, 축제도 끝이 났는데 서부의 군대는 왜 아직도 동부에 남아 있는 것입니까? 당장 물러나십시오!”

“맞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생각을 품은 게 아닌지 의심스럽군요.”

루피누스의 사주를 받은 원로원 의원들이 맹렬히 스틸리코를 비판하면서, 동부에서 쫓아내기 위해서 물어뜯었다.

“헤어져 있던 형제가 다시 만났는데, 잠시라도 회포를 풀 시간을 주셔야 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회포라면 축제 기간에도 충분히···.”

“축제 기간에는!”

스틸리코의 목소리가 원로원에 울려 퍼지자 모두 숨을 죽인 채로 스틸리코를 바라봤다.

“폐하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방에만 계셨습니다. 아직도 병상에 누워계신 황제 폐하를 서부로 쫓아내려고만 하는 원로원의 저의가 의심스럽군요.”

“크흠···.”

“저의라니 말이 심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까? 군을 마치 반역도당의 무리로 보시기에 이곳에서는 다들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그런 망발을 지껄이시는 게요!”

스틸리코의 직설적인 화법에 원로원 의원들이 분기탱천하면서 그를 비난했다.

수십 명의 의원들 속에서도 스틸리코는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비난하는 의원들을 말없이 쓱 둘러봤다.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듯 천천히 한 명 한 명 둘러보는 그의 모습에 의원들의 입이 천천히 다물어지면서, 원로원에는 침묵에 잠겼다.

“더 하실 말은 없으십니까?”

“크흠···.”

“......”

“흠···.”

의원들은 스틸리코의 시선을 피했다.

스틸리코는 그런 의원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당당하게 선포했다.

“적의 수괴조차 잡지 못했습니다. 언제라도 야만인들이 다시금 국경을 넘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적어도 동방으로 떠난 티마시우스 장군이 복귀할 때까지는 남아있을 것이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루피누스가 분노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틸리코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하길.

“당신 휘하의 부대들 대다수는 본래 동방의 부대들이었소! 그 부대들만 있었다면 동부는 안전했을 거란 말이오!”

스틸리코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루피누스는 그가 말할 틈도 주지 않으면서 쏘아붙였다.

“황제 폐하께서 아프시다니 그 점은 참작해주겠습니다. 장군께서는 서부의 부대를 이끌고서 떠나시오! 친위대는 황제 폐하의 상태가 호전되면 돌려보내겠소!”

“루피누스 경의 말이 옳습니다!”

“맞습니다! 스틸리코 장군은 군대나 내놓고 돌아가시오!”

숨죽이고 있던 의원들이 루피누스의 말에 다시 살아나면서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다시 혼자가 된 스틸리코는 침음성을 흘렸다.

“음···.”

생각보다 강경하게 나오는 루피누스와 이에 동조하는 의원들의 모습에 스틸리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스틸리코의 모습에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루피누스가 몰아쳤다.

“알아들으셨다면, 내일 떠나시오! 동부의 일은 우리끼리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발 서부는 자신들의 일에나 신경 쓰십시오.”

스틸리코는 무섭게 루피누스를 노려보더니 이내 말없이 원로원을 빠져나갔다.

스틸리코가 정문을 통해 걸어 나가자 다리에 힘이 풀린 루피누스가 쓰러졌다.

“루피누스 님! 괜찮으십니까?”

“크크크···. 스틸리코 놈의 얼굴을 보았나? 개새끼···. 언제까지 자기가 내 머리 위에서 논다고 생각했겠지···. 크크크.”

루피누스는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들썩이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속에 얹혔던 것이 내려가듯이 몸을 감도는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기분에 몸을 던진 루피누스의 웃음소리는 한참이나 원로원에 울려 퍼졌다.

한편, 원로원을 빠져나온 스틸리코에게 가우덴티우스가 달라붙어 물었다.

“장군, 표정이 좋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는지요?”

“루피누스에게 한 방 먹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그 친구가 뭘 했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쯧···. 계획이 틀어졌어.”

스틸리코는 혀를 찼다.

본래 자신의 계획대로였다면, 원로원 의원들을 휘어잡고서 동방에 주둔하면서 동서 양쪽의 섭정의 올라서 제국을 통합하겠다는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져 버렸다.

“계획을 수정해야겠어.”

“시작부터 좋지 않군요. 그래서 어떻게 바꾸실 생각입니까.”

“음···. 친위대가 남는다니···. 마리우스를 남기는 게 맞겠지.”

“그 친구면 믿을 만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가니우스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까?”

“으음···. 마리우스가 그를 잘 제어해주기를 바라야지.”

“좋지 않군요.”

사실상 동부에서 퇴출당한 스틸리코로서는 딱히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나마 호노리우스 덕분에 그를 따라온 마리우스가 동부에 남아서, 동부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완전히 거세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부에서의 입지가 대폭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씁쓸하구먼.”

스틸리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노을을 지면서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봤다.

“돌아가서 군대를 모아야겠어.”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주력들 대부분이 동부에 남는데.”

“갈리아로 가서 군을 재건하겠다. 출신이나 신분 같은 건 따지지 않고 말이야.”

“이민족들도 받아들이시겠다는 겁니까?”

“마리우스를 보게 그의 출신이나 신분 뭐 하나 명확하지 않지만, 그는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해내고 있네.”

“뭐···. 마리우스가 쓸만한 녀석이긴 하지요. 그렇지만 게르만 놈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르미니우스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아르미니우스라는 이름이 가져오는 무게감은 상당했다.

로마의 군인이었지만, 로마를 배신하고 동족을 위해서 로마에 검을 겨눈 위대한 게르만 전사이자 로마에 최악의 패배를 안겨다 준 이였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지금은 이민족들이 살던 땅을 버리고 밀려오는 상황이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한번 배신 한족속들이 두 번이라고 힘들겠습니까?”

“지금도 로마를 위해 근무하는 이들이 있네. 그들을 모욕하지 말게나.”

“영 꺼림칙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스틸리코는 가우덴티우스를 흘겨보면서 주의를 시키고는 말했다.

“라인강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니 원.”

******

타오르는 대지 위로 검은 흑마를 탄 한 무리가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말 위에서 한 몸처럼 움직이면서 능수능란하게 게르만 전사들을 농락하고 있었다.

“족장님! 저, 적들이···.”

“다들 입 다물어! 두 눈 똑바로 뜨고···. 캑.”

“족장님?!”

흰 수염이 성성하던 게르만 전사가 다른 전사들을 이끌면서 사기를 북돋우려 했지만, 적이 쏜 화살이 그대로 목을 꿰뚫었다.

우두머리를 잃은 게르만 전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진형을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활을 쏴대는 이들에게 금세 등을 보이면서 도망갔다.

“악마, 악마들이야!”

“모두 도망쳐!”

“신께서 우릴 벌하시려고 악마를 보내신 게 틀림없어!”

사방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흩어지는 이들은 훌륭한 사냥감이었다.

이내 들판에 울려 퍼지던 비명이 잦아들었고, 사로잡힌 이들과 족장의 머리는 누군가에게 바쳐졌다.

“왕이시여, 적의 대장을 잡았습니다.”

“수고가 많았다 우르겐.”

“적들은 왕의 분노를 깨달았을 겁니다.”

“그래,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를 차례지.”

왕이라고 불린 이가 손짓하자 여러 대의 수레가 게르만 인들의 앞에 세워졌다.

수레에는 무언가가 수북하게 쌓여있었으나 위에는 천으로 덮여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에 떠는 게르만 인들의 앞에 수레가 기울어지면서 그 안에 있던 내용물이 들판 아래 쏟아지자, 모두 기겁하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

“이 중에 너희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있다면 데려가거라.”

들판 위에 아무렇게나 쏟아진 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떨고 있던 이들은 왕의 명령에 천천히 머리들에 손을 댔고, 몇몇은 그 속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한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나누어지자 왕이 말했다.

“내 병사들을 해친 녀석들의 가족은 전원 참살하고, 나머지는 노예로 끌고 간다. 늙은 놈과 병든 놈을 솎아내라.”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무기를 들고서 사람들을 처분했다.

저항하거나 도망가는 이들은 제일 먼저 죽었고, 삶을 체념한 이들은 조금 나중에 죽었다.

시체들을 들판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이들은 살아남은 이들을 묶고서 왕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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