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119/187)

테베르강의 기적.

어느덧 연회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일주일간 광란의 축제 속에서 거리는 개판이 된 지 오래였고, 거리 곳곳에서는 젊은 남녀들이 노골적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마다 술에 절어서 쓰러진 시민들이 있었고, 그들의 주머니를 털면서 쏠쏠한 수익을 벌어들이는 빈민들도 있었다.

그뿐인가?

황궁에서는 연회를 즐기던 귀족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퍼져나갔고, 노예들은 온종일 바쁘게 움직이면서 음식을 날라야 했다.

제 몸도 가누기 힘들어 보이는 귀족이 양옆에 반반한 노예를 끼고 다니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술에 취해서 추한 꼴을 보이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였고 말이다.

“마리우스 여기 냄새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저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웩.”

호노리우스가 곳곳에서 풍겨오는 띵한 알코올 냄새와 비릿한 냄새에 헛구역질해대는 통에 그를 등에 업고서 한적한 곳으로 빠져나왔다.

“웩-”

“제 등에 토하시면 안 됩니다. 망토 비싼 거란 말입니다.”

“웩- 머리가 어지러워···.”

“아이 거참!”

구석진 곳에서 아침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호노리우스의 등을 연신 두들겨 줬다.

“거참, 그러니까 방에서 바둑이나 두자고 했잖습니까.”

“웩- 그래도 형이 준비한 연회인데 웩-”

“거참 손이 많이 가네.”

“지금 뭐라고 했어.”

“별거 아닙니다. 다하셨으면 방으로 돌아가서 쉬시지요.”

휘청거리는 호노리우스를 데리고서 방으로 돌아가려 하니, 앞길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니,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매끈한 머리가 인상적인 이가 길을 막고 있었다.

“뭡니까, 황제 폐하의 행차 시니 썩 길을 비키시오!”

“안녕하십니까? 황제 폐하, 마리우스 경.”

“안녕이고 지랄이고 비키시지요.”

또 청탁인 건가.

돈은 좋지만, 그렇다고 본래의 일을 망각하면서까지 챙길 이유는 없었기에, 더 귀찮아지기 전에 쫓아내기 위해서 검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앞을 막아선 남자가 황급히 양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귀찮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피누스 님의 전언을 전하고자 온 것입니다.”

“루피누스?”

검에서 손을 떼면서 물었다.

“전언은 무슨 놈의 전언? 쯧···. 동방의 섭정이면 황제 폐하를 직접 찾아올 것이지 사람이나 보내고 말이야.”

“하하하···.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아니긴! 건방진 새끼.”

“으으···. 마리우스 어지러워.”

“쯧···. 일단 폐하께서 몸이 편찮으시니. 그냥 넘어가지, 다음에는 직접 찾아오라고 전하게.”

“아, 아니 그것이···.”

남자는 눈치를 슬쩍 보면서 어찌할 줄 몰라고 했다.

내가 호노리우스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고 하자, 황급히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잠시···.”

물론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서 녀석의 목에 검을 들이밀면서 말했다.

“동방 새끼들은 기본적인 예의를 모르는 바보들만 있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 무시하는 건가? 자네는 어느 쪽이지?”

“오, 오해십니다. 저는 그저 말을 전하러···.”

“오해는 무슨.”

녀석의 목에 검을 바짝 들이밀면서 물었다.

“루피누스가 보냈던 다른 새끼가 보냈든 간에, 그 새끼한테 가서 전해, 두 다리 멀쩡하게 붙어있으면 직접 와.”

그때 박수 소리가 들려오면서 기둥 뒤에서 환관으로 보이는 이가 걸어 나왔다.

“서방에는 사자처럼 용맹한 이가 황제 폐하를 지키고 있다 하더니, 경을 뜻하는 것이었군요.”

“넌 또 누구야.”

“처음 뵙겠습니다. 동방의 황제이신 아르카디우스 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에우트로피우스라고 합니다.”

“에우트로피우스···?”

또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사람이었다.

뭔가 간질간질한 것이 기억이 날듯 말 듯 애매했다.

“루피누스 님의 전언을 전하러 왔습니다.”

“아까 이 새끼한테도 말했지만, 황제 폐하께···.”

“아뇨, 서방의 황제 폐하가 아닌 당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나한테?”

상대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봤다.

루피누스가 보냈다기에 조금 더 신경 써서 살펴봤지만, 딱히 문제가 될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황제를 모신다는 말에 내 말투도 정중해졌다.

“폐하께서 편찮으시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예, 얼마든지요.”

기둥을 붙잡고서 헛구역질을 하는 호노리우스를 업고서 방에 눕혀놓고, 의원까지 부른 뒤에 에우트로피우스를 만나러 갔다.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에우트로피우스는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셨군요.”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법 오래 기다렸지만, 에우트로피우스는 나를 탓하거나 책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을 내는 기색 없이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뭡니까?”

“우선은 루피누스 님의 전언을 들으시지요.”

에우트로피우스가 손짓하자 아름다운 미녀들과 건장한 남자들이 무거워 보이는 궤짝을 들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어디선가 본듯한 모습에 고개가 절로 갸웃했다.

“뇌물입니까?”

“하하하···. 작은 성의라고 해주시지요.”

“성의라···.”

역시 동방이건 서방이건 환관들은 뭐 이렇게 뇌물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지만 어쩜 이렇게 사람들이 비슷할 수가 있단 말인가?

노예가 들고 온 궤짝을 열어보니 번쩍이는 금화가 얼마나 많았던지, 궤짝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빛의 향연에 그만 눈이 멀어버릴 뻔했다.

역시 풍요로움은 동방이 제일이라더니,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내리면서 말했다.

“주신다니 받긴 하겠습니다만···. 루피누스쯤 되는 사람이 제게 필요한 게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군요.”

“경에게 그렇게 부담되는 일은 아닐 것이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장담···. 장담이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진짜로 책임지는 사람을 못 봤습니다.”

“하하하···. 루피누스라면 그렇겠지요.”

에우트로피우스의 말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껴 물었다.

“루피누스를 따르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따르다니요. 우연히도 의견이 맞아서 같이 행동할 뿐입니다.”

“제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에우트로피우스의 웃는 얼굴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최근에 루피누스 경께서 황제 폐하의 옆자리를 자신의 딸로 채우려고 하십니다.”

“그 건은 스틸리코 장군을 찾아가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아, 말을 잘못했군요. 그 건과 제가 찾아온 건 별개의 일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했던 건, 루피누스의 욕심이 점점 과해진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요?”

에우트로피우스가 손짓하니, 노예들 사이에 섞여 있었던 여인이 걸어 나왔다.

“제 수양딸입니다.”

“예?”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분명히 나에게 용건이 있다고 찾아온 사람이 수양딸을 데려온 다라?

아무리 내가 돈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이건 의도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서 인사 올리거라. 서방 황제 폐하를 호위하시는 마리우스 친위대장님이시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아일라 에우독시아라고 해요.”

공손히 인사하는 그녀의 이름을 들으니, 온몸의 털이 삐죽 솟아오를 정도로 놀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에우독시아!”

“예?”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에우독시아가 놀라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에우트로피우스도 얼굴의 미소가 깨지더니 당황하면서 내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으음···. 아닙니다. 아름다운 미모에 저도 모르게 그만···.”

대충 얼버무리면서 넘기자, 에우트로피우스는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이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하하하. 제 딸이지만 그 미모 하나는 제국 제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예, 그렇군요.”

심호흡하면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눌렀다.

에우독시아라니···. 동로마를 치마폭에 넣고 휘두르면서 동서로마의 분열을 부채질한 인물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주홍빛 머리칼은 흰 피부가 대비되어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녹색의 눈동자는 정신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과연 이것이 일국의 황제를 홀렸다는 여인의 미모구나 싶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내게 말없이 미소로 화답하는 그녀의 모습은 내 정신을 손에 쥐고서 흔드는 것 같았다.

“하하하···. 젊은 남녀가 같이 있으니 제법 그림이 되는군요.”

“크흠···. 그래서 제게 할 말이 뭡니까.”

에우트로피우스의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렷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살벌한 미모였다.

“별건 아닙니다. 스틸리코 장군께 말 좀 잘 전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장군?”

“으, 응?”

“허허 그렇게나 좋으십니까?”

아씨.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에우독시아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흠흠···. 무슨 말을 전해달라는 말씀입니까?”

“후후후···. 스틸리코 장군께서 루피누스 경을 처리하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멍청한 루피누스라고는 해도 그를 처리한다면 스틸리코 장군께는 또 적이 생기는 것이지요.”

“......”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하나도 몰라서, 그냥 입을 다문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루피누스가 실각한다면, 그의 뒤를 잇는 자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스틸리코 장군에게 말해 주십시오. 방해만 말아 달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그제야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루피누스의 뒤를 이어서 동방의 정국을 휘어잡는 이였다.

루피누스의 사후에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역으로 자기가 키운 꼭두각시에게 역으로 숙청당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아, 예···. 그 정도야 뭐···.”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를 표하는 에우트로피우스와 에우독시아를 번갈아 봤다.

이렇게 보니 다정한 부녀의 모습이었지만, 이들이 3년 뒤에는 딸이 아버지를 죽여버린다니 절로 오싹해졌다.

“마지막으로 물어볼 것이 하나 있는데···.”

“얼마든지 하시지요.”

“제 딸이 어떠신지요?”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뜬금없다기보다는 노림수가 너무 뻔하게 보이는 질문이었다.

왜들 하나같이 딸만 봤다고 하면, 자기 딸 어떻냐고 물어보는 걸까?

혹시 이게 로마식 인사법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딸을 가진 부모의 마음이지요.”

아무래도 에우트로피우스는 나를 스틸리코의 정치적 후계자쯤으로 생각하는 듯싶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뭔가 휘황찬란해 보여도 실제로 하는 일이라고는 온종일 황제 옆에 붙어서, 황제와 놀아주거나, 뒤치다꺼리나 하는 걸 알기는 할까?

일과라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거나 놀이를 하면서 놀아주고, 남는 시간에는 부대를 돌봐주는 게 끝이었는데 말이다.

아칸이나 이 양반이나 환관이라는 사람들이 군에 대해서 이렇게나 문외한이니 권력을 잡지도 못하고, 잡더라도 금방 몰락하는 게 아니겠나?

자고로 권력은 칼끝에서 나오는 법인데 말이야 쯧쯧···.

대답하려니 에우독시아가 물끄러미 나를 보면서 부담감을 안겼다.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은 테르만티아와는 달랐다.

테르만티아가 마음이 평안해지는 호수 같은 눈을 가졌다면, 에우독시아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깊은 심해와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에우독시아님 정도면 훌륭하신 분이지요.”

“마리우스 님의 칭찬을 들으니 제 마음이 놓입니다.”

“생각해보니 폐하의 곁을 너무 오랫동안 비웠습니다. 저는 이만···.”

떠나가려는 나를 에우독시아가 막아섰다.

“뭡니까?”

“축제도 마지막 날인데···. 같이 어울려 주실래요?”

“어울려 달라니···.”

고개를 돌려 에우트로피우스를 바라보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뜻인데.

에우독시아는 내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면서 실없이 웃고 있었다.

‘와, 시발 이게 선수라는 건가?’

작업당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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