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118/187)

테베르강의 기적.

“짐의 도시에 온 것을 환영한다.”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낸 황제의 모습에 시민들이 환호했다.

정확히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서 열광하는게 아니라 마지못해서 하는것처럼 보였다.

동방의 황제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 듯이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분이 동방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시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게 루피누스.”

스틸리코의 말에 집중해서 황제를 바라보니 곁에 서있는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왠지 모르지만 초조해보이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야만인들의 위협에서 우리를 도와준 서방의 형제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바! 일주일간의 축제를 선포하노라!”

“와아아아-”

시민들의 환호소리에 신이 난 아르카디우스가 말했다.

“일주일간 콘스탄티노플의 모든 시민과 병사들에게는 일정량의 음식이 지급될것이고, 콜로세움의 모든 연극, 경기는 입장료를 받지 않겠노라!”

황제의 화끈한 배포에 그제서야 시민들이 아르카디우스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동방이 풍요롭기는 한 모양입니다. 일주일간 음식과 놀거리를 책임진다니...”

“재정적으로 안정되어있는 편이긴 하지.”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은 형이 한번도 말을 안 더듬었어!”

제 할말만을 마친 아르카디우스가 건물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애초에 별 기대도 하지않아서 아무렇지 않았지만, 생각지도 못한 홀대에 다른 장교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개선식이 어영부영 끝나버렸다.

******

얼렁뚱땅 끝나버린 개선식에 다들 황당하고 의아해했지만, 스틸리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병사들에게 일주일간의 휴가를 주면서 즐길수있도록 배려했을 뿐이었다.

내게도 일주일간의 휴가가 주어졌지만, 메디올라눔이라면 모를까 21세기 현대인에게 4세기의 콘스탄티노플은 놀거리도 없고, 아는 사람도없는 타지일 뿐이었다.

“끄응...”

“바둑 두는사람 어디 갔습니까?”

“기다려봐! 생각중이니까...”

그래서 일주일내내 호노리우스와 군사교육을 빙자한 바둑이나 뒀다.

황궁 정원에 있는 나무 한그루를 잘라서 생긴 그루터기에 판을 만들고 주변에 있는 조약돌들을 주워다가 만든 바둑에 푹 빠진 호노리우스였다.

행보관과의 내기바둑으로 다져진 내 실력을 호노리우스가 넘어서기는 불가능했다.

“한 번만 물러줘.”

“폐하, 전쟁터에서 적에게 물러나 달라고 하실겁니까?”

“봐달라고!”

“하하하. 이번판은 안되겠습니다!”

내 돌이 놓아지고, 호노리우스의 대마가 잡히자 꼬맹이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울부짖었다.

“끄아아아악-!”

“하하하하하! 제가 다섯수는 앞서있군요!”

일주일내내 이어진 바둑경기는 언제나 놀거리를 찾는 귀족들의 관심을 받았다.

황궁연회에 초청받은 귀족들은 바둑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대부분은 바둑을 가르쳐달라는 이들이었지만, 몇몇 이들은 노골적으로 접근해왔다.

“마리우스 장군 맞으십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반들반들한 머리 가장자리에 흰머리가 난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모르는 얼굴이었다.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조그맣게 상단을 운영하는 줄리오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안 드릴것이 있어서 실례를 했습니다.”

“제안이요?”

“예, 최근에 바둑이란걸 하신다고 들었는데...”

“아, 그거요? 팔고 싶으면 파세요.”

대부분 찾아오는 부류가 이러했다.

안면을 튼다고 뇌물을 바치거나, 청탁을 위해 뇌물을 바치거나, 황제를 접견하고 싶다면서 뇌물을 바치는사람.

요사이에는 바둑에 관해 물어볼것이 있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제법 있었는데 이 사람도 그 부류중 하나같았다.

“하하하... 그것이 아니옵고, 마리우스님과 황제폐하께서 두시는 바둑판과 바둑알을 저희 상단의 것으로 쓰셨으면 하고...”

새로운 부류의 청탁에 흥미가 생겼다.

찾아오는 이들이라고는 바둑을 배우거나 가끔가다가 관련 물건들을 팔아먹겠다고 선언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하하하. 제 작은 성의라고 생각하시지요.”

줄리오가 손짓하니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예들이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둑판에 상아를 깎아서 만든 바둑돌을 내 앞에 내려놨다.

“제 선물입니다.”

“준다니까 받긴 하겠습니다.”

“마리우스 빨리 둬!”

며칠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대충 동방의 정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업무에서 배제된 채로 섭정이자 친위대장인 루피누스가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고, 수도 이곳저곳에 기름칠하면서 국정을 운영하는 듯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보는 눈은 모자란 듯싶었다.

귀족들이나 시종들을 조금만 띄워주고 옆에서 찔러주면 루피누스에 대한 정보를 술술 불어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마리우스 빨리 둬! 뭘 그리 시간을 끄는 거야!”

“폐하께서 너무 시간을 끄셔서 저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입니다.”

“이익!”

호노리우스는 며칠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음에도 바둑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한번은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음에도, 바둑에 대한 흥미를 잃기는커녕 오히려 승부욕에 기름을 부어버린 꼴이었다.

“끙···.”

“포기하시지요.”

“기다려! 아직 안 끝났어!”

“벌써 두 시간째입니다. 그냥 포기하시지요.”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그런 말은 누구한테 배우신 겁니까?”

“마리우스가 그랬잖아···. 그만 말해! 집중해야 해.”

“예 예···.”

잔뜩 인상을 쓰면서 바둑판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호노리우스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꼬맹이의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금가락지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거 아십니까 폐하?”

“끙···. 말 걸지 말라니까.”

“제 고향에서는 강철도 금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뭐?”

내 말에 호노리우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마리우스,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순 허풍쟁이였네!”

“허풍이라뇨, 진짜로 가능한 일인데···.”

“그래~ 그런 거로 해!”

“아니 진짜라니까요.”

“그래그래, 그런 거로 해!”

꼬맹이가 살살 내 자존심을 긁고 있었다.

인생을 자존심 하나로 먹고살아 온 내게 꼬맹이의 말은 심각한 도발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습니다! 저랑 내기하나 하시죠!”

“내기?”

은근슬쩍 바둑판 위의 돌을 만지작거리던 호노리우스가 움찔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메디오라눔으로 돌아가서 상금을 걸겠습니다! 강철을 금으로 다시 만들어 오는 자에게 포상을 하는 겁니다!”

“평생 포상을 받아가는 사람은 없겠네? 으하하!”

“그거야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제 재산의 절반을 걸겠습니다!”

“저, 절반?”

꼬맹이가 움찔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꼬맹이를 약 올렸다.

“아~ 어차피 폐하의 모든 재산은 스틸리코 장군께서 관리하시던가요? 하하하. 제가 실수···.”

“이익···! 아칸에 부탁하면 되거든! 나도 아칸 재산 절반 걸 거야!”

“좋습니다! 한번 해보시지요!”

내 나이에 절반도 안 되는 꼬맹이와 내기하는 게 조금 우스웠지만, 이미 자존심 싸움이 돼버린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내가 이길 게 분명한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

동방 황궁 안에 마련된 별실에 마리우스를 제외한 장교들이 모여있었다.

“영광스러워야 할 개선식을 그렇게 만들다니.”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건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장군! 이게 다 그 루피누스 놈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처리해버리시지요!”

“맞습니다. 놈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막강한 군대가 있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스틸리코가 나지막이 말했다.

“루피누스가 생각보다 이성적으로 움직이고 있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저게 이성적인 판단이란 말입니까?”

“그래, 솔직히 내 생각으로는 루피누스가 원로원을 움직여 최종권고를 보내오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최, 최종권고 말입니까?”

최종권고라는 말에 장교들이 술렁거렸다.

비록 원로원이 공화정 시절보다는 그 위세가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원로원 의원들 개개인이 유력가의 귀족들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원로원의 최종권고는 상대를 로마의 적이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물론 동방과 서방으로 갈라진 현재로서는 동방을 적대한다는 뜻이었지만 말이다.

“동방의 군대는 우리 휘하에 있고, 나머지는 아시아로 갔는데 저들이 미쳤다고 최종권고를 날렸겠습니까?”

“제정신이었다면 날 적대하지 않았겠지.”

실로 오만한 말이었지만, 스틸리코가 하니 그 무게감이 달랐다.

“가니우스.”

“부르셨습니까.”

“아무래도 자네가 힘을 써줘야겠네.”

“예?”

스틸리코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동방의 군대는 전부 자네 휘하에 배속시켜 주겠네, 우리가 떠난다면 루피누스를 처리하고 궁을 장악하게.”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자네 손을 빌려서 루피누스를 쳐내고 동방을 관리하겠다는 뜻이네.”

“왜 하필···.”

가이나스가 뒷말을 얼버무렸지만, 방 안의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았다.

스틸리코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들기면서 말하길.

“나는 자네를 믿지 않네! 자네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믿을 뿐이야. 자네는 모든 이들의 위에 올라서고 싶지 않은가?”

가니우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스틸리코의 말에 대답할 뻔했지만, 간신히 목으로 삼키면서 되물었다.

“그렇게 된다고 해도 장군께서 루피누스처럼 저를 버리실 수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자네 하기 나름이지. 나는 루피누스에게 기회를 줬다네, 하지만 그 친구는 그걸 걷어찼어! 죄를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닌가?”

스틸리코는 자신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더니 이내 가니우스의 눈을 가르치면서 말했다.

“눈에는 눈.”

그리고 자신의 귀와 가니우스의 귀를 번갈아 가면서 가르키고는 말을 이었다.

“귀에는 귀.”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가우덴티우스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받은만큼 되돌려 주신다는 거로군요."

“자네들도 알겠지만, 나는 시킨 것만 제대로 한다면은 자네들이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신경 쓰지 않는다네.”

“내가 가라고 하면 멈추지 말고 달리고, 내가 멈추라고 하면 뒤에서 칼을 들이밀어도 멈추어 서는 게 자네들이 할 일이야.”

스틸리코의 말은 담담하게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방안에 모인 이들은 숨 쉬는 것도 멈추고서는 스틸리코의 눈치를 살폈다.

“가니우스, 그럼 잘 부탁하지.”

“...영광입니다.”

******

루피누스 또한 에우트로피우스를 불러 다음 일을 논하고 있었다.

“스틸리코와 부대가 마음을 놓고 있는데···. 지금 덮치는 것이 맞지 않겠나?”

“내버려 두시지요.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놈을 처리할 기회가 왔는데 그냥 내버려 두라고? 절대 안 돼! 이 기회가 지나가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몰라.”

루피누스는 초조한지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에우트로피우스는 그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말했다.

“긴장을 푸시지요. 어차피 콘스탄티노플은 루피누스 경의 손아귀 안에 있지 않습니까?”

“으음···. 그렇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스틸리코 녀석이 떠나버린다고.”

“지금 스틸리코를 제거했다가는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루피누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저 녀석을 보내야 되는 건가?”

“흠···.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스틸리코의 측근을 회유하는 겁니다.”

“회유? 그게 가능하겠나?”

“해봐야 알겠지요. 마침 적당한 인물도 있는 말입니다.”

“적당한 인물?”

루피누스의 물음에 에우트로피우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방 황제의 친위대장이 그렇게나 돈을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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