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117/187)

테베르강의 기적.

아에티우스라는 이름을 들으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혹시나 한 마음으로 가우덴티우스에 물었다.

“그럼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되겠군요?”

“응? 내가 자네에게 성까지 말했던가?”

역시나 내가 기억하는 그 이름이 맞았다.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스틸리코의 뒤를 잇는 로마의 권신이자, 신의 채찍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던 아틸라를 물리친 최후의 로마인.

현실에서 좀 유명한 사람과 간접적으로나마 친분이 생겨도 기분이 묘한데, 역사적인 위인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기쁘다고 해야 할지, 두렵다고 할지 잘 모르겠다.

“괜찮은가?”

“아, 예. 전 괜찮습니다.”

“아니 자네 말고 이름.”

“아···. 훌륭합니다. 듣기만 해도 미래에 위대한 장군이 될 것 같은 이름이로군요.”

내 말에 가우덴티우스는 기뻐하면서도 얼굴에 씁쓸한 기색을 비쳤다.

“그래, 그것도 좋지만···. 부모 된 마음으로는 내 자식이 군인보다는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되었으면 싶네.”

“예?”

그 말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나 때문에 역사가 뒤틀린 건가?

아에티우스가 없으면 로마는 누가 지키지?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우덴티우스를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지를 고민하고 있으니, 가우덴티우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뭐 어차피 내 자식도 칼 밥을 먹고 살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렇겠지요···.”

“자네는 뭐 그렇게 땀을 흘리는 건가? 어디 아픈 것인가?”

“전투 후에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봅니다. 하하하···.”

그렇게 말하면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쳤다.

“시간이 된다면 한번 보고 싶군요.”

“아에티우스 말인가? 자네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네.”

그렇게 가우덴티우스와 헤어지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로마에 떨어진 뒤로 굵직한 일들은 바뀌지 않았지만, 점점 사소한 것들이 바뀌고 있었다.

그동안은 살아남는 데 집중하느라 느끼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여유로워지다 보니 주변이 점점 변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실제 역사에서는 무능하고, 어리석은 데다가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했던 호노리우스도 점점 변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게 원래 성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군영으로 돌아오니, 어디선가 날아온 가죽공이 내 얼굴에 정통으로 꽂혔다.

“캑-”

나는 그대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욱신거리는 허리와 얼굴을 만지작거리면서 일어나니 온통 땀범벅이 된 호노리우스가 해맑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마리우스! 그것 좀 차 줘!”

망할 꼬맹이 같으니라고.

꼬맹이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땀까지 흘려가면서 즐거운 공놀이 중이었다.

더 웃긴 건, 그 상대가 이번에 포로로 잡힌 고트족들이었다는 것이다.

“폐하, 군영 내에서 왜 포로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겁니까?”

“병사들 귀찮게 하면 안 된다고 해서, 포로들이랑 놀고 있었어.”

“누가 허락한 겁니까?”

“내가 했어!”

황제는 단 한마디의 말로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는 자리라더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단 한마디 말에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다.

“폐하, 포로들이 허튼 마음을 품고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통하는데 다른 마음을 어떻게 가져.”

“예?”

말이 안 통하는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지?

너무나도 당당한 황제의 태도에,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상식들이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게 잘못된 거였나?

다시 정신을 바로잡고 말했다.

“폐하. 저들과 말이 통하건, 통하지 않건 중요한 것은 저들은 지난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이들입니다.”

“그게 왜?”

“후···. 폐하, 저들이 폐하를 죽이려 들면 피하실수 있겠습니까?”

“응? 왜 나를 죽이겠어. 어차피 자기들도 죽을 텐데.”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마리우스는 겁도 많다니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스틸리코와 눈도 못 마주치던 꼬맹이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호노리우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공을 차면서 놀기 시작했고, 한마디 하려는 걸 데키무스가 말렸다.

“장군, 참으시지요.”

“쯧···. 이틀 뒤에 본대가 출발한다니까 병사들 오늘내일은 푹 쉬게 내버려 둬.”

“예 장군.”

“그리고 수도에서 열리는 개선식에서 우리 부대가 제일 선두에 설 테니까 장비 닦아두는 것도 잊지 말라고 해. 먼지 한 톨이라도 붙어있으면 털릴 준비 하라고 하고.”

“서, 선두 말입니까?!”

데키무스의 얼굴에는 짧은 시간 동안 흥분과 당황, 근심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래. 황제 폐하와 스틸리코 장군 바로 뒤다.”

“아, 알겠습니다!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아 놓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고.”

데키무스는 잰걸음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이내 막사에서는 병사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고, 말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호노리우스를 바라보니,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점수를 뽑아내고 있었다.

“폐하.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틀 뒤에 수도에서 개선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몰라!”

“준비를 해두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젠 대답도 없었다.

“폐하! 이제 슬슬 포로들은 돌려보내고 준비를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판만 더하고!”

참으로 다루기 힘든 황제였다.

******

드디어 개선식 당일.

부대는 개선식에 사용할 A급 장비들을 새로 보급받았다.

물론 그곳에 들어간 비용 대부분은 스틸리코의 사비에서 나왔고, 말이다.

새로 장비를 맞춘 병사들은 이전과는 다르게 제법 정예병이라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장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다. 데키무스. 이제는 영광을 즐기게.”

그렇게 말하면서 나도 투구를 뒤집어쓰고, 투구 끈을 동여맸다.

뒤를 돌아보니 온통 검은색 옷과 장비로 무장한 친위대가 대열을 맞춰서 있었다.

역시 흑복이었다.

그저 대열을 맞춰 서 있기만 하는데도 병사들에게서 주변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멋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마리우스. 언제 들어가? 나 배고픈데.”

“조금만 참으시지요. 황궁에서 연회가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연회? 오!”

“폐하, 제발 투구 끈은 내버려 두십시오. 힘들게 묶어놨더니···.”

“답답해! 답답해! 답답해!”

싫다고 몸부림치는 호노리우스의 머리에 대역죄가 마려웠지만, 인내심으로 참으면서 투구 끈을 동여매 줬다.

이번에는 혼자서 풀기 어렵게 군대에서 행보관이 알려줬던 단단한 매듭법으로 동여맸다.

호노리우스는 불편한지 연신 끈을 풀려고 만지작거렸지만, 어린아이가 풀기에는 너무 단단하게 묶인 끈이었다.

“불편해!!”

“조금만 참으십시오. 어차피 잠깐만 메고 있으시면 됩니다.”

“나는 황제라고! 내가 불편하니까 빨리 풀어줘!”

“아 좀! 참으십시오!”

“풀어줘!”

“시민들이 보고 있습니다! 좀 참으십시오!”

꼬맹이가 신경을 긁어대는 통에 결국 내 인내심이 깨지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꼬맹이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강하게 받아쳤다.

“명령이야 빨리 풀어!”

“폐하께서는 명령 불복종이라는 말을 아시는지요?”

“이익···! 나를 목 졸라서 죽이려는 거지?!”

“어이쿠, 벌써 들켜버렸군요. 제법 똘똘해지셨습니다.”

“마리우스. 내가 뭘 들은 것인지 모르겠군.”

“자, 장군!”

시발.

한참 꼬맹이를 놀리는 데 집중하느라 뒤에서 누가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해보니 스틸리코였다.

“허허···. 이런 오만방자한 놈을 보았나.”

“오, 오해십니다.”

“숙부! 마리우스가···.”

호노리우스는 조잘거리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풀어놓았다.

스틸리코는 제법 흥미롭다는 듯이 꼬맹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를 보면서 묘한 미소를 흘렸다.

스틸리코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갈 때마다 내 수명이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시발! 시발! 시발! 시발! 하필이면 거기서 튀어나오냐고···.’

호노리우스의 말이 끝나자 스틸리코가 말했다.

“그래서 이 반역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으음···. 투구 끈 풀어주면 용서해줄 거예요!”

“하하하. 폐하 반역자에게 자비를 보이시면 안 됩니다.”

“자비가 뭔데요?”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을 말하지요.”

스틸리코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호노리우스에게 말하니, 꼬맹이도 귀를 기울였다.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허허···. 물론 길거리의 시민들이나 귀족들에게는 자비는 옷과 같아서 언제든지 입고 벗을 수 있지만···.”

스틸리코의 인자한 표정이 순식간에 단호한 얼굴로 변하더니 굳게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

“황제의 자비란 칼과 같습니다. 적절할 때 휘두르면 적을 베어내겠지만, 허술하게 휘두른다면 자신이 다치겠지요.”

“으음···. 어려워요···.”

“하하하. 장차 알게 되실 겁니다. 당장은 이것만 기억해두시면 됩니다.”

스틸리코는 다정하게 호노리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누가 뭐라 하여도 제국의 황제이시고, 제국을 지탱하시는 기둥 중 하나이십니다. 다른 이들이 기둥을 흔들어도 그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네!”

호노리우스의 씩씩한 대답에 스틸리코가 놀란 얼굴이었지만, 이내 호노리우스를 다시금 안아줬다.

“폐하, 씩씩하시군요. 선제께서 보신다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언제나 그 마음을 잊지 마세요.”

스틸리코는 그렇게 말하면서 호노리우스의 턱 끈을 풀어줬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를 잘 모시게. 오늘의 일은 못 본 척 넘어가 주지.”

“가, 감사합니다. 장군!”

“폐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만큼 자네를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항상 기억하고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호노리우스에게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이를 먹으면 말이 많아진다더니···. 제가 쓸데없는 잔소리가 길었습니다.”

“아니에요~”

“슬슬 출발준비를 하시지요. 마리우스!”

“예! 장군.”

“자네는 폐하의 바로 뒤에 서게.”

“예?”

당황스러웠다.

황제의 바로 뒷자리라면은 제국군 사령관인 스틸리코가 서는 게 맞을 텐데···?

스틸리코에게 물었다.

“그 자리는 장군의 자리가 아닙니까···?”

“나는 황제 폐하와 말머리를 함께할 것이네.”

“아···.”

역시나 그랬구먼.

내심 조금이나마 기대했던 내가 우스워졌다.

능글능글하게 웃고 있는 스틸리코를 보니, 혹시 행보관이 저 안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

개선식이 시작되었다.

황제의 곁에 선 스틸리코는 아무렇지도 않은척했지만,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로마인으로 태어났으나 이민족이라고 손가락질받던 모멸의 세월을 지나서 자신의 힘으로 이곳까지 올라왔다.

자신과 황제의 이름을 연호하는 시민들의 환호 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어준 주군이자 장인인 선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군께서 남기신 것들을 지키겠습니다.’

선 제께서 승하하시던 날 남몰래 눈물 흘리며 했던 맹세를 다시금 떠올리니 눈가가 시큰해졌다.

“숙부, 눈이 빨개요.”

“어젯밤에 일이 많아서 조금 늦게 자서 그렇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착한 사람이랬어요~”

“예? 그건 누가 한 말입니까.”

“마리우스요!”

스틸리코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편에 서 있는 마리우스를 힐끔 바라봤다.

그는 잔뜩 긴장해서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그러고 보면 마리우스도 우연에서 시작된 인연이었지만, 지금은 신뢰하는 부하 중 하나였다.

처음 가우덴티우스가 그를 추천할 때만 해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선제께서 승하하신 슬픔과 자신의 어린 시절 순수혈통 로마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던 게 떠올라 그를 등용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리우스는 언제나 자신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괜찮은 친구란 말이야···.’

지난날에 그에게 넌지시 딸에 관해서 물었을 때 당당하게 대답하던 모습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위로 삼는 건 두고 볼 일이지만 말이다.

******

서방의 군대를 본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온통 검은 옷과 검은색의 장비로 무장한 친위대의 모습은 막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들을 연상시켰다.

거기다가 투구에 달린 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니 과연 그들이 인간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거기다가 수천 명의 병사가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보폭까지 맞춰서 움직이는 모습에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콘스탄티노플의 시내를 가로지른 스틸리코의 부대는 황궁 앞의 대광장에 멈춰 섰다.

아르카디우스와 루피누스가 그들을 맞이했다.

“짐의 도시에 온걸 환영하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