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베르강의 기적.
뒤늦게 합류한 마리우스와 가이나스도 눈앞에 벌어진 일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정확히는 머리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어···. 음···.”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가?”
“저도 잘···. 이런 거 보신 적 있으십니까?”
“거기 털 나고 처음 보는 것 같네.”
“그전에는요?”
“그 전일은 기억 못 하지.”
그만큼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가이나스야 황제의 능력에 놀라고 있었지만, 마리우스는 호노리우스의 무능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받는 충격은 더 컸다.
‘뭘 잘못 먹었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상처에 눈물을 찔끔 흘리던 꼬맹이가 고트족을 무릎 꿇렸다니···.
마리우스는 멍하니 호노리우스를 바라봤다.
호노리우스는 발로 공을 튕기면서 고트족에게 기묘한 재주를 선보이고 있었고, 수천의 고트족과 로마인들 앞에서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던 호노리우스는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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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로니키에서 벌어진 전투결과가 하루 밤낮을 달린 전령을 통해서 콘스탄티노플의 황궁에 도착했다.
전령이 가져온 승전보에 루피누스와 원로원 의원들은 기뻐하면서도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개선식은 안돼.”
“승전했는데 개선식을 막는다는 건···.”
“여기는 동방이고, 저들은 서방의 군대인데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서방 놈들은 돌아가서 자기들끼리 하면 될 것 아닌가!”
“무슨 명분으로 개선식을 막겠습니까? 저쪽은 황제라는 명분과 군대라는 힘을 둘 다 가지고 있지만,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한 의원의 말에 루피너스는 침음성을 흘렸다.
며칠간 시민들을 징집하면서 새롭게 부대를 꾸리기는 했지만, 그들을 훈련할 선임병들이나 그들을 지휘할 장군마저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무분별한 징집으로 모아놓은 병사들 또한 상태가 영 아니었고, 시민들의 원성까지 듣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모인 게 아닌가? 다들 의견 없나?”
루피누스의 말에 의원들이 고개를 돌리면서 그를 외면했다.
그런 의원들의 모습에 루피누스는 분노했지만, 그들을 탓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들을 통제할 힘과 명분을 잃어버린 그가 꺼내 들 수 있는 카드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나오시겠다?”
루피누스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원로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길로는 황제를 찾아가 황제에게 부탁했다.
“루피누스?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폐하, 테살로니키의 야만인들이 스틸리코 장군이 물리쳤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기쁜 일입니다.”
아르카디우스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늦은 시간에 찾아온 루피누스를 귀찮아하는 느낌이었다.
루피누스는 이를 악물고서 황제에게 간청했다.
“폐하! 이제는 우리 군을 돌려받아야 합니다! 이번 야만인들의 침공만 하더라도 군대가 멀리 나가 있는 통에 앞마당까지 들어온 이들을 처리하지 못한 게 아닙니까!”
“그,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폐하! 지난 프리기두스에서 찬탈자를 물리친 우리 군대가 너무 오랫동안 서방에 묶여있어 벌어진 참사란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요···. 그래서 제가 뭘 해야겠습니까?”
“스틸리코에게 군대를 돌려달라고 명령하시지요.”
루피누스의 말에 아르카디우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는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필경사에게 말해둘 테니 기다렸다가 받아가세요.”
“황은에 감사합니다. 폐하.”
아르카디우스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뒤를 따르던 환관 중 한 명이 슬그머니 빠져나오더니 루피누스에게 말했다.
“루피누스 님.”
“무슨 일인가.”
“듣자 하니 고민이 많아 보이십니다.”
루피누스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환관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일이 잘 안 풀려서 화가 나는 상황에서 사내구실도 못 하는 환관의 동정을 받는다는 사실에 화가 난 루피누스가 소리쳤다.
“내가 고민이 있건 없건 자네와는 무슨 상관인가! 가서 폐하나 잘 모시게!”
하지만 환관은 화를 내거나 당황하기는커녕 유들유들하면서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루피누스 님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흥, 네놈이 제안은 무슨 놈의 제안! 썩 꺼지지 않는다면 친위대를 부르겠다.”
루피누스의 호통에도 환관은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했다.
“경의 고민을 해결해드리겠습니다.”
“네깟놈이 무슨···.”
“스틸리코 장군이 콘스탄티노플로 올라오는 게 두려우신 것이 아닙니까?”
“허,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네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경께서는 스틸리코의 군대를 뺏으면 될 것으로 생각하시겠지만, 그에게 친위대와 서방의 황제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셨습니다.”
루피누스는 어느샌가 환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 스틸리코는 동방과 서방의 섭정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다른 탁고대신 들도 이를 지지하고 있지요.”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스틸리코는 군인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적이 많지요. 지금이야 괜찮지만, 그가 실수한다거나 문제가 생기면 사방에서 물어뜯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긴 하지···. 그런데 그게 지금 일과 무슨 상관인가.”
“경께서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선택이라고?”
루피누스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환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건가? 병사가 있으니 다시 뺏어와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지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스틸리코는 동방의 섭정도 겸한다는 말 때문에 동방에서도 적이 많습니다. 그런 그가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서 개선식을 하는 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 말에 루피누스가 탄식했다.
“자네의 말이 실로 틀린 말이 없군! 내 잠시 마음이 급해 너무 다급하게 움직였어!”
“그렇습니다. 경께서 스틸리코를 내버려 두면 그의 정적들이 알아서 그를 서방으로 내쫓을 것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스틸리코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나를 잡아가지 않겠나?”
“그렇다면 더욱 좋은 일이지요. 스틸리코를 공격할 훌륭한 수단이 되겠지요.”
환관의 말에 루피누스의 가슴을 턱 하니 막고 있던 고민거리가 사라졌다.
루피누스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환관에게 말했다.
“그래 네 말이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구나, 덕분에 큰 고민거리가 사라진 기분이야.”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환관이 고개를 숙였다.
루피누스는 흡족한 미소로 환관을 내려다봤다.
“자네 이름이 뭔가.”
“에우트로피우스.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입니다.”
환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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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황제 폐하께서 적들에게 손가락질하시면서 호통을 치시니 고트족들이 항복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스틸리코는 몰려오는 피곤과 짜증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오라고 해!”
“저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자네라도 허풍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자네도 그 말에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저도 제 말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판단은 장군께서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 그건 그렇다고 넘어가고, 황제 폐하는 어쩌고 자네만 덜렁 온 건가?”
스틸리코의 질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꼬맹이가 포로들을 데리고 족구 경기를 한다고 오지 않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안 그래도 꼬맹이의 호통 한 번에 적들이 항복했다는 것도 믿기 힘든데, 포로들이랑 공놀이한다고 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순간, 희대의 악마이자 싸이코 최 상병의 뒤를 잇는 스틸리코의 무한 갈굼이 시작될 게 뻔했다.
“폐, 폐하께서는 포로들을 통···. 솔하시면서 지원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스틸리코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폐하께서 지원을 원하시면 지원을 해드려야겠지. 필요한 게 무엇인가?”
“포로들을 감시할 병사들과 수거한 장비들과 무기들을 옮길 수레가 필요합니다.”
“군영장에게 말해둘 터이니 받아가게.”
“감사합니다!”
“아, 잠깐 기다려보게.”
경례를 올리고 군막을 빠져나가려는데 스틸리코가 나를 불러세웠다.
“부르셨습니까?”
“이번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선식을 열 생각인데, 자네와 친위대가 대열의 맨 앞에서 주게.”
“예?!”
개선식 대열 맨 앞이라니 절로 눈이 휘둥그레질 제안이었다.
로마인들의 가장 큰 영광이라는 개선식의 첫 번째라니, 스틸리코의 배려에 기쁨보다는 의문이 들었다.
“감사합니다만···. 어째서 저희가···?”
“그만큼 공을 세우지 않았는가?”
“하, 하지만 장군이나 가우덴티우스 장군님의 공이 더 크지 않습니까?”
“가우덴티우스와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이야기가 끝났다고?
이번 전투의 일등공신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영광을 포기한다니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스틸리코가 정치적으로 무슨 수를 쓴 것 같은데. 그게 뭔지를 잘 모르겠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선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거기에 친위대가 앞장서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내 짧은 생각으로는 알기 힘들었다.
“그런 영광을 양보하시겠다니 의아하군요.”
“내가 강요한 것도 없지 않지.”
“강요라니요···?”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동방의 황궁에는 루피누스가 섭정직을 이행하고 있어.”
스틸리코는 피곤했는지 오른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면서 말했다.
“서쪽의 일을 처리하느라 그 친구를 내버려 뒀는데 이제는 슬슬 처리할 때가 온 것 같아서 말이야.”
“그게 개선식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생각해보게, 제국에 위험이 닥쳐왔는데 동방의 황궁은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했어, 오히려 서방에서 온 군대가 적을 물리쳤단 말이지. 그럼 시민들의 동방의 황제나 원로원을 어떻게 생각하겠나?”
스틸리코의 말을 들으니 그의 심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장군께서는 동서로 분열된 제국을 다시금 합칠 생각이시군요.”
내 말에 스틸리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래는 야만인들을 물리치고 가니우스에 루피누스를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황제 폐하께서 친정을 오신다는 말에 생각을 바꿨지.”
“동방의 민심을 휘어잡으실 생각이시군요.”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서 루피누스와 원로원을 밀어내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호노리우스를 새겨넣는 거지.”
제법 괜찮은 생각 같았다.
루피누스와 아르카디우스의 무능함에 질려버린 시민들에게 알라리크라는 무서운 적을 물리친 스틸리코와 호노리우스의 모습은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일만 했다.
이런 시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 루피누스를 치워버리고, 그 틈에 생겨난 권력 공백을 통해서 동서통합을 노리는 스틸리코의 판단은 괜찮아 보였다.
“그럼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개선식의 선두에는 나와 황제 폐하가 앞장설 것이네. 자네와 친위대는 그 뒤를 따르면서 최대한 시민들의 눈에 띄게.”
눈에 띈다나.
생각보다 간단한 명령이었다.
내가 기른 지금의 친위대는 어디를 가나 눈에 띄는 모습이 아니던가.
“명받았습니다.”
“그래, 일단은 이 근처에서 이틀 정도 쉴 생각이니 출발할 때쯤 합류하게.”
“예, 장군!”
스틸리코에게 경례를 올리고 군막을 나오니 가우덴티우스가 나를 보면서 씩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누군가. 친위대장 마리우스 아닌가!”
“가우덴티우스 장군. 이번에 큰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그동안 연락도 없고 말이야 에이···.”
“하하하···. 연락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크크크···. 내가 이래서 수도를 안 간다니까. 자네도 이참에 어디 지방에 수비대나 들어가는 게 어떤가?”
“저는 지금 직책에 만족합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구먼.”
가우덴티우스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마침 그를 보니 문득 그렇게 자랑하던 아들 소식이 궁금해져서 물어봤다.
“장군, 아드님은 잘 지내십니까?”
“당연히 잘 지내지! 얼마나 똘똘한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글을···.”
가우덴티우스의 이어지는 자식 자랑에 정신을 놓을 뻔했다.
하지만 애써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런데 요새 고민이 하나 있다네.”
“고민이요?”
“그래, 슬슬 나이가 차서 이름을 정해야 하는데···.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구먼.”
가우덴티우스는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고민 중인 이름이라도 있으실 것 아닙니까?”
“옳거니! 자네가 정해주는 게 어떤가?”
“제가 말입니까?”
“사실, 스틸리코 장군에게 부탁하려 했지만···. 바빠 보이시니 자네가 대신해주게.”
“점찍어두신 이름이라도 있습니까?”
“있지.”
가우덴티우스가 씨익 웃으면서 누런 이를 드러냈다.
“아에티우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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