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87)

그리스? 로마? 신화?

로마기병대가 고트족의 후방을 들이치면서 전투는 사실상 끝나버렸다.

“주군! 물러나십시오. 위험합니다!”

“저 새끼들이 왜 저기서 나타난단 말이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선 몸을 피하시지요.”

알라리크는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전투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지만, 그의 병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알라리크가 도망치자, 남겨진 병사들은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 손 들고 항복했다.

수개월 동안 그리스를 휩쓸면서 동로마를 위협했던 알라리크의 부대는 단 한 번의 전투로 무너졌다.

전투가 끝나고, 알라리크를 따라온 병사들과 고트족 민간인들이 대거 잡히면서 이들을 가둬둘 공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병사들이 알라리크의 군막을 뒤져서 흥미로운 물건을 찾아냈는데···.

“장군. 알라리크의 군영에서 찾은 것인데···. 한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줘보게.”

스틸리코는 가우덴티우스가 건네주는 종이를 받아들고서 눈으로 훑었다.

내용 자체는 별 것 없었다.

돈과 식량을 언제까지 가져오겠다는 내용뿐이었지만, 문서의 맨 맡에 찍혀있는 인장이 문제였다.

“루피누스로군.”

“날짜를 보니 며칠 전까지 편지를 주고받은 듯합니다.”

“흠···. 이것 말고 다른 건 없었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야만인 녀석들이 정리를 해두질 않아서···.”

“전장의 정리는 대충 마치고 문서를 찾아내는 데 주력하게, 이 개새끼가 우리 정보를 적에게 팔아넘겼을 수도 있네.”

“예! 알겠습니다.”

스틸리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쯧쯧···. 루피누스 그러기에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는가 허허···.

******

한편, 고트족의 지휘부를 쫓아서 협곡을 내달리던 마리우스와 친위대는 가이나스의 부대와 맞닥뜨렸다.

“장군!”

“마리우스? 자네가 여기까지는 무슨 일인가?”

“그러는 장군이야말로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마리우스의 질문에 오히려 가이나스가 당황하면서 되물었다.

“자네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건가? 도와주러 온 건가?”

“저는 중군을 박살 내고 지휘부를···.”

마리우스는 말하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마리우스. 길을 잘못 든 것 같군.”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는 길에 적은 보지 못했나? 자네 쪽으로 몰려간 것 같은데 말이야.”

“적이요?”

“그래, 우리와 교전 중이던 적군이 물러나기에 뒤를 쫓는 중이었는데···. 못 본 건가?”

마리우스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기, 길이 엇갈린 모양입니다.”

“엇갈렸다니 그럼···.”

가이나스의 말문이 턱 막히더니, 가이나스의 얼굴 또한 새파랗게 질렸다.

이윽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황제 폐하!”

“황제 폐하!”

******

“이봐.”

“예, 폐하.”

“심심해. 마리우스는 언제 와?”

“금방 오실 것입니다.”

“심심한데···. 너 족구 할 줄 알아?”

“조, 족구 말입니까?”

데키무스가 당황하면서 황제를 말렸다.

“폐하! 이곳은 전쟁터입니다. 아직 어떤 위험이 남아있는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내가 하겠다는데 뭐 이리 말이 많아!”

“그것이 아니오라···.”

“시끄러워! 나 족구할꺼야!”

“폐하, 아직 전투가···.”

“너희들은 싸우고 있어, 난 족구하고 있을 테니까.”

황제의 고집에 데키무스가 말없이 고개를 숙여버렸다.

황제는 애지중지 보관하던 가죽공을 꺼내 들고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한 다섯 명만 데려와! 같이하게.”

“에, 폐하···.”

데키무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군막을 벗어났다.

“마리우스 장군께서는 도대체 저 지랄 맞은 성격을 어찌 받아내는지 원···.”

“장군!”

“음?”

데키무스는 급하게 자신을 찾는 병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나?”

“협곡에서 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마리우스 님을 잘못 본 게 아니고?”

“아닙니다!”

데키무스는 의심쩍은 눈초리로 병사를 훑어보고는 고개를 돌려 협곡 쪽을 봤다.

저 멀리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지만, 그게 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하게 본 것 맞나?”

“확실합니다!”

데키무스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병사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마리우스가 이끌고 간 병사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당장 경종을 울리고 병사들을 불러모아!”

“예! 장군!”

군영 내에 경종이 울려 퍼졌다.

병사들은 장비를 챙겨서 모이기는 했지만, 무슨 일인지 몰라서 잡담을 나눴다.

“무슨 일이냐?”

“잘 모르겠습니다.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었는데···.”

“저도 볼일보다가 끊고 나왔습니다.”

“수고했다고 간식이라도 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오- 그럴듯한데?”

한참 떠들던 병사들은 데키무스의 등장에 입을 다물고, 대열을 정돈했다.

병사들의 앞에 선 데키무스는 말했다.

“제군들 적이 몰려오고 있다.”

데키무스는 병사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원군이 언제 올지는 모른다. 우리 목표는 단 하나다. 폐하께서 피하실 시간을 번다.”

여기저기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키무스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말했다.

“전달사항은 이게 끝이다. 그럼 전부 제 위치로.”

데키무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황제의 군막으로 달려갔지만, 황제는 군막 안에 없었다.

데키무스가 당황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인근 공터에서 홀로 공놀이 중인 호노리우스를 찾아냈다.

“폐하!”

“오. 데키무스였던가? 빨리와 혼자 심심했어.”

“폐하, 대피하셔야 합니다! 적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적?”

호노리우스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연신 공을 튕기면서 놀았다.

“폐하, 저희가 시간을 벌 테니 그 틈에 피하시지요!”

“도망? 내가 왜?”

호노리우스는 능숙하게 가죽공을 발로 튕기더니, 이내 머리 위에 올려놓고 균형을 잡았다.

실로 대단한 기예였다.

하지만 정작 보고 있는 사람의 심정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폐하! 지금 폐하께서 적에게 잡히시거나 돌아가신다면 제국이···.”

“데키무스. 마리우스가 올 텐데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예?”

“마리우스가 와서 다 해치울 거라고! 그런 것도 몰라?”

“아니, 그것이···.”

데키무스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어린 황제를 더는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데키무스는 투구를 뒤집어쓰면서 말했다.

“폐하, 하다못해 자리라도 피해계시지요. 폐하께 문제가 생긴다면 마리우스 님에게 책임이 돌아갈 겁니다.”

“흠···.”

호노리우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기껏 전쟁터에 왔는데 너무 뒤에서 놀기만 했어.”

“예? 그 말씀은···.”

호노리우스의 말에 데키무스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도 갈 거야!”

******

“베르틸로경 이리로 가는 게 맞습니까?”

“끙···. 사실 잘 모르겠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아.”

알라리크의 우군을 이끌던 베르틸로는 한창 산을 헤매고 있었다.

알라리크가 패퇴했다는 소식에 달라붙은 로마군을 떼어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정작 산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무성한 숲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한참을 떠돌던 베르틸로와 병사들이 점점 지쳐갈 때쯤.

“장군! 장군! 저기 빛이 보입니다!”

“어디?!”

산속을 헤매던 그들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후후···. 로마놈들도 더는 쫓아오지 못하겠지!”

“역시 베르틸로경이십니다. 제법 먼 거리를 이동했으니 이제 걱정 없을 겁니다!”

“후우···. 하지만 알라리크 님과 다른 분들이 걱정이로군. 무사하시겠지?”

“우선은 주변을 수소문해서 식량부터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산 넘어 산이로군.”

베르틸로는 부대를 이끌고서 평원을 가로질렀다.

작은 언덕 하나를 넘어간 베르틸로는 눈앞의 광경에 당황했다.

“이, 이게 뭐야!”

“베, 베르틸로경! 적입니다!”

기세 좋게 행군하던 베르틸로와 그의 병사들 앞에 나타난 것은 검은 옷과 장비를 든 로마군의 모습이었다.

한눈에 봐도 여태껏 만나왔던 다른 로마군과는 다른 흉흉함에 베르틸로는 기겁했다.

“이곳에 왜 로마군이 있단 말인가!”

“로, 로마놈들이 우리의 이동 경로를 예측한 모양입니다!”

“간교한 놈들 같으니! 오냐 좋다! 오늘 여기서 먼저 죽어간 형제들의 복수를 하겠다!”

베르틸로가 기세 좋게 검을 뽑아 들었지만, 정작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런 베르틸리로를 부관이 막아섰다.

“안됩니다!”

“이거 놔라! 먼저 간 형제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

“베르틸로경 죽은 이들을 기억하려면 우선 살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경께서는 죽은 자를 위해 살아있는 형제들을 저버릴 생각입니까!”

베르틸로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병사들을 돌아봤다.

산과 숲을 헤치면서 이곳저곳이 찢어지고 해진 옷을 입고, 이곳저곳에 상처가 있는 피로에 찌든 패잔병들의 모습이었다.

이런 병사들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베르틸로의 손이 계속 떨려왔다.

“참나무는 태풍 속에서 부러지지만, 갈대는 끄떡없습니다. 이를 기억하시지요. 베르틸로경.”

“크흐으으음···.”

“경!”

베르틸로의 부관은 충성심에 젖어 울부짖는 듯이 보였지만, 실상은 죽기 싫어서 온갖 미사여구로 그를 꼬드기는 중이었다.

베르틸로 또한 다른 누군가가 말려주기를 원했고 말이다.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상황이 재밌게 흘러갔다.

“끓어오르는 이 분노를 삭여야 한다니···. 토르께서 나를 수치스러워하시겠구나!”

“참아내셔야 합니다. 잘 벼려낸 검도 수많은 망치질로 탄생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베르틸로는 부관을 돌아보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자네의 말이 실로 옳다.”

부관과 굳게 손을 맞잡은 베르틸로의 모습에 병사들이 환호를 보냈다.

이제야 살았다는 생각에 병사들의 환호 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베르틸로는 병사들의 지지를 뒤에 업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로마군의 모습에 베르틸로가 잔뜩 긴장했지만, 애써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고트족과 로마군이 점점 가까워지는 가운데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 졌을 때쯤.

로마군이 함성을 지르더니 대형이 갈라지면서 말을 탄 어린 꼬마가 고트족을 향해 다가왔다.

“저건···.”

“항복을 요구하려는 모양입니다.”

“자, 자네 라틴어 할 줄 아는가?”

“예?!”

둘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제 어떻게 하는가!”

“이, 일단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바닥에 엎드리는 게 어떻습니까.”

“그거 좋은 생각이네!”

둘은 잔뜩 긴장한 채로 점점 다가오는 꼬마를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귀한 집에서 자란 귀티가 흐르는 꼬마는 대뜸 베르틸로에 손가락질하면서 소리쳤다.

[네가 네 죄를 알렸다!]

둘은 약속했던 대로 고개를 숙이면서 바닥에 엎드렸고, 병사들도 뒤따라서 바닥에 엎드렸다.

******

“이, 이게 무슨···.”

데키무스는 눈앞의 광경에 경악했다.

호노리우스가 적을 마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자신이 죽더라도 황제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에 따라 나왔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호노리우스의 한마디에 수천의 고트족이 고개를 조아리면서 항복했다.

이 모습을 보지 않은 이들에게 설명한다면 허풍쟁이로 오해받기 충분한 일이었다.

“에헴, 그래 너희들의 죄를 너희가 알렸다!”

호노리우스는 더욱 신나서 고트족에게 손가락질했다.

호노리우스의 손가락에 가리켜진 이들이 몸을 벌벌 떠는 모습에 로마군도 전율했다.

‘뭐야, 쟤네 왜 저러는 거야.’

‘화, 황제 폐하께서 말 한마디로 적을 굴복시키셨다!’

‘오늘 저녁은 거르고 그냥 잘까.’

호노리우스는 말에서 내리더니 베르틸로에 다가갔다.

그 모습에 데키무스도 황급히 말에서 내려 호노리우스의 뒤를 따랐다.

호노리우스는 손수 바닥에 엎드린 베르틸로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낑낑거리면서 베르틸로를 일으킨 호노리우스는 그에게 말했다.

“이봐 너! 족구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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