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87)

그리스? 로마? 신화?

마리우스를 구하러 친위대가 달려 나왔고, 이에 질세라 고트족의 병사들도 비디메르를 구하기 위해 달려 나왔다.

양측 병사들이 부딪히면서 싸움이 시작됐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쓰읍···.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간 거야.”

“군의관을 부르겠습니다.”

“부탁하지.”

고트족 병사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병사들 사이로 사라지는 비디메르를 봤다.

핼쑥해진 녀석의 얼굴을 보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쁜 놈 꼴 좋-다.”

“마리우스!”

호노리우스가 다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어찌나 급히 달려오는지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지만, 용케 넘어지지도 않았다.

“마리우스! 괜찮아?!”

“괜찮습니다. 폐하.”

“마, 마리우스 팔이!”

갈라진 상처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는 내 팔을 본 호노리우스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마리우스 죽는 거야?”

“이 정도로는 안 죽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정말 더럽게 아팠다.

녀석의 도끼가 살짝 빗겨나갔기 망정이지, 그대로 팔이 잘려나갈 뻔했다.

소가죽으로 만든 건틀릿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고, 그 사이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게 까딱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팔이 날아갈 뻔했다.

군의관이 달려와서 상처에 약을 뿌리고 붕대를 감고 있는 동안에 고개를 돌려서 멀뚱멀뚱하게 나를 쳐다보는 호노리우스에게 물었다.

“폐하, 그런데 폐하께서 여기 와계신다면 전투지휘는 누가 하고 있습니까···?”

“응? 모르겠는데.”

시발.

그럼 지휘관도 없이 싸우고 있는 건가?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장군!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시끄러워! 내 무기하고 말 가져와!”

“마리우스 왜 그래.”

대충 붕대만 감고서는 병사가 몰고 온 말에 올랐다.

오른팔을 쓸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폐하, 저는 병사들을 지휘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이곳에 계시지요!”

“왜 그러는데.”

“지금 병사들이 전투 중인데 지휘를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대로 말을 몰아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위대와 야만인들이 싸우는 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투는 한창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친위대와 고트족 병사들이 부딪히면서 서로에게 무기를 휘둘러 대고 있었다.

창과 칼이 오가는 전투 속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고,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오면서 곳곳에서 병사들이 쓰러졌다.

좁은 방패벽 사이로 생과 사가 갈리는 전장 속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은 아군이었다.

돈을 처바른 게 헛된 일이 아니었는지 전투 중에 죽어 나자빠지는 인원보다 상처를 입고서 뒤로 실려 오는 인원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그동안 했던 훈련들이 헛된 일이 아니었는지 친위대는 로마군답게 싸우고 있었다.

“1열 교대!”

“다쳤으면 그냥 뒤로 빠져!”

“물러서지 마라!”

“자리를 지켜라!”

“마리우스 님이 돌아오실 거다!”

선임병들과 백 부장들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면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고트족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들도 악을 써가면서 병사들을 밀어 넣고 있었지만, 친위대의 방진에 흠집조차 못 내는 상황이었다.

“장군!”

“그래, 상황은?”

한창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데키무스가 나를 반겼다.

“전선은 상당히 안정적입니다. 장군께서 후송되신 후에 이어진 적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현 위치를 지키는 중이었습니다.”

“잘했다.”

분명 아군이 적을 밀고 들어가야 했지만, 비디메르가 쓰러지는 모습에 그를 지키려고 달려든 적군 덕분에 전투는 수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검은 옷과 장비를 한 친위대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자, 고트족의 무질서했던 공세가 점차 둔해지고 있었다.

“이런 씨발!”

“이 개새끼들은 지치지도 않나!”

“비디메르 장군이 크게 다치셨다던데···.”

“악마 같은 새끼들.”

시간이 점점 흘러갔지만, 친위대는 동요하거나 겁먹은 기색 없이 멀쩡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고트족의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점점 동료들이 죽어가자 슬금슬금 물러서기까지 했다.

“기병이 필요할 것 같은데···.”

“장군. 기병대는 가우덴티우스님이 대부분 데려가시고 남은 건 삼백 명뿐입니다.”

“그 정도면 딱 적당하지.”

“차라리 가우덴티우스님에게 전령을 보내시지요, 기병대를 불러서 확실하게 끝을 내시는 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너무 늦을 게 뻔했다.

그리고 스틸리코 장군의 생각을 알지는 못했지만, 가우덴티우스에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은 거로 봐서는 그의 단독행동이 부대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거겠지.

“죽이 되던 밥이 되든 간에 우리 선에서 끝낸다. 명령대로면 아군의 우익이 적의 좌익을 부숴버릴 때까지 버티는 거지만.”

붕대를 칭칭 감은 오른팔을 들어서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면서 팔의 상태를 점검했다.

조금 고통이 밀려오긴 했지만, 당장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대로 중앙을 박살 내고서 적의 지휘부까지 일직선으로 뚫고 나간다. 기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해야지.”

“그럼 폐하는 누가 지킵니까?”

데키무스의 말에 아차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무슨 일이 생기기야 하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데키무스 자네가 맡게.”

“제가 말입니까?”

“그래, 후방에 따로 빼뒀던 예비대 병력이랑 같이 폐하를 지키게.”

“알겠습니다.”

데키무스가 떠났다.

남아 있는 기병대를 점검하면서 말에 오르느냐고 마음 한쪽이 찝찝한 것이 괜스레 뒤를 돌아보게 됐다.

“괜찮겠지?”

“뭐가 말입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준비는 됐나?”

곁에 있던 기병이 힘차게 대답했다.

“예! 장군.”

말에 올라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치열했던 백병전이 슬슬 끝이 나려는 듯이 고트족 병사들이 물러나고 있었다.

친위대 병사들이 물러나는 고트족들을 향해 역으로 공세를 취하자 몇 번 검을 주고받던 야만인들의 진형이 무너져 버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바람을 가르면서 달려나가 그대로 적의 부드러운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기병이다! 기병···.”

“컥.”

“케흑.”

말에 치인 병사들이 여기저기로 튕겨 나갔다.

창에 꿰뚫린 병사들은 단번에 숨이 끊어졌지만, 말에 치인 병사들은 온몸의 뼈들이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죽어 나갔다.

말발굽에 차인 병사들은 덜렁거리는 몸뚱어리를 부여잡으면서 비명을 질렀고.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온갖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고작 삼백에 불과한 기병들이 수천명이나 되는 고트족 병사들을 휩쓸고 있었다.

“이대로 뚫고 지나간다. 모두 따라와!”

“예!”

기병대는 가을에 농작물을 수확하는 농부처럼 적의 방진을 뚫고 지나가면서 고트족 병사들을 밀어버렸다.

곳곳에서 쳐 난 공포는 이내 병사들의 이성을 좀먹어 버렸고, 부실했던 적의 방진이 완전히 무너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악!”

“살려줘!”

“엄마-!”

적들은 무거운 무기와 갑옷들을 벗어 던지고서는 도망쳐버렸다.

수천의 적이 도망가는 모습은 산이 움직이는 듯했다.

“장군, 대승입니다!”

“아직 승패는 정해지지 않았다. 병사들을 정비해서 이대로 적의 지휘부를 들이친다.”

“아, 예! 장군.”

적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긴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생각보다 병사들의 수가 턱없이 적었다.

물론 아군에 비해서는 많았지만, 적들의 규모를 생각해보면은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병사들의 질도 생각보다 떨어졌고, 말이다.

마치, 시간을 끌기 위해 남겨둔 미끼 같았다.

******

한편, 스틸리코가 이끄는 우군은 적의 저항에 한 걸음도 못 움직이고 있었다.

적의 숫자가 너무 많기도 했고, 상대측의 정예병들인지 여태까지 상대했던 야만인들과는 다르게 금새 무너지지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군. 적의 저항이 완강합니다.”

“적들의 장비가 좋아보이는군.”

“그렇습니다. 여태까지 만난 다른 야만인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입니다.”

“흐음...”

스틸리코는 적들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내 근질거리는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밀집대형을 펼쳐서 버틴다.”

“버틴다는 말씀입니까?”

“가우덴티우스라면 지금쯤 적의 기병대를 박살 내고서 먹잇감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을 거야, 우리는 그들을 기다린다.”

“알겠습니다.”

스틸리코의 명령에 병사들이 대형을 밀집대형으로 재빠르게 바꿨다.

거북이가 단단한 껍질에 몸을 숨기듯이 로마군이 방진 안에 숨어버리자, 고트족이 몰려들어서 사방에서 방진을 두들겨 댔다.

“로마놈들 겁쟁이처럼 꼭꼭 숨은 꼴이라니!”

“빨리 나와라!”

“하하하 겁쟁이들!”

******

알라리크는 순식간에 진형을 바꾸는 로마군을 보면서 감탄했다.

“전투 중에도 저런 대형변경이 가능하다니···. 역시 대단하군.”

“주군, 비디메르 님에게 너무 적은 병력을 들려주신 게 아닐는지요.”

“괜찮아, 병력이 적긴 해도 적들보다는 많으니 실수하지만 않는다면 문제 없을 거야.”

“예···.”

알라리크는 한참 백병전을 벌이고 있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아군 기병들은 어디 간 건가? 도통 보이지 않는군.”

“아마도 적 기병들을 상대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너무 늦어.”

알라리크는 불안감을 느꼈다.

분명 자신의 기병대가 말을 잘 타는 것은 맞았지만, 기마술과 비교하면 장비는 형편없었다.

그랬기에 로마 기병대를 상대로 시간만 끌다가, 따돌리고서 돌아오라고 했거늘···.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이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전령을 보내···.”

“주군, 기병대입니다!”

알라리크는 부관이 손가락으로 가르치는 방향을 바라봤다.

산에 난 오솔길을 따라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숲에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아군 기병대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적을 따돌리느라 조금 늦은 모양입니다!”

“그래···. 괜한 기우였군.”

하지만 알라리크의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저···.”

“저건···!”

오솔길을 내려온 기병대는 로마 기병대였다.

******

“후···. 늦지 않았군.”

가우덴티우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트족 기병대를 상대하느라 시간을 너무 끌어버렸지만, 그래도 늦지 않게 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숲속에 난 오솔길을 달려오느라 말들이 지쳐버렸지만, 마지막으로 전투를 할 여력은 남아 있었다.

“녀석들 당황하는 꼴 좀 보라지.”

가우덴티우스는 사신이라도 만났다는 듯이 겁에 질린 야만인들을 보면서 창을 들었다.

“저 새끼들 겁먹은 꼴 좀 보라지.”

“하하하.”

가덴티우스의 말에 병사들의 웃음소리가 터져나 왔다.

“자! 형제들이여 겁 없이 로마 땅을 밟은 저 야만인들의 엉덩이를 걷어찰 시간이다!”

“우오-!”

가우덴티우스가 앞장서서 달려나갔다.

그 뒤를 병사들이 뒤따랐다.

협곡 안에 울려 퍼지는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에게 우리가 왔음을 알려라!”

“로마-인빅타!”

“아군에게도 우리가 왔음을 알려라!”

“로마-인빅타!”

“우리의 신께 우리가 왔음을 알려라!”

“로마-인빅타!”

성난 파도처럼 밀려든 기병대가 고트족을 덮쳤다.

파도에 부딪히는 모래처럼 병사들이 휩쓸러나 갔고, 알라리크는 허탈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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