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
나는 작렬하는 태양 아래 서 있다.
겨울임에도 남쪽이라 그런지 따뜻했다.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말을 몰아서 적진 앞까지 홀로 나아가서 소리쳤다.
“야만인 새끼들과 너희가 제일 잘하는걸 하러 왔다! 한판 붙자!”
라틴어로 소리쳐서 혹시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용케 알아들었는지 야만인 중의 하나가 내게 소리쳤다.
“남의 집 앞에서 짖지 말고 돌아가~”
“다리 사이에 달린 건 장식이냐! 나 하나 상대 못 하고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다 나오는구나!”
이번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거인이 야만인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런데 건너편에서 걸어 나오는 야만인의 모습이 꽤 낯이 익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거기 로마놈! 우리 구면이지?]
“하하하! 판노니아에서 부하들을 잃고 개처럼 도망친 놈이 아닌가!”
[판노니아에서는 신세 많이 졌다.]
“거참 네가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하냐!”
큰 덩치에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절대 잊히지 않는 눈빛까지···.
판노니아에서 놓쳤던 그 새끼가 확실했다.
창을 쥔 오른손에서 땀이 차올랐다.
[나는 고트족의 전사 비디메르다! 이제 끝을 봐야지!]
“허···. 참 씨발···.”
아무래도 자기소개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로마의 친위대장 가이우스 마리우스다! 오늘 네가 죽든가 내가 죽든가 둘 중 하나겠지.”
수천, 수만 개의 눈동자가 나와 눈앞의 녀석을 향하고 있었다.
투구에 달린 마스크를 내리고는 말 배를 걷어차니, 놀란 말이 빠르게 앞으로 내달렸다.
******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이틀 전에 있었던 전략회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루피누스가 몇 번이나 전령을 보내서 병사들을 돌려달라고 아우성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병사 간에 분란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 정도야 늘 있는 일이 아닙니까? 병력을 돌려 주는 것은 저 야만인들을 무찌른 이후에도 늦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스틸리코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건 그렇지. 어차피 당장은 눈앞의 야만인들만 생각해야지.”
“하지만 병사들의 사기도 말이 아닙니다. 당장 적보다 곁에 있는 다른 병사들을 더 미워하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떨어진 사기야 다시 끌어 올리면 그만 아닌가.”
스틸리코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면서 무시했고 말이다.···.
“장군. 방법이 있으십니까?”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확실한 방법이 있긴 하지.”
“전통적이면서···. 확실한 방법···?”
스틸리코의 시선을 따라서, 다른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시선이 집중되는 걸 참지 못한 내가 한마디 했다.
“왜 다들 절 보시는지요?”
“마리우스.”
“예, 장군.”
“듣자 하니 판노니아에서 제법 활약했다고 들었네.”
“예? 그렇습니까?”
저 양반이 도대체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감이 안 잡혔다.
애초에 내가 소문이 날법한 짓을 했던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대대기를 창처럼 휘둘러서 부족장의 머리통을 깨부순 것.
어린 족장 놈을 쓰고 있던 투구로 머리통을 깨버린 일.
도끼에 맞아서 수 미터의 성벽 아래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은 일들이 떠올랐다.
와 시발!
누군지 모르겠는데 군 생활 참 열심히 했구나.
근데 그게 나네?
몇 번을 곱씹어봐도 내가 한 게 맞는지 의심이 갈 전적이었다.
“듣자 하니 깃발로···.”
“하, 하겠습니다!”
“음? 무슨 일인 줄 알고 그러나.”
“시켜만 주십시오! 장군께서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마터면 내 흑역사가 세상에 퍼질 뻔했다.
도대체 이 양반은 어디서 쓸데없는 말을 들어와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단 말인가?
벌써 호노리우스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지 않은가?
아이-싯팔!
“자, 그럼 우리 쪽 대전사는 마리우스가 가는 거로 하고···.”
“장군! 대전사라니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전통적인 방식이라길래 선봉 같은 걸 맡길 줄 알았더니, 그보다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대전사라니!
전통적인걸. 넘어서 야만적인 방법이 아닌가!
“자네가 가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게 대전사라고는 말 안 하셨잖습니까!”
“애초에 묻지도 않았잖는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생각해보니 급발진한 내 잘못도 있었다.
졸지에 남들 앞에서 막고라를 하게 된 상황에 참담해질 때쯤.
진중하게 날 바라보던 스틸리코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게 말했다.
“마리우스 겸손도 그 정도면 지나친 법이야, 자네는 자신을 너무 낮게 보고 있어.”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동안 해왔던 일을 되짚어보니 하나같이 맨정신으로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미친 짓들만 떠올랐다.
생각보다 짧은 군 생활이었지만, 남들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또 열심히 움직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용기가 생겼다.
애초에 전쟁터에서 내가 못 이긴 녀석이라고는 판노니아에서 만난 그 덩치 큰 야만인 새끼뿐이었는데, 설마 그런 녀석이 또 있을까 싶었다.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자네는 자신을 너무 낮게 보는 경향이 있어. 조금은 그 눈을 높여보게나 자네도 이제는 다른 이들을 지휘하는 상황이 아닌가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 건은 그렇게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어떻게 적을 상대할지를 논의해보지.”
스틸리코는 조금 전보다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장교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적의 수가 아군보다 많다네, 거기에 여태까지 만나왔던 야만인들과는 다르게 무장도 충실하고 말이야.”
“힘든 싸움이 되겠군요.”
“그거야 자네들과 내가 어떤 전술을 짜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가우덴티우스가 손을 들고 말했다.
“장군, 그래도 기병 전력은 우리가 압도적이지 않습니까. 적의 기병대를 박살 내고 협곡의 앞과 뒤에서 적을 후려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석적이군. 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야. 여러 장수는 어찌 생각하는가?”
스틸리코가 장교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그러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장교 하나가 손을 들고 말했다.
“장군. 적은 협곡 입구에 포진해있습니다. 그래서 아군이 뒤를 치려고 한다면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서 뒤를 쳐야 할 텐데. 적이 숲에 매복이라도 했다면 큰 봉변을 당할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거기에 이 지형은 기병들이 활약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일부 중기병들을 남기고 전부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장교들의 반대에 스틸리코가 눈을 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지형에서는 기병들보다 보병들의 활약이 빛나는 법이지.”
“장군! 적들을 끌어들이는 방법도 있습니다.”
“끌어들인 다라?”
“예! 그렇습니다.”
스틸리코가 관심을 보이자 의견을 냈던 장교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적이 입구에 진을 친 것은 아군이 먼저 공격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의 방어를 깨트리고 스스로 들판까지 걸어 나오게 만드는 겁니다!”
“계속해보게.”
장교는 지도위에 놓인 말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설명했다.
“아군이 가지고 있는 스콜피오와 투석기들을 이용해서 적의 사정거리 밖에서 적을 괴롭히는 겁니다. 그럼 적들은 견디지 못하고 결국 튀어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으음···.”
스틸리코는 말없이 지도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그건 힘들겠군.”
“예?”
“지금 당장 투석기나 스콜피오를 만든다고 해도 얼마나 만들 수 있겠는가, 그리고 탄환은 또 어디서 구해오겠나.”
“그, 그건···.”
“그리고 적들이 고작 몇 명 죽는다고 뛰쳐나올 법한 머저리는 아니지 않은가. 그저 우리의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게 더 빠르겠지.”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닐세.”
스틸리코는 침묵하고 있는 장교들을 다시금 둘러보면서 물었다.
“그래, 의견 있는 사람 더 없나?”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에 스틸리코는 피식 웃으면서 다시금 물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무슨 방법이 있겠나.”
스틸리코는 지도위에 놓인 로마군의 말들을 야만인들 앞까지 밀어버리면서 말했다.
“어차피 남은 것은 힘 대 힘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네, 우리가 제일 잘하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정면으로 싸우는 걸 두려워했던가, 우리의 선조들이 적이 많다고 해서 두려워했나?”
“아닙니다!”
“그럼 전술은 한가지다! 가서 죽이고 뺏고 가져와라! 우리의 신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니!”
스틸리코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가이나스!”
“예, 장군!”
“자네는 좌익을 맡아주게. 적의 우익과 맞닥뜨려도 무리하지 말고, 적을 물고 늘어지기만 하면 된다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
“믿겠네.”
스틸리코는 고개를 돌려 가우덴티우스를 바라보면서 그를 불렀다.
“가우덴티우스!”
“예, 장군!”
“자네는 기병대를 맡아주게.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적이 빈틈을 보인다면 그 뒤는 자네의 판단에 맡기겠네.”
“명받았습니다.”
스틸리코는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마리우스.”
“예, 장군.”
“자네의 역할이 제일 중요하다네.”
또 갑자기 부담감을 주는 게 영 불안했다.
그냥 나는 쉬운 일 시켜주면 안 되나?
뒤에서 숨는 건 제일 자신이 있는데···.
“자네는 폐하를 모시고 중앙을 맡아주게.”
“주, 중앙 말입니까?”
아니 시발.
언제는 호노리우스는 어디 언덕에 데려다 놓고서 관전만 시킨다면서 왜 말이 바뀌는 거지?
스틸리코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좌익에 정예병들을 몰아넣어서 적의 우익을 박살 낼 생각이네. 그동안 친위대가 중앙에서 버텨주게.”
“장군. 그럼 적과 싸움이 끝나자마자 본대로 돌아와서 적의 중앙군과 싸우라는 겁니까?”
“바로 맞췄네.”
상태창! 상태창! 상태창!
어딨는 거야 상태창!
로그아웃! 로그아웃! 로그아웃!
애타게 속으로 상태창과 로그아웃을 외쳐봤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남들 모르게 허벅지도 꼬집어 봤지만, 꿈도 아니었다.
호노리우스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망토를 잡아당기면서 내게 속삭였다.
“마리우스, 이제 싸우러 가는 거야?”
“폐하를 부탁하겠네.”
“......”
하지만 뭐 어쩌겠나.
하라면 해야 하는 게 군대 아닌가.
적어도 살아남는다면 전공 하나는 다른 이들을 압살해버릴 만큼 생길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전공을 세우고 싶지 않은 게 내 본심이었고 말이다.
“사흘 후에 군을 움직일 테니, 그동안 병사들을 잘 다독이게.”
******
말을 몰고서 적을 향해 달려갔다.
말이 점점 속도를 올릴수록 내 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날카로워졌고, 손에 든 창이 점점 무거워졌다.
말 위에서 싸우는 게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등자로 무게중심을 잡으면서 가우덴티우스가 알려줬던 대로 두 손으로 창을 움켜잡았다.
[와라!]
두 손으로 움켜쥔 창끝은 적에게로 향했다.
[어딜!]
빠르게 비디메르를 향해서 돌진했지만, 비디메르는 재빠르게 바닥을 구르면서 피했다.
그리고는 손에 쥔 도끼를 휘둘러서 말의 다리를 때렸다.
연약한 다리가 수수깡 부러지듯이 부러지자, 말은 구슬픈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엎어졌다.
나 또한 말에서 떨어져서 바닥을 굴렀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목과 오른팔이 저리고, 머리가 울렸지만, 머리를 흔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살아있군.]
“칵-퉤.”
내 입안에 머금은 흙은 뱉어내고는 다가오는 녀석에게 창을 던졌다.
비디메르는 가볍게 창을 피했고, 나는 그대로 달려나가면서 검을 뽑아 들어 그래도 머리를 후려쳤다.
하지만 비디메르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내 공격을 가볍게 흘려냈다.
[지난번에도 머리만 노리더니···. 또 머리군!]
재빠르게 옆으로 구르면서 비디메르의 도끼를 피했다.
어지간한 사람 머리의 두세 배쯤 될법한 도끼 머리가 내려쳐질 때마다 땅이 움푹 패였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가면서 틈을 노려봤지만, 비디메르의 움직임에는 빈틈이 없었다.
마치 단단한 성을 마주한 것처럼 압도당하고 있었다.
일단 거리를 벌리면서 비디메르에서 떨어지니, 비디메르가 그런 나를 보고 비웃었다.
[기세등등 할 때는 언제고, 도망을 다니기에 바쁘군.]
“너희 말 좀 그만하고 라틴어로 해줄래?”
[이제 곧 끝이 다가온다. 네놈이건 로마건. 모두 알라리크 님의 발아래 쓰러지게 될 테지.]
잠시 숨을 고르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다리가 부러진 말은 다리를 절면서 본진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조금 전에 던진 창이 땅에 박혀있었다.
숨을 고르고서는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비디메르 또한 도끼를 들어 올리면서 묘한 긴장감을 일으켰다.
“씨발.”
한참이나 숨을 고르던 나는 그대로 비디메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솔직히 별생각은 없었다.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생각과 뒤질 땐 뒤지더라도 저 새끼는 잡고 간다는 생각이 맞물려서 달려들었다.
비디메르가 내 오른팔을 노리고서 도끼를 내리쳤다.
피하거나 막지 않고 그대로 어깨로 비디메르의 몸통을 밀치면서 허벅지에 검을 박아넣었다.
비디메르의 도끼가 내 오른팔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갑옷을 박살 내면서 상처를 입혔고, 내 검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게 묵직하면서도 단단한 감각과 함께 허벅지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크아악]
“씨발!”
왼팔로 피가 흐르는 오른팔을 붙잡고서 뒤로 물러났다.
황급히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움직여보니 다행히도 잘 움직이는 것이 팔은 멀쩡한 듯싶었다.
[씨발!]
“꼴 좋다.”
허벅지가 꿰뚫린 비디메르는 몇 걸음 못가 뒤로 넘어지더니, 도끼를 지지대 삼아서 엉거주춤 일어나는 모습이 참으로 웃겼다.
물론 나도 오른팔에 가죽 건틀릿이 너덜너덜해지고, 그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팔은 멀쩡한데!
“마리우스를 구해!”
그때, 앳된 목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디메르 님을 구해라!]
서로 양측의 함성이 들려오면서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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