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87)

그리스? 로마? 신화?

메디올라눔에서 출발한 지 일주일이 흐를 때까지는 괜찮았다.

병사들도 딱히 신경을 쓸 게 없었고, 보급수레도 빵빵했으니 말이다.

호노리우스도 전쟁터로 나가는 늠름한 황제를 상상하면서, 황궁에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호노리우스가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 지친 호노리우스는 얼마 가지 않아서 말에서 내려 준비해온 마차에 타서는 온종일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마리우스 심심해~”

“폐하, 조금 전에 재밌는 이야기를 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참으시지요.”

“심심하다고!”

처음에는 온갖 이야기를 해주면서 호노리우스를 즐겁게 해주었으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행군 중간중간에 휴식을 취하면서 병사들과 공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것도 지루해진 호노리우스는 괜스레 지나가는 병사에게 돌을 던진다거나, 가만히 쉬고 있는 이들을 불러 귀찮게 하기 일쑤였던지라, 내가 언제나 곁에 붙어서 짜증을 받아줘야만 했다.

덕분에 행군대열은 점점 늘어지면서 개판이 되어갔고, 덕분에 평상시라면 한 달이면 도착했을 거리를 한 달 하고도 반이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다르다니아와 마케도니아의 경계를 지날 때쯤 호노리우스도 완전히 지쳤는지 더는 칭얼거리지 않았다.

대신 뜬금없는 말로 사람을 귀찮게 했다.

“마리우스 병사들보고 노래라도 부르라고 해봐.”

“폐하, 병사들은 광대가 아닙니다.”

“아니! 지난번에 불렀던 그거 있잖아!”

“군가 말입니까?”

“그래! 그거!”

지난번에 달마티아를 지날 때쯤, 행군 중에 너무 심심해서 나도 모르게 군가를 흥얼거렸는데, 용케 그걸 주워들은 병사들이 따라 부른 적이 있었다.

음도 박자도 엉망이었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로마인들답게 금세 음정과 박자를 새로 만들어내더니 이제는 자기들 비공식 군가로 가끔 부르고는 했다.

“그렇게 심심하십니까?”

“책도 다 봐서 이제 할 게 없어. 그러니까 빨리 노래시켜봐!”

그 순간 재밌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폐하, 이들은 폐하의 군인들입니다. 폐하께서 근엄하게 명령을 내려보시지요.”

“내, 내가?”

꼬맹이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흥, 못할 줄 알고?”

호노리우스는 마차의 창문을 열어젖히고서는 앳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노래 한번 해봐!”

하지만 병사들은 황제의 명령에도 눈치를 보면서 어느 누구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호노리우스가 당황했다.

꼬맹이가 당황하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풉.”

“이익···. 마리우스 너! 감히 황제를 비웃어!”

“아니, 이 모습을 보고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말하는 게 잘못되었습니다. 폐하.”

“뭐가!”

“노래를 뽑아봐라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절 따라 해보시죠.”

목을 한번 가다듬고서는 말했다.

“이동 중에 군가 한다. 군가는 푸른- 소나무-!”

“우와···. 나도! 나도 할래!”

“하하하 해보시지요.”

호노리우스가 앳된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병사들이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꼬맹이는 뿌듯하다는 얼굴이었고 말이다.

“마리우스 근데 소나무는 뭐야?”

“제 고향 땅에서 많이 있던 나무입니다.”

“마리우스 고향에는 신기한 게 많네?”

“그렇습니까?”

“나도 마리우스 고향에 한번 가볼래!”

“나중에 시간을 내보지요.”

병사들의 군가 소리가 산에 부딪혀서 울려 퍼지고 있었고, 부대는 그리스에 도착했다.

******

시간이 흐르고 있었지만, 스틸리코와 알라리크는 진지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를 도발하면서 서로 상대가 공격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장군.”

“오늘도 왔나?”

“예, 다행히도 활을 쏴서 쫓아냈습니다.”

“아무래도 저들의 마음이 급해지는 모양이군.”

“이곳에서 오래 있어봤자 좋아질 게 없으니까요.”

“병사들의 상태는 어떤가.”

가우덴티우스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동부의 병사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아무래도 고향이 근처인지라 더 그런 것이겠지요.”

“심각한가?”

“며칠 전에 서부와 동부의 병사들이 편을 갈라서 주먹다짐을 했습니다.”

“심각하군.”

“루피누스도 황궁을 보호할 병력이 필요하다면서, 병력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스틸리코는 웃고 있었다.

이에 의아함을 느낀 가우덴티우스가 물었다.

“장군, 지금은 웃을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웃기지 않은가, 저들도 시간에 쫓겨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우리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어.”

“장군. 차라리 증원이 오기 전에 적을 몰아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하하, 하려면 진즉에 해야 했었네. 이미 적들도 대비하고 있을 거야.”

“차라리 적들을 밀어내기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 기병대가 전장을 우회해서 적의 뒤를 치겠습니다.”

스틸리코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하네, 자네들이 안 보인다면 적이 기병대를 들이밀 게 아닌가.”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이대고 가만히만 계실 겁니까? 아군이 올 때까지?”

“어제저녁에 전령이 말하지 않았는가, 점심쯤이면 도착한다고 말이야.”

가우덴티우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황제 폐하께서 친정을 오신다는 게 더 걱정됩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어린 황제께서 전쟁을 알면 얼마나 아시겠습니까?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요.”

“허허 쓸데없는 걱정이야. 폐하께서 손수 군을 지휘하겠다고 하시겠는가?”

스틸리코는 웃고 있었다.

******

“저놈들은 이곳에 눌러앉을 작정인가 보군.”

“주군, 이렇게 대치만 한 지 어느덧 한 달 하고도 반이나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야. 훈족 놈들의 소식은 들리지도 않고 말이야···.”

“적의 원군이 오고 있는 게 아닐는지요?”

“원군? 그렇군, 그거였어.”

“지금이라도 군을 정비해서 들이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라리크는 고민하듯이 턱을 괴었다.

“주군. 무엇을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당장 오늘이라도 적을 들이치시지요.”

“적의 원군이 어디까지 왔는지 모르지 않는가, 자칫 잘못하다가 적에게 뒤를 잡힐 수가 있네.”

“끙···. 그건 그렇습니다.”

비디메르는 지난날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면서 쭈그러들었다.

“차라리 적의 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잡는 편이 괜찮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병사들을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비디메르가 천막을 나서자 알라리크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

테살로니키에 도착하니 스틸리코가 손수 마중을 나와 있었다.

호노리우스는 드디어 전쟁터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흥분했고 말이다···.

“숙부!”

“폐하, 오셨습니까.”

“장군. 고생 많으셨습니다.”

말에서 내린 내게, 스틸리코가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고, 스틸리코가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 몰랐는데 말이야.”

“저도 장군을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래도 잘 왔네.”

스틸리코가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면서 말했다.

“병사들은 내 휘하에 배속시키겠네! 자네는 폐하를···.”

그때, 호노리우스가 스틸리코의 말을 잘라먹으면서 말했다.

“숙부! 병사들은 제가 지휘할 거예요!”

“폐하?”

스틸리코는 굉장히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눈을 돌려 나를 노려봤다.

살벌한 스틸리코의 눈빛에 몸이 떨려왔다.

아니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나한테 그러세요···.

“전 아닙니다.”

“설명해보게.”

“폐하께서 전쟁을 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그게 다인가?”

“...예.”

스틸리코는 한숨을 내쉬면서 호노리우스에게 말했다.

“폐하, 폐하의 마음은 잘 알지만, 전쟁은 장난이 아닙니다. 지금은 안전한 곳에서 지켜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으음···.”

기세등등했던 호노리우스도 스틸리코를 이길 수는 없었는지 꼬맹이가 스틸리코의 눈을 살살 피하면서 말했다.

“그, 그래도 페테르는 나보다 어렸는데 부대를 지휘했는걸···.”

“페테르? 그건 또 누구입니까.”

“마리우스가 알려준 사람인데 전쟁을 했다 하면 이겼어!”

꼬맹이의 말에 스틸리코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봤다.

자고로 사람은 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스틸리코에게 제대로 찍힐 것 같아서 호노리우스를 살살 달랬다.

“폐하, 스틸리코 장군의 말이 옳습니다. 지금은 멀리서 관전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시지요.”“으음···. 내가 지휘하고 싶은데.”

“폐하,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폐하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기겠습니다.”

“중요한 역할?”

“자네 그게 무슨···.”

스틸리코가 발끈했지만, 그를 무시하고서 호노리우스에게 말했다.

“근처의 고지에서 전장을 내려다 보시면서 명령을 내리시는 겁니다.”

“오오!!”

“어때요. 참 재밌지 않겠습니까?”

“좋아! 할래!”

“마리우스···!”

스틸리코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지만, 애써 모른 척하면서 호노리우스를 가우덴티우스에 맡겼다.

“장군! 부탁드리겠습니다. 폐하께 진지를 구경시켜 주십시오.”

“응? 그, 그래 그러지···. 폐하 이쪽입니다.”

나와 스틸리코의 눈치를 보던 가우덴티우스가 황제를 데리고 가버리자, 스틸리코가 내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아직 병사들을 지휘하실만한 실력이 되지 않는데 왜 그런 건가!”

“장군, 어차피 명령체계라는 게, 명령을 내린다고 곧바로 전해지는 게 아니잖습니까.”

스틸리코는 그제야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허···. 그건 그렇지···. 수도에서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군.”

“애 다루는 건 선수가 되었지요.”

“하하하···. 그건 조금 미안하게 되었네.”

스틸리코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한참이나 웃었더니 배가 당길 정도였다.

스틸리코가 찔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그래, 친위대는 내가 지휘해도 되겠나?”

“으음···. 그건 조금···.”

“하하하. 자네도 이제 자기 밥그릇을 챙기겠다는 건가? 예끼!”

“하하하···. 나름대로 공을 들여서 키운 이들입니다. 전부는 그렇고···. 기병대 삼백 명만 제 휘하에 남겨주십시오.”

“그 정도야 뭐.”

“아, 그리고 저는 폐하의 경호 때문에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래야지.”

나는 친위대를 원하는 스틸리코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물었다.

“병사들이 모자라십니까?”

“정확히는 믿을만한 병사들이 얼마 없어.”

“그건 무슨 소리십니까.”

“동부의 병사들은 금방이라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하고, 서부에서 데려온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 보이네.”

“으음···. 그건 좀 심각하군요.”

병사들의 사기가 문제인 듯했다.

이대로 싸웠다가는 적들과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병사들이 도망갈 게 뻔했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신 덕에 사기가 조금은 나아졌겠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것도 안 된다면···.”

스틸리코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불안하면서도 끈적거리는 그의 눈빛에 몸서리치면서 말했다.

“안 합니다.”

“응? 뭔지 들어는 봐야 할 것 아닌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또 저 보고 시키시려는 것 아닙니까?”

“허허... 이친구야 시키다니? 다 자네 잘되라고 하는 게 아닌가.”

“장군. 저는 이미 잘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틸리코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자네도 훈장 하나쯤 받아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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