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87)

그리스? 로마? 신화?

“심마쿠스님 그리스라니 그 먼 곳까지···.”

“어쩌겠나, 폐하께서 출정하신다는데.”

“그럼 저는 수도에 남아도 되겠습니까?”

마리우스의 말에 심마쿠스가 몹시 화가 난 듯이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폐하를 가장 가까이서 모셔야 할 친위대장이라는 자가 폐하의 곁을 지키지 않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니···. 제가 해야 할 일도 있고, 그리스에는 스틸리코 장군이 계시는데···.”

“자네가 일을 벌였으니 자네가 책임져야 할 게 아닌가!”

심마쿠스의 말이 맞았다.

이 방정맞은 입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결론적으로 내가 책임지는 게 맞았지만, 굳이 그리스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멀기도 멀었거니와 아칸이 흉계를 꾸미고 있는 이때 수도를 비운다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동안에 전쟁을 대비하면서 병사들을 단련시키고 무장시킨 것은 맞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칸과 그 휘하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한 준비였을 뿐이다.

고트족과 싸우면서 소모될 전력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늦어도 오늘 저녁까지는 준비가 끝나야 하네.”

“예, 알겠습니다.”

심마쿠스가 바쁘게 발걸음을 놀리면서 병영을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아칸이 왜 꼬맹이를 부추겼을까?’

‘설마 그 영감탱이가 눈치챈 건가?’

머릿속에 의심이 싹트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연기는 완벽했다.

정확히는 남들이 보기에는 쉽게 의심하기 힘들 정도였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칸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번 건만 하더라도, 평상시 같았으면은 어린 호노리우스를 잘 달랬을 아칸이 오히려 호노리우스를 부채질해서 전쟁터로 내보낸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친위대가 좀 크니까 이번 기회에 전력을 좀 꺾어놓겠다는 건가?”

이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호위병력을 끌고서 아칸의 저택으로 갔다.

아칸은 한껏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그래, 자네가 고생이 많네.”

“아칸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무엇이 말인고?”

“폐하의 곁에서 말리시지는 못할망정 부추기시다니요!”

아칸에 잔뜩 화를 냈지만, 아칸은 허허 웃으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하는 듯한 모습에 화를 억눌렀다.

“그래서,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걸 왜 내게 묻는 건가?”

“일을 벌여놓지 않으셨습니까!”

“허허허···. 지금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하나일세. 폐하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게나.”

“예?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당연할수록 망각하기 쉽다네. 언제나 명심, 또 명심하게나.”

아칸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와닿지는 않았다.

친위대의 일이 황제를 지키는 것인데 본분을 잊지 말라는 건 무슨 소리인지 원···.

뭔가가 있는듯한 뉘앙스였지만, 물어보기에는 모호했다.

물어본다고 해서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부대를 정비해서 떠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나, 이제 슬슬 모든 준비가 끝나가고 있다네.”

그대로 멈춰서서 고개를 돌려 아칸을 봤다.

아칸은 눈을 감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인지, 낮잠을 자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준비를 말씀하십니까.”

“카르타고에 씨앗이 심어졌네.”

“카르타고 말입니까? 용케 스틸리코의 눈을 피하셨군요.”

“마리우스, 이 제국에서 내가 하지 못할 일이란 건 없어.”

“그러시군요.”

아칸의 눈과 마주치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쾌감과 꺼림칙함이 치밀어 올랐다.

아칸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우스 폐하를 잘 모시게.”

“몇 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에 하는 말일세.”

“그렇게 걱정되시면 폐하를 말리셨어야죠.”

“허허허 자네도 폐하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한번 하고자 하신 것은 포기하신 적이 없지 않은가.”

“그래도 시도는 해보셔야···.”

“불을 지른 건 자네인데 왜 나에게 화를 내는 건가?”

“가보겠습니다.”

“그래.”

탁자 위에 놓아둔 투구를 집어 들고서는 아칸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고약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저택을 빠져나오니, 입구에서 기다리던 병사들이 내게 경례를 올렸다.

“출발준비 완료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닭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모양입니다.”

“에라 시발.”

말 위에 올라서 급히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호노리우스가 대리석 바닥에 대자로 누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로마랑 페르시아 데려갈 거야!!”

“폐, 폐하 전쟁터에 동물을 데려가시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말도 데려가는데 왜 닭은 안 되는데!!”

“폐하···.”

말에서 내려 호노리우스를 향해 걸어가니, 전전긍긍하면서 호노리우스를 지켜보던 시종들이 자리를 비켜줬다.

마트에서 드러누운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러할까, 뭔가 부끄러우면서도 참으로 한심했다.

“일어나시지요.”

“마리우스! 쟤네들이 로마랑 페르시아를···.”

“알겠으니, 우선은 일어나시지요. 황제는 아무 곳에서나 누우시면 안 됩니다.”

바닥과 하나가 되어버린 황제를 일으켜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꼬맹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마랑 페르시아 데려가면 안 돼?”

“누가 전쟁터에 애완동물을 데려갑니까.”

“페테르라는 왕은 안 그랬어?”

오우 시발.

지난번에 하도 족구를 하자고 졸라대는 탓에 꼬맹이를 돌려보낸다고 표트르 대제 이야기를 해줬었는데 그게 호노리우스의 마음에 불을 지른듯했다.

위인전에서 봤던 내용을 조금 많이 각색해서, 어린 시절 정적들을 피해서 시골에서 숨을 죽이고 살던 어린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서 적들을 무찌르는 이야기였는데.

호노리우스가 이렇게 심취할 줄 누가 알았겠나.

“물론입니다. 페테르에게도 아끼던 고양이가 있었지만, 전쟁터에 데리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즉석에서 지어낸 이야기를 해주니, 호노리우스가 더욱 울상이 됐다.

“그럼 로마랑 페르시아는 두고 가야 하는 거야?”

“예, 폐하 어차피 금방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럼 뭐 두고 가야지. 페테르도 그랬다는데···.”

호노리우스는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닭들을 내려놓았고, 겁에 질렸던 닭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버렸다.

“마리우스 내 갑옷은 어딨어?”

“가, 갑옷 말씀입니까?”

눈을 돌려서 시종장을 바라봤다.

시종장도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시발.

“다, 당연히 준비되었습니다. 폐하.”

“역시 마리우스야! 숙부 죽으면 그 자리는 마리우스 줄게!”

“가, 감사합니다···.”

누가 들으면 참으로 좋아할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황제였다.

곁에 있던 시종들과 시종장의 얼굴이 굳었지만, 못 본 척했다.

“마리우스! 그리스에 델포이라는 곳에서는 신탁이 내려온대!”

“폐하, 그런 것들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거기서 내려오는 신탁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영웅이었다고 하던데!”

“폐하···. 신탁을 들어서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웅이 신탁을 들으러 가는 것이겠지요.”

“그런가? 그럼 나도 델포이 신전으로 가볼래!”

“폐하, 그곳은 이미 율리아누스 황제께서 폐쇄하셨습니다.”

호노리우스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소리쳤다.

“왜!”

“그런 미신을 믿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미신이라니···. 하지만 영웅들의 이야기는 진짜라고 하던데?”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전부 진짜 같습니까?”

호노리우스는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명랑하게 대답했다.

“영웅들이 있었겠지! 책에 그렇게 나왔어!”

“폐하께서 믿으신다면 있는 것이겠지요. 이만 부대를 출발시켜도 되겠습니까?”

“좋아, 출발!”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팔을 앞으로 두어 번 흔들었다.

내 수신호를 본 기수가 검은 독수리 모양의 깃발을 높이 들었고, 부대가 점점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두 반보!”

그렇게 그리스로 향하는 호노리우스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

한편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스틸리코는 기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조카가 온다는군.”

“황제 폐하께서 말입니까?”

“그래, 나를 도우려고 온다는군.”

“허허···.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린 조카가 분연히 일어났으니, 숙부가 도와야 하지 않겠나?”

스틸리코의 말에 가우덴티우스가 정색하면서 물었다.

“그럼 오늘 새벽에 적들을 습격한다는 계획은···.”

“취소지. 폐하께서 도착하시기 전까진 휴식을 취하세나, 병사들이 많이 지쳤다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려 하십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마리우스가 지난번에 알려줬습니다. 굳이 쓸데없는 일을 한다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또 마리우스인가? 하하하 그 친구도 참···.”

“그냥 빠르게 처리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스틸리코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빠르게 적을 격파해서 국경 밖으로 몰아낸다는 생각뿐이었네만···. 폐하께서 오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뭐가 말입니까?”

스틸리코는 고개를 들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적 진영을 바라봤다.

군데군데 피워진 횃불 사이로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과 그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스틸리코는 말했다.

“이번 기회에 서부의 영향력을 동부까지 퍼뜨릴 수 있겠어.”

“선 제께서 이유가 있어서 나눈 것이 아닐는지요.”

“그동안 내부의 일을 다루면서 내가 느낀 바가 하나 있었네.”

스틸리코의 말에 가우덴티우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제국이 개판이라는 건 동네 세 살짜리 꼬마도 알 것입니다.”

“하하하···. 그런 의미도 있지만, 제국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 만들어진 동서의 분열이 오히려 제국을 좀먹고 있다는 것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당장 동방과 서방의 말부터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 않은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스틸리코는 까슬까슬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이대로 가다 간은 제국은 동과 서로 완전하게 갈려버릴걸세.”

“하지만 다시 합친다면은 더 큰 혼란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천천히 합쳐야 한다는 게야.”

“허허···. 듣자 하니 장군께서는 오래 사셔야겠군요.”

가우덴티우스의 말에 스틸리코가 피식 웃었다.

“그래, 아마도 내가 늙어 죽을 때쯤이면 가능하겠지. 그때도 안되면···.”

스틸리코는 머릿속에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웃음을 지었다.

“다른 이에게 떠넘기면 되겠지!”

“장군치고는 무책임하시군요.”

“하하하 그런가? 요사이에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

“무슨 생각 말입니까.”

“나 혼자 너무 많은 일을 처리하려다가는 제명에 못 죽겠다고 말이야.”

“하하하. 그 간단한 걸 이제야 깨달으셨군요!”

“이제는 인정해야지. 제국은 혼자서 지키기에는 너무 거대해.”

스틸리코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이 그를 반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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